|
2024년 마가복음 제13강
고난받는 그리스도, 고난받는 제자
말씀 / 마가복음 8:27-9:1
요절 /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인간의 마음을 티백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티백이 봉지에 쌓여 있을 때는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라는 뜨거운 물에 담겨지면 본질이 드러납니다. 은은한 차 향기를 풍기고 담백한 차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말씀하십니다. 또 고난받을 제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원합니까? 우리는 어떤 제자로 살기를 원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셨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분봉왕으로 그 지역을 통치하던 헤롯 빌립이 가이사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성 드려 건설한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는 황제를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b)?” 제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28).”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전도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온 이스라엘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예수님을 향한 평판은 호의적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했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a)?” 예수님은 이번엔 제자들의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9b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You are the Christ!” 사람들은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그 그리스도,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로,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 왕, 선지자를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별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고백한 것에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가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예언은 원시복음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은 사람을 죄에 빠뜨린 뱀의 머리를 박살냅니다. 뱀은 사탄의 세력이요, 죄와 죽음의 세력을 말합니다. 성경은 죄 때문에 죽음이 시작되었다고 말씀합니다(롬6:23).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는 온 인류를 이 죄와 죽음의 문제로부터 구원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예수님에 대해 천사가 예언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영혼은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생의 삶으로 옮겨집니다.
사람에게 많은 문제가 있지만 죄와 죽음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죄 문제는 우리가 어떤 선행과 공로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저주받은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은 이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죄와 죽음 문제에 직면하면 우리 인생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던 우리의 운명을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 그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죽음의 운명에서 영생의 삶으로 역전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내어주시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놀라운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신 목적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로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때까지 갈릴리와 온 유대와 이방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신 이유도 예수님이 그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관심 가지고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미쳤다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랍비, 선생 중 하나로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선지자, 존경하는 하나님의 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해서 믿어졌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조차도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대로 보내주신 메시야, 그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길, 그리스도로서의 사역, 하나님이 약속대로 보내주신 그 그리스도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31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이 세상에 반드시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로서 감당해야 할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스토리를 누가 알아챌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로 신앙고백 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로서 감당하실 사역의 본질, 사역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난받고 죽으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가 가당키나 하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죽으려고 오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죽으러 가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죽음 후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고 고통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대속 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이요, 그리스도의 사역이요, 하나님이 약속대로 보내주신 그리스도로서 감당해야 할 본질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필연적인 고난과 버림당함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생애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필연적으로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 후의 영광!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길, 메시야의 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었고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시야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의 필연적인 고난과 부활의 영광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해 죽음으로 심판하시는 공의와,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우리 인생들을 향한 사랑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같은 메시야의 길에 대해 도저히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대로 보내주신 메시야,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역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붙들고 항변했다는 것은 따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책망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부 출신이었던 베드로의 우악스럽게 생긴 손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막 흔들며 침을 튀기며 “예수님, 그런 나약한 말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큰소리치며 반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주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라구요! 집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이렇게 주님을 따랐는데 죽으신다구요! 그것이 지금 말 같기나 합니까?” 베드로가 완전히 머리 뚜껑이 열려버렸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데리고 가서 책망했으니, 예수님이 베드로를 상대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서면서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꾸짖어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려면 베드로를 보면서 책망해야 할 터인데, 다른 제자들을 보면서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제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를 함께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말씀에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를 ‘사탄’이라고 했고, ‘나를 따라오라’ 부르시며 곁에 두셨던 핵심 제자에게 ‘물러가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러가라’라는 말씀은 ‘나의 뒤로 가라’는 의미입니다. 마가복음 1장 16,17절을 보면, 어부인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라’라는 부르심의 말씀은 ‘나의 뒤에 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물러가라’의 원래 의미인 ‘나의 뒤로 가라’는 말씀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의 말씀인 ‘나를 따라오라’, ‘나의 뒤에 서라’라는 말과 같은 말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처음 제자로 불렀을 때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사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자리를 떠나서 다시 제자로서의 본연의 자리, 예수님 뒤에 서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아예 제자의 자리, 박탈시켜버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예 쫓아내 버리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정신 바짝 차려! 제자의 자리를 지켜야지!” 뭐, 이 정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가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욕심을 위해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죽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신앙고백은 제자로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제대로 깨달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뒤에 서서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과 행동과 가르침을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을 하고,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을 동일하게 제자들에게도 뒤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제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에게 ‘자기,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라’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거짓된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나,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며 경배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싫어하는 모습, 죄악된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 깊은 곳에는 하나님같이 되고자 했던 첫 사람 아담의 교만한 본성, 하나님을 대항했던 가인의 반발심의 본성이 잠복해 있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자기 욕심,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본성이 꿈틀댑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 안의 죄악된 본성과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기독 심리학자 폴 비츠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보편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이단이 있다. 그것은 자기 숭배의 이단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요, 왕으로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숭배, 자기중심성에 빠져 있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하나님의 일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흉악범과 반역자를 처형하는 무서운 사형 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예전에 죄를 짓고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모든 삶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된 욕망들이 꿈틀댈 때마다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 박아 날마다 죽는 자세로, 순교자적인 자세로 죄악된 욕망과 싸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에 죽으신, 단 하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저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쉬고 싶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공동체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서 고난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기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말씀은 역설적이지만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기 목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의 목숨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입니다(37).
사람들이 가장 얻고 싶어 하는 것은 36절에 나오는 것처럼, ‘온 천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만 대권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고, 가장 인정받고, 가장 인기를 얻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또 누구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온 천하를 호령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자기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 길에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은 생명을 버리는 길로, 죽는 길로 가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가장 소중한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생명을 얻는 길로, 생명을 살리는 길로 가십니다. 제자들에게도 생명을 얻고 생명을 살리는 길을 가도록 가르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할 줄 알고 이 땅의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이 음란하고 죄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곳이기에,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자라면,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평가받을까요? 그것에 더 신경 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소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9장 1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으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영광을 보는 날을 먼 훗날, 주님 재림 때의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 생애에는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살펴보게 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오늘 말씀을 하신 지 바로 6일 후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 산상에서 놀라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로부터 약 50일이 지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큰 권능으로 제자들에게 임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의 주님이 빛으로 영광 가운데 바울에게 임하셨습니다. 또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로 쳐 죽임을 당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수치, 고난, 십자가, 이런 것들은 가까이 있고, 영광과 권능의 날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이실 영광과 권능의 날을 소망하면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신앙 고백하십니까? 예수님은 창세 때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유일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을 신앙고백 하면서 뒤따르는 삶을 통해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다 보면, 때로는 수치, 고난, 역경, 십자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나타내 보이실 영광과 권능의 날도 가까이 있음을 소망하고 힘입어서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뒤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