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저 쪽 뒷문 (외3편)
이영춘
어머니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천길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내가 왜 자식이 없냐! 집이 없냐!" 절규 같은
돌아서는 발길에 칭칭 감겨 돌덩이가 되는데
한 때 내 푸르던 날 실타래처럼 풀려
아득한 시간 저 쪽 어머니 시간 속으로
내 살처럼 키운 내 아이들이 나를 밀어 넣는다면
아, 아득한 절망 그 절벽...
나는 꺽꺽 목 꺾인 짐승으로 운다
아, 어찌해야 하나
은빛 바람결들이 은빛 물고기들을 싣고 와
한 트럭 부려 놓고 가는 저 언덕배기 집
생의 유폐된 시간의 목숨들을
어머니의 시간 저 쪽 뒷문이 자꾸
관절 꺾인 무릎으로 나를 끌어당기는데.
아들과의 산책
이 영 춘
서른을 훌쩍 넘긴 아들과 강둑길을 걷는다
오래 묵은 이야기들이 체증을 뚫는 듯
강물도 흥겨워 흥얼거린다
느닷없는 아들의 말, 심장을 파고든다
“엄마, 우리들 키우느라고 고생하셨어요.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를 이 집 저 집에 맡기면서......
직장 다니시느라고......“
아들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노을이 걸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하늘이 쿵- 내려앉는 듯
오래오래 삭혔던 눈물이 혈관을 타고 올라온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사각의 틀(型) 속에서
화장실에 가 젖을 꾹꾹 짜 버리면서도 먹이지 못했던
한의 눈물, 한의 핏물, 거꾸로 솟는다
하늘이 버얼겋게 눈을 뜬 채 내 얼굴을 포옥 감싸 안는다
아들은 어느 새
이 어미의 몸과 마음이 불꽃처럼 아프던
그 나이에 이르러
어미 발자국에 고인 눈물의 내력을 알아차렸는가
어미의 뒷모습에 걸린 고단한 그림자의 기억을 읽어내었는가
나는 오래도록 숨 죽이며 내 안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아들과 잡은 손에 따뜻한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듯이
노자의 무덤을 가다
이영춘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상은 빈 그릇이었다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
바람이 숨 쉬다 돌아간 허공의 크기
뻥 뚫린 그릇이다,
공(空)의 그릇,
살아 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
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
그 누구의 그림자일까?
누구의 푸른 등걸일까?
온 지상은 문을 닫고
온 지상은 숨을 멈추고
아무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릇,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다
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 만 원 읎겠니?"
그 말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