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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外編 12篇 天地篇 (장자 외편 12편 천지편 해설)
이 편에서는 내편內篇에서 근원적인 실재로 표현되었던 ‘도道’를 대신해서 ‘천天’이 강조되고 있다. ‘천天’의 강조는 도가의 문헌만이 아니라 유가의 문헌인 중용中庸의 ‘천天’은 물론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의 ‘천리天理’, 또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천지지도天地之道’ 등에서 두루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유가적 색채가 강한 범주이다. 이 때문에 이 편의 내용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유가儒家와 타협적인 색채가 강하다. 아울러 천天의 강조는 이 편뿐만 아니라 바로 뒤의 〈천도天道〉편에도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이런 점은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의 융합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상 간의 적극적인 교류의 흔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후꾸나가(福永光司) 같은 학자는 이 편의 저작 시기를 전국말戰國末에서 한초漢初라고 추정했다.
第2章에서는 공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등장시켜 “도道란 만물을 덮어 주고 실어 주는 것이다. 넓고도 크구나. 군자는 사심을 도려내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무위無爲로 행하는 것을 천天이라 일컫고 무위로 말하는 것을 일러 덕德이라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해 주는 것을 인仁이라 일컫고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보는 것을 일러 대大라 한다.”고 하여 유가적 가치인 천지, 인 등의 개념과 도가적 가치인 무위가 혼재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또한 내편의 사상에서 크게 변화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第11章에서 현실(세속)의 사회를 ‘부득이한 것’으로 일단 긍정하고, 그 속에 사는 초월자의 자유를 강조하는 철학은, 내편 특히 〈인간세人間世〉편 등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또 이 같은 현실 긍정의 사상은 〈산목山木〉편의 “지인은 자신을 비워서 세상에 노닐 줄 안다.”라고 한 내용과 〈외물外物〉편의 “오직 지인만이 비로소 세상에 노닐면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한 언급에서도 한층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진晉의 왕강거王康琚가 “소은小隱은 능수陵藪에 숨고 대은大隱은 시조市朝에 숨는다.”고 한 유명한 말도 이 편에 나온 현실 긍정의 육조적六朝的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공을 질타하는 한음장인漢陰丈人의 은둔적隱遁的 무위無爲가 장자莊子의 이 같은 현실 긍정의 철학에 의해 비판받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이 번역서에서는 장자莊子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주석가에 따라서 장자莊子가 공자孔子의 말을 빌어 한음장인漢陰丈人이 송영자 수준에 지나지 않는 인물로 비판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장章의 서술은 무위無爲의 사상을 장자적인 유遊의 철학과 결합하여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기일識其一 부지기이不知其二’는 한음장인漢陰丈人에 대한 비판으로 제11장에서 사용된 말인데, 진晉의 왕탄지王坦之는 장주莊周 철학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제기한 〈폐장론廢莊論〉에서 이 말을 오히려 장자비판莊子批判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왕탄지王坦之는 〈폐장론〉에서 장주莊周의 철학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식기일識其一 이부지기이而不知其二].”고 비판하고 공자孔子의 철학이 장주莊周의 철학에 비해 우위優位라고 주장하면서 장주의 책을 불태우는 것이 옳다고 극언하기도 했다.
莊子 外編 12篇 天地篇 第1章(장자 외편 12편 천지편 제1장)
천지가 비록 광대하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만물의 생성 변화는 평등하며, 만물이 비록 잡다하지만, 그것이 질서 정연하게 다스려지는 것은 동일하며, 민중의 수가 비록 많지만, 그 주인은 한 사람의 군주이다. 군주는 덕德에 근거하고 자연[천天] 속에서 성취된다. 그 때문에 아주 오랜 옛날 천하에 군림한 임금은 무위無爲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천덕天德의 실천일 따름이다.
도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말을 살펴보면, 천하의 군주들이 올바르게 될 것이고, 도를 기준으로 상하의 신분 질서를 살펴 조정하면, 군신 간의 의가 밝혀지고, 도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재능을 살펴 헤아리면 천하의, 모든 관직이 잘 다스려지고, 도를 기준으로 널리 모든 사물을 관찰하면, 모든 사물에 대한 대응이 완비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널리 통通하는 것은 덕德이고 만물 가운데에서 널리 작용하는 것은 천지자연의 도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정사에 지나지 않고 재능이 많은 것을 유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기술에 지나지 않으니, 기술은 정사政事에 포섭包攝되고, 정사는 의義에 포섭되고, 의義는 덕德에 포섭되고, 덕德은 도道에 포섭되고, 도道는 자연[천天]에 포섭된다.
그래서 고인古人의 말에 이르기를 “옛날 천하를 다스렸던 군주는 스스로 무욕無欲하여 천하 인민의 삶이 충족되었으며, 스스로 무위無爲하여 만물이 저절로 화육化育되었으며 스스로 깊은 못처럼 고요히 침묵하여 천하 만민의 삶이 안정安定되었다.”라고 하였다.
전해 오는 기록에도 이르기를 “근원根源의 일一인 도道에 통달하면 만사가 모두 잘 되었으며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귀신鬼神들까지도 감복感服한다.”고 하였다.
[원문과 해설]
天地雖大其化均也 萬物雖多其治一也 人卒雖衆其主君也
君原於德而成於天 故曰玄古之君天下無爲也 天德而已矣
(천지수대나 기화균야며 만물이 수다나 기치일야며 인졸이 수중이나 기주군야니라
군은 원어덕이성어천하나니 고로 왈 현고지군천하하니는 무위야라하노니 천덕이이의니라)
천지가 비록 광대하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만물의 생성 변화는 평등하며, 만물이 비록 잡다하지만 그것이 질서 정연하게 다스려지는 것은 동일하며, 민중의 수가 비록 많지만 그 주인은 한 사람의 군주이다. 군주는 덕德에 근거하고 자연[천天] 속에서 성취된다. 그 때문에 아주 오랜 옛날 천하에 군림한 임금은 아무것도 함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천덕天德의 실천일 따름이다.
- 천지수대天地雖大 : 천지天地에 대해 “≪석명釋名≫에 이르기를 ‘천天은 드러남이니 높이 드러나 위에 있음이다. 또 드넓음이니 드넓게 고원함이다. 땅은 낮음이니 그 형체가 아래에 있으면서 만물을 실어 준다.’고 했다
- 기화균야其化均也 : 균均은 균등均等 또는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뜻. 천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만물의 생성 변화가 균등하다는 뜻. 화化는 천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만물의 생성 변화.
- 기치일야其治一也 : 일一은 균일均一하다, 똑같다[일양一樣].
- 인졸人卒 : 일반 백성. ‘위인지졸자爲人之卒者(남의 졸도가 된 자)’의 줄임말. 인주人主에 상대되는 말로 여기서는 바로 뒤의 주主와 대비된다.
- 원어덕이성어천原於德而成於天 : 덕에 근거함이란 만물 본래의 생득生得의 작용作用[덕德]에 근거[원原]함이고, 자연 속에서 성취한다는 것은 천天 속에서, 즉 천리자연天理自然에 의해 〈군주로〉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다.
- 고왈현고지군천하무위야故曰玄古之君天下無爲也 : 현玄을 원遠의 뜻으로 보고 “아주 오랜 옛날의 성군들은 무위로 천하를 다스렸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풀이.
- 천덕이이의天德而已矣 : 〈이것이 바로〉 천덕天德일 따름이다. 천덕天德은 천지자연의 본래적本來的 작용作用을 말하는데, 위 문장 ‘원어덕原於德 이성어천而成於天’을 압축한 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천덕이이의天德而已矣는 고왈故曰의 인용 속에 포함된 말이 아니라 (인용은 무위야無爲也에서 끝남), 장자가 평가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以道觀言而天下之君正 以道觀分而君臣之義明
以道觀能而天下之官治 以道汎觀而萬物之應備
(이도로 관언하면 이천하지군이 정하고 이도로 관분하면 이군신지의 명하고
이도로관능하면 이천하지관이 치하고 이도로 범관이면 이만물지응이 비하리라)
도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말을 살펴보면 천하의 군주들이 올바르게 될 것이고, 도를 기준으로 상하의 신분 질서를 살펴 조정하면 군신 간의 의가 밝혀지고, 도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재능을 살펴 헤아리면 천하의 모든 관직이 잘 다스려지고, 도를 기준으로 널리 모든 사물을 관찰하면 모든 사물에 대한 대응이 완비될 것이다.
- 이도관언이천하지군정以道觀言而天下之君正 : 도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말을 살펴보면 천하의 군주들이 올바르게 됨. 도道는 앞에 설명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리법理法을 말하고, 언言은 사람들의 발언發言 또는 언론言論을 말함. 天下之君正은 천하의 군주들이 올바르게 됨, 즉 잘못을 저지를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而는 접속사가 아니고 ‘곧’이라는 정도의 어사語詞. 아래에 세 번 보이는 이而도 마찬가지임.
- 이도관분이군신지의명以道觀分而君臣之義明 : 도를 기준으로 상하의 신분 질서를 살펴 조정하면 군신 간의 의가 밝혀짐. 군주는 무위無爲하고 신하는 유위有爲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成玄英은 “군도君道는 하는 일이 없고[無爲] 신도臣道는 담당하는 일이 있다. 신분의 존비와 수고롭게 일하고 편안함이 이치상 본디 같지 않다. 비유하자면 머리는 스스로 위에 있고 발은 스스로 아래에 있는 것과 같아서 도를 가지고 관찰하면 분分의 의리[義]가 분명해진다.”라고 풀이했다.
- 만물지응비萬物之應備 : 모든 사물에 대한 대응이 완비됨. 만물의 군주에 대응한다는 뜻.
故通於天地者德也 行於萬物者道也 上治人者事也 能有所藝者技也 技兼於事 事兼於義 義兼於德 德兼於道 道兼於天
(고로 통어천지자는 덕야요 행어만물자는 도야요 상치인자는 사야요 능유소예자는 기야니
기겸어사하고 사겸어의하고 의겸어덕하고 덕겸어도하고 도겸어청하니라)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널리 통通하는 것은 덕德이고 만물 가운데에서 널리 작용하는 것은 천지자연의 도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정사에 지나지 않고 재능이 많은 것을 유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기술에 지나지 않으니, 기술은 정사政事에 포섭包攝되고, 정사는 의義에 포섭되고, 의義는 덕德에 포섭되고, 덕德은 도道에 포섭되고, 도道는 자연[천天]에 포섭된다.
- 고통어천지자덕야故通於天地者德也 행어만물자도야行於萬物者道也 :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널리 통通하는 것은 덕德이고 만물 가운데에서 널리 작용하는 것은 천지자연의 도임. - 상치인자사야上治人者事也 :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정사임. 사람을 잘 다스리는 능력은 정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정사政事는 도道와 덕德에 견줄 때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하급의 가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상上은 다른 일반적인 해석처럼 윗사람‧상위자上位者‧군주君主 등으로 풀이하는 명사名詞가 아니다. 위상爲上 즉 위로 여김,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뜻의 동사動詞이다. “무릇 남을 다스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형정과 상벌을 뜻대로 하는 것이니 모두 정사일 뿐이다.(저백수褚伯秀)”
- 능유소예자기야能有所藝者技也 : 재능이 많은 것을 유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기술임. 재능이 많은 것은 하찮은 기술상의 장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바로 위의 정사政事와 마찬가지로 세속에서 중시하는 재능[예藝]도 도道와 덕德과 견주면 하급의 가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능能은 유소예자有所藝者 즉 재능이 많이 있는 것을 능能한다. 즉 유능한 것으로 여긴다는 뜻의 동사.
- 기겸어사技兼於事 : 기술은 군주의 정사政事에 포섭包攝됨. 곧 기술은 예악이나 형정의 구속, 통제를 받는 하위개념에 해당한다는 뜻. 兼은 統과 같다.
故曰古之畜天下者 無欲而天下足 無爲而萬物化 淵靜而百姓定
記曰通於一而萬事畢 無心得而鬼神服
(고로 왈 고지축천하자는 무욕이천하족하며 무위이만물이 화하며 연정이백성이 정이라하노라
기왈 통어일이만사 필하며 무심득이귀신이 복이라하도다)
그래서 고인古人의 말에 이르기를 “옛날 천하를 다스렸던 군주는 스스로 무욕無欲하여 천하 인민의 삶이 충족되었으며, 스스로 무위無爲하여 만물이 저절로 화육化育되었으며 스스로 깊은 못처럼 고요히 침묵하여 천하 만민의 삶이 안정安定되었다.”라고 하였다.
전해 오는 기록에도 이르기를 “근원根源의 일一인 도道에 통달하면 만사가 모두 잘 되었으며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귀신鬼神들까지도 감복感服한다.”고 하였다.
- 연정이백성이 정淵靜而百姓定 : 깊은 못처럼 고요히 침묵하여 천하 만민의 삶이 안정安定됨. 연정淵靜은 깊은 못처럼 말없이 하는 일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정定은 안정安定의 뜻. 앞의 ‘무욕이無欲而, 무위이無爲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정이淵靜而의 ‘이而’는 접속사가 아닌 ‘곧’ 정도의 뜻.
- 기왈記曰 : 전해 오는 기록에 이르기를. 기記는 노자老子가 지은 책 이름이라는 풀이가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 통어일이만사필通於一而萬事畢 : 도道에 통달하면 만사가 모두 잘 이루어짐. 여기의 ‘이而’도 ‘곧’ 정도의 어사語辭. 일一은 도道를 지칭한다.
- 무심득이귀신복無心得而鬼神服 :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귀신鬼神들까지도 감복感服함. 무심득無心得은 무심의 경지를 터득했다는 뜻. 장자莊子에서 ‘무심無心’이란 말이 보이는 것이 여기가 처음이며, 내편內篇 〈인간세人間世〉편 제1장에 “이목耳目이 전해 주는 것을 따라 외부의 사물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안에 있는 교활한 심지心知를 버리면 귀신도 와서 머무르려 한다.”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