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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보리심론(廣釋菩提心論) 제1권
연화계(蓮華戒) 지음
시호(施護) 한역
김치온 번역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대승의 모든 법의 행을 간략히 모아
최초로 수승한 사업(事業)을 건립하여서
나 지금 보리심을 자세히 주석하노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증득하고자 하는 자라면, 총체적이거나 간략하게 표방한 마음이 세 곳에 머물면서 비심(悲心)을 낳는다. 비심으로부터 대보리심이 발생하는데, 가장 수승한 일체 부처님의 법은 모두 비심을 말미암아서 근본이 되니, 이 비심이 인(因)이 되어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관자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여러 가지 법문을 수학(修學)하지 말고 다만 한 가지 법만을 스스로 부지런히 행해야만 곧 일체법을 손 안에 얻은 듯합니다. 어떠한 것이 한 가지 법입니까? 이른바 대비(大悲)입니다. 모든 보살은 이 대비를 타면 곧 일체 부처님의 법을 손 안에 얻은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전륜성왕이 윤보의 행처[輪寶行處]에서 곧 일체 힘의 더미[力聚]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비의 행처에서 곧 일체 부처님의 법력의 더미를 능히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사부(士夫)의 명근(命根)이 견고함은 능히 모든 근(根)을 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듯이, 모든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비가 견고함은 능히 모든 보리의 행법을 능히 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또한 사리자여, 마땅히 알아라. 모든 보살의 대비는 다함이 없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일체법과 더불어 선도(先導)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여, 비유하자면 사부(士夫)가 지닌 명근이 출입하는 호흡과 더불어 선도가 되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 법문의 광대하고 두루한 모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살의 대비가 선도하기 때문이니라.”
『상두경(象頭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천자(天子)가 묘길상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일체 보살의 수승한 행을 일으킬 수 있고 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천자여, 대비라야 능히 일체 보살의 수승한 행을 일으키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반연함이 경계가 되어 머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일체 중생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돌아보고 애석해 하는 바가 없느니라. 순수하게 한결같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기르며, 오랜 세월동안 어렵게 짓고 능히 지어서 모든 행을 발생하느니라.’”
『신력법문경(信力法門經)』에서 말하였다.
“저 모든 보살의 비심(悲心)은 견고해서 일체 중생을 구하여 제도하지만, 그 때도 조금도 고통이라는 생각이 없고, 제도한 후에도 제도하였다는 생각이 없고, 일체의 어려운 행과 고통스러운 행도 버리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하여 오래지 않아 모든 행이 원만해지고 본래 원한 일체지의 증득을 이루어서 일체의 부처님 법을 얻느니라.”
이와 같이 모두가 비심을 말미암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모든 불세존은 일체지를 현증(現證)하고 대비를 두루 거두어서 널리 세간을 위하여 가장 수승한 이익을 짓고 무주(無住)열반에 편안히 머무른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행은 모두가 대비로써 그 인(因)을 삼는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인(因) 중에 설령 고뇌가 있더라도 이때도 중생의 작의(作意)를 반연하여 더욱 다시 많은 것을 지어서 증장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모든 경전에서 설하셨듯이, 일체 중생은 모든 취(趣)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는다. 그 감응하는 바 지극한 고통만큼이나 보살은 항상 중생을 위해 자비와 연민으로 관찰한다. 이른바 지옥취 중에는 여러 가지의 고통이 있는데, 업의 불길이 타올라 오랜 시간 끊이지 앉는 고뇌가 다함없는 것이 마치 세간의 도적을 여러 가지 벌로 다스려 묶고 치고 찌르고 또 쫓아버리고 몸을 잘라 나누어서 모든 고뇌를 받게 하는 것과 같다. 이 고통 또한 그러하다.
아귀취 중에는 여러 가지 극심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데, 몸이 비쩍 말라서 먹을 것을 찾아 구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해친다. 항상 찾아 구하기를 설령 백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끝내 버려진 사소한 것이나 깨끗하지 못한 것 등이라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어떤 아귀는 자신의 힘이 열악하여 다른 수승한 것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비록 의지하기는 하지만 얻는 바가 없다. 설령 얻는 바가 있더라도 강력한 귀신들로 전변해서 기만과 능멸로 협박해 빼앗으며 채찍으로 때려서 벌로 다스린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은 예전에 사람으로 있을 때에 부유함과 즐거움이 자재한 무리들이 악한 일들을 일으키다가 이 아귀취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축생취에서도 무수한 고통을 받는다. 화를 내어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서로 간에 잡아먹고, 혹은 그 코를 꿰뚫고, 혹은 몸이 파열되고, 혹은 때리고 묶는 등 극히 자재하지 못해서 몸 전체가 아픈 것이 참으로 약간이라도 사랑하거나 즐거워할 만한 곳이 없다. 마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면 전혀 게으르고 나태할 수 없듯이,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도 피로함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축생들은 광야에서 한 순간 방일한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분주함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으며 서로 해치고 두려움을 일으킨다. 이 축생취 중에는 또 이러한 고통이 있다.
이와 같이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여러 취들은 여러 가지 번뇌의 악업을 일으키는 것이 인이 되기 때문에 그 각각의 취에서 고뇌를 받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낭떠러지의 험한 곳에 떨어진 것처럼 고뇌 또한 그러하다.
저 인취(人趣)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음은 욕계의 하늘들이다. 욕심의 불길이 타올라 마음이 산란해지자 자신의 마음을 찰나 간에 한 곳으로 고정하여 모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으니, 마땅히 욕망의 쾌락이 무너질 때 즉각 고통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치 가난의 고통과 같으니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이 욕계천에는 항상 떨어져 멸하는 것이라서 두려움과 근심과 파괴 등 역시 그 즐거움이 아니다.
색계천들은 이른바 모든 행이 항상 변천하여 전전하는 것을 말미암으니, 그 하늘의 과보가 다하면 다시 지옥 등의 취에 떨어진다.
“이와 같은 등의 취의 무리들은 번뇌와 업 등에 항상 얽히고 묶여서 자재하지 못하며, 이로 말미암아 온갖 고뇌들을 낳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불길이 치성하여 불타고 있는 세간은 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보살은 이 고통을 보면 즉시 자비심을 일으켜서 일체 중생을 널리 관찰한다. 또한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볼 때도 원망도 친함도 없이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평등하게 관찰해서 제도한다. 또한 일체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윤회하여 유전하는데, 보살은 하나의 중생이라도 친우(親友)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으니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에 즉(卽)해서 시방의 일체 중생을 널리 두루 관찰하는데, 만일 하나의 중생이라도 고통 받는 자가 있음을 본다면, 보살은 그를 자식처럼 사랑해서 즉각 그 고통을 대신 받아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지 않게 한다. 이러한 자비심이 전전하기 때문에 능히 일체 중생의 고뇌를 쉬어 멸하게 하며, 더 나아가 대비의 수승한 행을 성취하는 것이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이 자비관행[悲觀行]은 세존께서 『아비달마경』에서 최초로 설하신 것이다. 일체의 유정들을 구하여 제도하고자 하는 까닭에 비원(悲願) 등의 힘을 일으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곧 이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십지경(十地經)』에서 말하였다.
“일체 중생 가운데 구호(救護)를 받지 못하는 자, 귀의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 의지할 곳이 없는 자, 지견(知見)이 없는 자들을 보살이 보면 즉시 자비의 마음을 낳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 만약에 남을 위하여 길을 열어 가르침을 보이지 못한다면, 보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들이 용감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는 것은 곧 비심이 견고함을 말한다.
『여래지인삼마지승상경(如來智印三摩地勝上經)』에서 말하였다.
“보리심이 행하는 바는 능히 윤회의 고통을 무너뜨린다.”
『미륵해탈경(彌勒解脫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큰 금강보석을 취하지 않고 따로 일체 금으로 된 장엄구를 얻으며, 그리고 또한 큰 금강보석을 버리지 않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을 능히 널리 구제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일체 지혜의 마음인 큰 금강보석을 취하지 않고 따로 일체 성문, 연각의 공덕인 금으로 된 장엄구를 얻으며, 그리고 또한 그 보살의 행을 버리지 않고 일체 윤회하는 가난하고 곤궁한 자들을 능히 널리 구제한다. 보살은 능히 일체의 종류와 일체의 학문을 평등하게 닦는데, 이것이 한량없는 수승한 행이다. 그러므로 보리심으로부터 방편을 낳아서 대보리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여래시교승군왕경(如來示敎勝軍王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네가 여러 가지 사업을 짓는다면, 일체의 종류와 일체의 장소에서 마땅히 보시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을 함께 상응하게 배워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대왕이여, 그대가 응당 이처럼 정등각에게 믿음과 염원을 구해서 평등한 마음을 향하여 나아감을 일으킨다면, 머물거나 가거나 눕거나 서거나 마시거나 먹거나 온갖 짓는 바에서 결정적으로 항시 작의(作意)를 사념하여 일체의 부처님ㆍ보살ㆍ연각ㆍ성문, 모든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 및 자신의 몸 등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체 선근이 한 곳에 모여서 수승하고 높은 마음을 발하여 응당 스스로 따라 기뻐할[隨喜] 뿐임을 관상(觀想)해야 하느니라.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과 연각과 성문의 무리에 널리 공양하고 받들어 모신 공덕을 일체의 중생들과 더불어 나누면서 널리 중생들이 일체지를 얻기를 원해야 한다. 일체 부처님의 법은 모두 다 원만하여 만약에 매일 세 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 대왕이여, 그대가 짓는 일들이 모두 청정함을 얻을 것이고 보리행 등도 또한 모두 성취될 것이니라. 또한 대왕이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 낳은 선근의 과보는 무수히 많으니라.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천상에 나거나 일체의 장소에서 항상 가장 수승함을 얻는다. 그리고 그대 대왕 또한 이와 같이 지으면, 그것은 광대해서 대왕의 대보리심은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할 것이다. 만약에 행한 바가 진실하다면, 곧 능히 대보리과를 성취할 것이다.’”
『무외무문경(無畏撫問經)』에서 말하였다.
“보리심을 일으켜 생겨난 복들은 허공계와 같아서 광대하고 수승하고 높아서 다함이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불국토에 가득하게 진기한 보배를 세존께 공양한다 해도 어떤 사람이 능히 합장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한 번만이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 복덕의 수승함은 앞서 말한 복덕과 비교할 수가 없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보리심으로부터 일체 부처님의 법이 나오며 광대하고 수승하게 장엄하니라. 보리심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가 원심(願心)이며, 둘째는 분위심(分位心)이니라.”
또 그 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지극히 얻기 어려운 것이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지만, 만약 널리 행원(行願)을 일으킨다면 즉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현전해 안주할 것이며 능히 온 세간에 널리 이익을 지을 것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성불할 수 있었던 것도 이른바 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본원심(本願心)을 탄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후에 행한 모든 행은 앞에서 일으킨 그 일체의 행으로부터 널리 포섭되어 분위심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행원(行願) 등의 힘이 만약 다 성립되면 곧 선지식이 현전하여 섭수하게 되어서 일체의 실답지 않은 경계의 모습은 버리게 된다. 마치 묘길상보살이 위에서 왕에 의해 보리심을 일으킨 것과 같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리심을 일으켜서 스스로 행하는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다가 수승한 행과 상응하게 한다. 만약에 사람이 자신을 조복시키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능히 다른 사람을 조복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이 만약에 스스로 모든 행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리 대보리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또 『상두경(象頭經)』에서 말하였다.
“보살들의 소행이 진실하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 모든 소행에 진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에서 말하였다.
“동자여, 내가 행한 대로 하면 진실을 얻기 때문이니, 그래서 그대 동자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동자여, 행한 바가 진실하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행할 모든 행을 십바라밀다(十波羅蜜多)ㆍ사무량(四無量)ㆍ사섭법(四攝法) 등으로 자세히 분별한다면, 『무진의경(無盡意經)』 과 『보운경(寶雲經)』 등의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배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세간의 배움과 출세간의 배움이다. 무엇을 세간의 배움이라 하는가? 기능과 공교(功巧) 등이다. 무엇을 출세간의 배움이라 하는가? 선정 등을 말한다. 나머지는 어떤 것인가? 중생의 이익을 위해 짓는 일체의 사업을 말한다. 이 중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의 소행은 요약해서 말하면 지혜와 방편이니, 이 두 법을 감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방편이 없으면 지혜가 묶이고, 방편이 있으면 지혜가 풀리고, 지혜가 없으면 방편이 묶이고, 지혜가 있으면 방편이 풀린다.”
또 『상두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보살에게는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의 도(道)가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도가 구족되면 모든 보살은 곧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증득할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지혜와 방편이다. 만약에 반야바라밀다행과 모든 바라밀다 및 사섭법 등을 여읜다면, 어떻게 능히 청정한 불국토를 장엄하여 크게 부유하여 자재할 것이며, 유정을 성숙시켜 모든 교화의 일을 지을 것이며, 널리 모든 법의 선교방편을 거두어들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지혜와 저 방편은 전도의 성품이 없고 분별의 인(因)이 있으니, 이 인을 말미암기 때문에 바른 방편이 일어난다. 마치 설한 법들이 전도됨이 없는 사유와 분별을 일으켜서 결국 능히 자신과 타인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 능히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치 온갖 독이 주술에 의해 제거되는 것과 같다.”
또 이 경에서 말하기를, “지혜가 방편을 거두어들이는 이것을 유분별지(有分別智)라 한다”고 하였다.
또 『신력법문경(信力法門經)』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선교방편이라 하는가? 일체의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지혜라고 하는가? 일체의 법에서 선(善)을 파괴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지혜와 방편의 두 종류는 모든 경지에 두루 들어가서 어느 때나 항상 행하는 것이지 중도에 그것을 감소케 할 수 없는 것이다. 십지(十地)의 보살들은 십바라밀다를 행하고 나아가 모든 행을 널리 행하니, 『십지경』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팔지(八地)의 보살은 부처님의 위의(威儀)로부터 일어나니 지식행(止息行)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 경에서 말하였다.
“다음으로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앞서 일으킨 대원가지선근력(大願加持善根力)의 머묾에 의거해야 한다. 모든 불세존 또한 이 법문으로부터 대지혜의 원만한 작용들이 흘러나온 것이니, 이것이 곧 최상의 인문(忍門)으로서 일체의 부처님 법이 이로 말미암아 집성된 것이다. 또한 선남자여, 마땅히 이와 같은 지식행(止息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나니, 내[我]가 십력(十力)ㆍ사무소외(四無所畏)ㆍ십팔불공(十八不共)의 모든 신통 등 일체 부처님의 법을 얻은 것과 같아서 그대는 마땅히 정진을 발하고 모든 염원을 일으켜서 상응하여 행해야 함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은 인문(忍門)을 버리거나 여의지 말아야 한다. 선남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모든 어리석은 범부 중생들이 갖가지 번뇌를 쌓고 갖가지 찾아 구함을 일으킴이 끊임없이 상속됨을 관찰하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지식(止息)의 행을 일으키고자 하는가? 또한 선남자여,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모든 법은 법성으로서 스스로 상주(常住)한다. 법성이 상주하므로 여래는 곧 생함이 없다. 소위 성문과 연각들이 일체의 법은 분별이 없고 생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선방편으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다. 또 선남자여, 그대는 내 몸의 무량함과 지혜의 무량함과 불국토의 무량함과 원만광명[圓光]의 무량함과 지현전문(智現前門)의 무량함과 청정의 무량함 등과 같은 모든 광대한 법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본원(本願)의 행을 타고 마땅히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을 사념해야 곧 이와 같은 부사의한 지혜의 문을 얻을 것이다.”
『십지경』에서 말한 행상(行相)은 『유마힐경』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경에서 말하였다.
“묘길상이 만약 어떤 이가 여래가 설한 법을 경솔하게 비방을 했다면, 이 사람은 비록 비방하는 말을 했지만 내가 설한 것처럼 또한 청정함을 얻었으니, 이 가운데 이(理)와 사(事)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상두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들은 보리를 위하는 까닭에 육바라밀다를 쌓아 모으느니라. 혹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반야바라밀다는 보살의 학(學)인데 어찌 다시 나머지 바라밀다를 배우겠는가?‘라고 말하고, 혹은 어떤 이는 이미 듣고 나서 방편 등의 모든 바라밀다를 버리고자 하는 뜻을 일으키니. 미륵아, 너의 뜻은 어떠하냐? 예컨대 가시왕은 자신의 살을 취하여 비둘기를 구하였는데, 이 왕이 어리석은가? 미륵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살행을 닦을 적에 널리 육바라밀다와 상응하는 선근을 닦았는데, 응당 이익이 없는 것이냐?’ 미륵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육십 겁 중에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다를 쌓아 모았듯이, 육십 겁에 이르도록 반야바라밀다를 쌓아 모은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 가운데 행과 상응하는 지혜를 자세히 설하였느니라.’”
『광석보리심론』 1권(ABC, K1449 v40, p.492c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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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여기서는 『비로자나성불경(毘盧遮那成佛經)』에서 말하였다.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비심(悲心)을 근본으로 삼으니, 비(悲)로부터 대보리심이 발생하고 그런 연후에 모든 방편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때에 항상 이 두 가지를 행한다. 보시 등의 방편으로 몸을 나투고 국토를 나투고, 권속과 색상(色相)의 광대한 과보도 두 가지 종류에 포섭되므로 모두 성취할 수 있다. 가령 불세존께서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일체로 하여금 바른 지혜를 일으켜 널리 모든 전도(顚倒)를 능히 끊어 없애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다시 생사에 머물지 않는 것은 생사를 말미암아 전도가 일어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머무름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와 방편은 자상(自相)이 행한 것으로 마땅히 공상(共相)과 훼방의 양변(兩邊)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양변을 여의므로 중간의 행한 바가 곧 무애함을 얻는다. 소위 공상과 훼방의 변(邊)이란 말하자면 지혜는 공상의 변을 여의고 방편은 훼방의 변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말하였다.
“만약에 모든 상호(相好)와 색신(色身)이 구족하면 즉시 관하는 자로 하여금 승의락(勝意樂)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만일 삼매 중에 법신을 관한다면 승의락을 일으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어떤 이가 말하였다. ‘지혜와 방편은 모든 여래를 생하고 능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해(信解)를 일으키게 하니,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였다. ‘세간의 법과 같이 응당 요별하여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응당 버리는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어떠하겠는가? 모습을 취하는 것[取相]을 여의므로 그 모든 전도된 취착심이 끊어지고, 그것이 끊어짐을 말미암은 뒤에야 이것을 설하니, 이것이 진정한 승의락이다. 그 지은 일에 응하지 않고 실로 마음에 의지하여 결정함을 일으킨다.’ 또한 어떤 이는 말한다. ‘일체의 법 중에는 취할 것도 없으며, 또한 버릴 것도 없다. 그것은 취하고 버리는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이는 말한다. ‘보시 등의 모든 행은 생사의 과보를 감응한다. 이 가운데 무엇을 지혜를 여의고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조그마한 선(善)을 얻어도 기뻐 만족하면서 용감하고 굳센 마음을 일으켜 다시 수승한 선근을 증상하고자 하는 생각을 짓는 것이다.’”
『유마힐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마땅히 지혜와 방편의 두 가지를 함께 행해야 한다. 보시 등의 모든 행을 만약에 지혜가 포섭하게 되면 곧 바라밀다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지만, 이름이 이것과 다르면 곧 보시 등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삼마지에 머물러서 능히 모든 지혜를 일으키면, 가행(加行)이 오로지 주입되어서 저 지은 바를 총괄한다. 말하자면 먼저 일어난 문소성혜(聞所成慧)를 말미암아 근본 종의(宗義)로써 바르게 거두어 지닌 연후에 사소성혜(思所成慧)가 비로소 생기한다. 이 사소성혜 속에서 참다운 뜻[如實義]을 관찰해야 그 관찰한 바가 결정적으로 진실해서 다른 삿되고 허망하여 실답지 않은 전도(顚倒)가 없다. 이와 같이 관하므로 의혹이 그쳐 쉬는 것이며, 바른 지혜가 생겨나서 이치대로 바르게 닦는 것이다. 보리수에서 외도들에게 무아법을 설했듯이,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사유하고 관찰하면 반드시 바른 인[正因]이 있어 열반과를 얻을 것이다. 이와 다른 것은 모두 외도이며 항상 분별로 인하여 적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잡아함』 등에서 설하기를, ‘사소성혜 속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한 후에 모든 사물의 참된 자상(自相)을 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자상은 승의제 중에서는 곧 생함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함에서 설한 것과 결정적으로 상응한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설하였다.
“무생(無生)의 진실은 실제로 별개의 다른 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등은 모두 승의제의 무생(無生)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진실이다. 또한 승의의 무생은 곧 무생이 아니니, 저 일체의 행한 바는 모두 과거의 성품이다.”
이 가운데서 또 말한다.
“선남자여, 생멸의 두 법은 필경 모두 세간의 취착(取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대비는 세간에서의 온갖 행을 버릴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생멸 등이 필경에는 조그마한 법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 『성법집경』에서 설하였다.
“무엇을 생함이라 하고, 무엇을 멸함이라고 하는가? 생함이 없음을 생함이라 이름하고, 멸함이 없음을 멸함이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 또 말하기를, “아자문(阿字門)에서 일체의 법은 생멸을 여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일체법무자성문(一切法無自性門)으로 자성의 공함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성이제경(聖二諦經)』에서 설하였다.
“만일 무생의 평등이라면 곧 일체법의 평등을 얻는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설하였다.
“수보리야, 색과 색의 자성은 공하다. 나아가 식과 식의 자성은 공하다. 자상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액경(象腋經)』에서 설하였다.
“일체의 성품은 생함을 얻을 수 없다. 생함이 없는 성품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생함이 있다고 집착한다.”
『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에서 설하였다.
“저 일체의 법은 모두 다 평등하고 삼세 또한 평등하다. 과거 일체법은 자성(自性)이 여의었고 나아가 현재의 일체법 또한 자성이 여의었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아함 중의 견고한 뜻과 상응해서 응당 자세히 관찰해 보건대, 이것과 다른 어떤 인(因)은 성립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이치대로 결정적으로 사유하고 관찰한 후에 요약해서 설하면, 모든 생함의 성품에는 인이 있다고 설하기도 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설하기도 한다. 여실하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은 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에 인의 성품을 버린다면, 이 차별의 성품이 참으로 드러내 보이기도 하므로 저 인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만약에 법이 생할 때 비로소 일체의 성품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면 어떻게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저 성품이 없을 때에는 차별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생겨날 때에도 또한 얻음이 있지 않으므로 저 인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인이 없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고, 또한 인이 있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설한 것에 만일 아(我)가 있다고 계교(計較)한다면 바로 외도가 상인(常因)으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저 성품이 없어야 생함을 얻어서 능히 모든 행을 일으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인의 성품이 파괴되었는데 어떻게 능히 모든 행을 생기하는가? 이치대로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외도가 집착하는 아(我) 등은 자체가 역능(力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별도의 법에서 버리지 않는 성품을 얻는데, 이미 항상하는 성품[常性]에 집착했다면 남에게 뜻을 지어 일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만일 뜻에 이로움이 없다면 상응하는 법을 어기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집착하는 아(我) 등의 일체 역능은 필경에는 모두 공인 것이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으니, 저 자성이 없는지라 짓는 일에서 그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 설령 짓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역능은 없다. 만일 짓는 바가 아니라면 또한 화합이 아니다. 또 일체의 일이 지음 있음을 따르는지라 생겨난 이후의 시기에 결정되는 것과 같다. 만일 역능이 있다면 곧 그 역능은 자성이 따라 구르니, 앞에서 설했듯이 일으켜 지은 일로 화합을 얻는다. 혹 따라 구르지 않음도 앞에서 설했듯이 저 자성이 없고 상인(常因)의 성품이 없어서 결정코 화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무상함 중에는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을 수 없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혜여, 참되지 않은 공상(共相)이란 이른바 허공ㆍ멸열반(滅涅槃)ㆍ무작자(無作者)ㆍ무성(無性)ㆍ무취자(無取者)의 공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상이 이 불화합을 평등하게 생하므로 역시 무상이 아니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일의 성품에 역시 생함이 있지 않는데도 화합을 얻는 것과 같은데, 저 화합하는 인의 성품이 없어서 따라 구른다[隨轉]. 만일 동시에 생겨나서 상응하는 바가 있으나 또한 동시에 인이 짓는 자성의 일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저 동시(同時)의 관(觀) 또한 이루어지는 성품이 없으며, 혹 다른 때[異時]의 관도 역시 다른 때가 아니다. 만일 때와 연(緣) 가운데에서 관한다면 그것은 역시 생함도 없고 참됨도 없다. 과거에 만일 생하였다면 화합하는 바가 있다 해도 또한 연이 아니고 생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일체의 아(我)로도 또한 연이 없다. 또한 하나의 찰나 속에 일체의 찰나가 따라 들어오지 않으면, 겁과 찰나의 분량으로도 화합하지 않는다. 마치 미세한 먼지들이 모여 둥근 덩어리가 되는 가운데 또한 극미량의 아(我)도 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하나의 덩어리와 하나의 부분 속에서 저 찰나에 모인 덩어리의 성품[蘊聚性]은 화합하지 않고 스스로 생할 수 없으며 인분(因分)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저 부분[分]의 성품을 취한다면 곧 자아의 지은 바가 서로 어긋나므로 역시 두 가지 종류는 없다. 만약에 두 부분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곧 두 종류의 허물이 따라 붙는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면, 일체 세속에서 생한 것은 얻는 성품이 있으나, 승의제 중에서는 참으로 생함이 없으니, 이러한 설명은 아함 등과 더불어 서로 어긋남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모든 생(生)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生)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설한 바가 이치 그대로인 것이 불세존의 진정한 승의(勝義)의 즐거움이다. 마치 세상의 벼와 벼 줄기 등처럼 자성과 타성 두 종류 가운데에서 인이 없는 생을 설한다. 이 뜻은 마땅히 그쳐야 하고 이 중에서 의당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만일 색과 무색의 저 두 가지 성품이 병기(甁器) 등처럼 그 극미량이라도 색의 성품[色性]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앞의 분위(分位)에서는 하나의 성품이 아니다. 앞의 분위 중에서 만일 파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극미의 덩어리 중에는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하나와 다수의 성품을 여읜다면 어떻게 자성이 있겠는가?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곧 승의인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얻은 색의 상(相)과 색(色)의 성(性)과 같다.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하니,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설하였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코끼리가 파괴되면 미세한 티끌과 같은데, 이 미세한 티끌의 모습 가운데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그의 색성(色性)은 실로 자성이 없다. 또한 색온 중의 푸름 등의 색들처럼 그것이 상대의 장애가 있더라도 자성이 없다. 이와 같이 필경에는 식(識) 외에는 색(色)이 아니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외부에 색들은 없으며 자신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저 밖의 푸름 등 갖가지 색의 상은 실제로 상대의 장애[對礙]가 없다. 그리고 모습을 취하고 버리는 것도 또한 상대의 장애가 없다. 하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와 다수가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하나의 성품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나가 모인 색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유(有)의 색상(色相)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자체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장애가 없으며, 그 식(識)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의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이라서 저 색이 식을 여의고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식의 자상은 갖가지가 실답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이유로 식은 실답지 않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식은 마술사[幻士]와 같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뜻은 결정적이다.
또 『능가경』에서 설하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거울 속에 보인 상(像)은 동일한 성품도 아니며 다른 성품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성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一異性]을 여의기 때문이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어떤 사람이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자성이 실제로 얻을 수 없음을 관하니, 이 가운데서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모든 것들을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이것이 사소성혜(思所成慧)가 실답게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뜻이 성취되면 이로 말미암아 수소성혜(修所成慧)가 마땅히 생기하게 되는데, 만약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이 없다면 수소성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보운경(寶雲經)』에서 설하였다.
“모든 올바른 수행자는 지혜의 광명이 있다. 중간(中間)에 태어나도 그 올바름은 무너지지 않는다. 지혜의 출생을 말미암아 닦아 지은 것들이 출생하여 성취된다. 비유하자면 땅 속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 두루 가득하다면 태어날 모든 존재가 어떻게 능히 생겨나겠는가? 모든 수행도 또한 마찬가지다. 지과(智果)를 밝게 깨달아야 진실의 성품 가운데서 이치대로 이치를 출현하게 된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에서 설하였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 종류의 추구함을 일으킨다면,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함과 의지함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저 진실한 수소성혜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가장 먼저 사마타(奢摩他)를 닦아서 상응하는 수승한 법을 마음에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데, 마치 움직임이 그친 물처럼 해야 한다.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을 경우 사마타가 아니면 능히 거두어들여 머무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등인심(等引心)에 머무르면 능히 여실히 안다. 만약에 산란한 마음의 상태라면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타를 닦을 때에는 모든 얻을 것과 바라는 바를 버려서 평등함에 머물러야 한다. 체(體) 가운데 고통 등을 다 버려서 없애버리고 청정한 계율에 편안히 머물면서 정진을 일으킨다면 빨리 성취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화합해탈경(和合解脫經)』에서 설하였다.
“먼저 보시 등의 수승한 행을 닦고, 다음에 청정한 계를 지님을 닦는다. 그런 연후에 사마타행에 머문다. 만약에 이 사마타에 머물고자 한다면 모든 분위(分位)에 따라야 한다. 먼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마땅히 귀명(歸命)하고 참회하면서 수희(隨喜)해야 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대비심을 일으켜 널리 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편안한 자리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몸을 곧바로 하고 단정히 머무르면 정념(正念)이 현전하고, 삼마지(三摩地)를 끌어 일으키면 상응함이 현전한다. 처음부터 전주(專注)해서 응하는 대로 관찰하고, 더 나아가 여러 종류의 반연하는 바와 평등한 일을 관찰한다. 그리고 번잡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고요히 머무르는 것이다. 다시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색과 무색 두 종류에서 마땅히 산란과 허물을 여의어서 총체적으로 그것과 상응하여 반연하는 바가 수승한 작의(作意) 내지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의 모든 일들을 일으키니, 일체 분별하지 않으면 곧 청정함을 얻는다.”
모든 반연하는 바의 행상을 자세히 설한 것은 『화합해탈경』의 제18 상응분(相應分)과 같다.
세존께서는 유정의 일들인 색 등의 분별과 일체사(一切事)의 분별을 거두어들이신다. 간략한 가운데 행상(行相)을 자세히 설한 것은 아비달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뜻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관찰하고 난 뒤 허물을 여의어 다 섭수함으로서 마음의 상속으로 하여금 수승하게 진행시켜 수행을 증장케 하는 것이다. 혹시 마음에 탐욕 등이 생기면, 이때 마땅히 부정등관(不淨等觀)을 지어서 그쳐서 쉼[止息]을 얻는다. 또한 다시 이전[前]을 넘어서 수승하게 나아가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 부정등관의 온갖 행상(行相)은 번잡함을 두려워해서 또한 그친다. 혹 그 마음이 수승하게 나아가 승의락(勝義樂)을 일으키지 못하면, 또한 이는 산란의 허물이다. 이때에 마땅히 삼마지의 공덕을 관해서 승의락을 일으키면 곧 승의락이 아닌 것을 능히 그쳐 쉬게 한다. 만약 그 때에 혼침과 수면이 생기한다면 마땅히 부처님 등의 공덕인 수승하게 기쁜 일들을 관해야 하나니, 그것은 능히 그쳐 쉴 수 있다. 다시 이와 같이 반연한 것 중에서 응하는 대로 견고하게 거두어서 흩어지지 않으면 곧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또한 다시 만일 앞의 마음이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함에 따라 뒤의 마음이 높게 들떠서 일어난다면, 이때에는 마땅히 무상등관(無常等觀)을 지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반연하는 것 속에서 마땅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한결같은 집중으로 고요히 머물러야만 높고 낮은 법을 여의고 평등을 행해서 마음이 청정함을 얻는다. 저 깨달음을 일으킴은 산란 등의 원인이므로 모두 버린다. 혹 어떤 사람이 진실로 깨달음을 일으키면 그 마음을 산란하게 지어도 반연한 것에 움직임이 없으리니, 이와 같아야 바라는 바와 행한 바에 수승한 정(定)이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이때에는 마땅히 사마타가 이와 같은 것들을 이룸을 알아야 하며, 모든 사마타의 공상(共相)이 이른바 심일경성(心一境性) 중의 자성임을 알아야 한다. 저 사마타가 반연한 바는 결정코 이와 같으니, 이러한 사마타법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 등의 경에서 설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마타를 닦는 데는 아홉 종류의 법이 있다. 첫째는 제(除)이며, 둘째는 정제(正除), 셋째는 분위제(分位除), 넷째는 근제(近除)이며, 다섯째는 조복(調伏)이며, 여섯째는 지(止)이며, 일곱째는 근지(近止)이며, 여덟째는 일향소작(一向所作)이며, 아홉째는 지지(知止)이다. 이러한 아홉 종류의 행상은 어떠한가? 이 아홉의 법에 두루하는 것을 이름하여 제(除)라 하니, 반연하는 것 중에서 번잡한 마음이 두루 제거되는 것이다. 반연하는 것 중에 상속하여 전전하는 것이 분위제이다. 산란함이 현전하나 모두 꺾어 굴복시키는 것이 근제이다. 산란함을 여의고 다시 수승함이 현전할 때 반연하는 바를 두루 제거하는 것이 조복이다. 만일 애착이 일어날 때 굴복시키므로 이름하여 지(止)라고 한다. 산란과 과실이 현전하면 승의락을 일으키지 않아도 능히 그치므로 근지라 한다. 혼침과 수면 등이 일어날 때 빨리 떠나 보내버리는 것이 일향소작(一向所作)이다. 반연 속에서 움직임이 없음을 얻고 그런 연후에 한결같이 집중하여 그침[止]과 상응함을 얻는다. 이 그침을 얻은 후에 마음이 평등함[捨]에 머물게 되는데, 이것을 지지(知止)라 한다. 이러한 뜻은 성 미륵보살께서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삼마지를 닦을 때에 여섯 종류의 과실이 있다. 첫째가 해태(懈怠)이며, 둘째는 반연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所緣忘失], 셋째는 가라앉는 것[沈下], 넷째는 높이 들뜨는 것[高擧], 다섯째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無發悟], 여섯째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發悟]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과실이 생할 때에 마땅히 여덟 종류로 끊는 행을 일으켜서 대치(對治)해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믿음[信]이며, 둘째는 하고자 함[欲]이며, 셋째는 부지런함[勤]이며, 넷째는 가벼워 편안함[輕安]이며, 다섯째는 기억함[念]이며, 여섯째는 바르게 앎[正知]이며, 일곱째는 사유[思]이며, 여덟째는 평등함[捨]이다. 이러한 것들의 대치행상(對治行相)은 어떠한가? 믿음[信] 등의 네 법은 해태를 대치한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삼마지의 공덕으로 요컨대 정신순상(正信順相)을 증대시킴을 갖춤이니, 그에 상응하면 수승한 희망을 일으킨다. 희망할 때에 정진의 행을 일으키고, 일으킨 정진으로 몸과 마음이 용맹해진 후에 경안(輕安)을 얻으니, 이 때문에 대치(對治)인 것이다. 기억[念]은 반연하는 바의 망실(忘失)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르게 아는 것[正知]으로 가라앉는 것과 높게 들뜨는 것을 대치한다. 이른바 올바른 앎으로 바른 관찰을 일으켜서 능히 높고 낮은 두 법을 그쳐 쉬게 하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사유[思]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평등함[捨]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을 대치한다. 앞의 높고 낮음으로 말미암아 그쳐 쉼을 얻은 후에 마음이 정직(正直)에 머무르는 것이 곧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단행(斷行)이 여섯 종류의 과실을 대치한 후에야 가장 높은 삼마지 사업이 곧 성취되면서 신족(神足)의 공덕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여덟 가지 단행(斷行)을 구족하면 곧 능히 네 종류의 신족[四種神足]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수승하고 높은 사업이 올바른 상응을 얻으면 비로소 선정해탈법문에 증입(證入)하여 일체의 가장 수승한 공덕이 원만하다.
『광석보리심론』 2권(ABC, K1449 v40, p.496b01)
광석보리심론 제3권
연화계 지음
시호 한역
김치온 번역
다음으로 이 중에서 차례로 저 모든 선정을 닦아야 한다. 만일 애욕을 여의고 희(喜)와 낙(樂)을 얻는다면, 내심(內心)이 청정하여 올바른 상응에 머물러서 심(尋)과 사(伺)가 있으니, 이것을 초선정(初禪定)이라 한다. 또한 다시 이 가운데 심(尋)은 없으나 사(伺)만이 있는 것을 중간선(中間禪)이라 한다. 초선의 경지에서 애욕을 이미 여의었다면 희와 낙을 얻고 내심이 청정하여 올바른 상응에 머무른다. 이것이 이선정(二禪定)이다. 이선의 경지에서 애착을 이미 여의었다면 즐거움[樂]과 평등함[捨]과 바로 앎[正知]을 얻어 올바른 상응에 머무른다. 이것이 삼선정(三禪定)이다. 삼선의 경지에서 애착을 이미 여의었다면 평등함과 기억함[念]이 상응한다. 이것이 사선정(四禪定)이다. 모든 무색정(無色定) 등의 행상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반연된 모습을 응하는 대로 분별해서 반연 속에서도 마음을 견고히 하게 한다. 이치대로 짓는 바를 지혜로써 관찰하면 지혜의 광명이 생겨나서 무명의 종자를 깨뜨리고 궁극적으로 단절할 수 있어서 올바르게 상응한다. 이와 다른 것은 모두 외도들이 닦는 것으로 바른 삼마지가 아니라서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올바르게 삼마지를 닦을 때 만약에 나라는 생각[我想]이 생기면 곧 되돌아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이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을 그친 물[止水]과 같이 머물러서 삼마지에 들어가 관행(觀行)과 상응해야 한다.
『능가경』에서 설한 것을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바른 지혜의 관행[正慧觀行]은 오직 마음만이 고요히 머물러서 밖으로 분별이 없다. 만일 진여를 반연한 것에 머무르면 이 마음은 지나가야 하고, 마음이 만약 지나간 후면 그것에 상대할 장애가 없으며, 응당 지나가서 상대할 장애가 없는 가운데 만일 이 대승관(大乘觀)에 상응하여 머무르면, 그것은 깨달음을 발하지 않는 가장 수승한 적정이니, 곧 수승한 무아의 지혜이며 상대할 장애가 없는 관[無對礙觀]이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여실하게 관찰해서 마음 밖에 반드시 색법의 분별이 없으면, 이것이 곧 최상으로 상응하는 수승한 행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식(識)은 색과 어떤 다른 것이 있는가? 혹 다르지 않다면 식 또한 마땅히 상대할 장애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마치 꿈과 같은 상태[分位]에서는 보이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식 밖을 여실하게 자세히 관찰하면 극미량의 색이라도 취할 수 없다.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오직 식[唯識]뿐임이 성립하며 다시 그 밖에 일체의 뜻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마음을 고요히 머물면 밖으로 분별이 없는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는 중에 색법을 여의었기 때문에 얻는 바의 모습[相]이 있다. 그리고 얻게 되는 것은 필경 얻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색법에서 마땅히 무색(無色)을 관해야 한다. 저 오직 마음뿐이라면 실로 능히 취하는 것[能取]도 없고 또한 취해지는 것[所取]도 없으니, 이러한 두 가지 취하는 성품은 실로 얻을 수 없다.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곧 마음은 둘이 없고, 이와 같이 자세히 관찰하는 것 또한 두 모습이 없다. 진여의 소연(所緣) 속에서 이 마음은 또한 지나가며, 그 취한 모습[所取相] 또한 지나가서 둘은 상대할 장애가 없다. 이 둘이 없는 지혜 중에서 여실한 뜻[如實義]에 머무르면, 오직 마음뿐이라서 지나가고 나면 둘은 상대할 장애가 없으니, 이 지혜는 그 중에서 또한 마땅히 여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성과 타성(他性) 중 모든 유(有)의 생겨나는 성품이라도 얻을 수 없고, 응하는 대로 자세히 관찰하면 모든 중생의 성품 또한 화합하지 않는다. 혹 취하든 혹 버리든 둘은 참된 성품이 아니므로 모두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일체 사물의 성품은 모든 유(有)의 취착이다. 둘이 없는 지혜 속에서 모두 마땅히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 상대할 장애가 없는 둘 없는 지혜 속에서 이와 같이 머문다면, 곧 일체의 법에 자성이 있지 않음을 여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능히 가장 높고 참된 성품에 들어가는 것이며, 분별이 없는 삼마지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 만일 상대할 장애가 없는 둘 없는 지혜 가운데에 상응하여 머무른다면, 이것은 곧 가장 높고 참된 성품 가운데에 머무르는 것이며, 이것이 대승의 안목[大乘見]이다. 이와 같이 또한 가장 높고 참된 성품을 보는 것이니, 가장 높고 참된 성품을 보기 때문에 곧 일체의 법에서 지혜의 눈으로 (空)을 관하고 지혜의 광명 가운데에서 모두를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경에서 설하기를, “어떻게 승의제(勝義諦)를 보는가? 일체의 법은 무견(無見)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말한 바 무견이란 승의락(勝義樂)의 진실한 무견이지 세간의 맹인이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과는 같지 않다. 그들은 반연(緣)이 빠졌기 때문에, 혹은 뜻을 짓지 않기 때문에 모두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유(有)의 성품인 전도(顚倒)된 종자라서 모두 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또한 마치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나올 때에 되돌아서 다시 유(有)의 성품인 취착(取着)과 탐욕 등의 근본적인 번뇌더미들이 생기하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유의 성품인 취착과 탐욕 등의 근본번뇌의 행상은 『성이제경(聖二諦經)』 등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한다면 분별이 없는 총지법문(總持法聞)에 들어가서 분별없는 법 가운데 색 등의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결정적인 지혜로 무색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음[無所得]과 작의가 없음[無作意]을 관하는 것이 승의락이니, 무상정 등으로 모든 색들의 취착법 속에서 작의(作意)하여 여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앞에서 설한 것처럼 모든 색 등에서 작의하여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만약에 바른 지혜가 없다면 곧 의혹의 종자를 능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에 불이 있을 때 모든 물건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만약에 삿됨을 조복시켜서 그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히 사념의 한 법을 여읠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사마타의 모든 소연(所緣)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게 머물러 이치대로 짓고 지혜로써 자세히 관찰하면, 지혜의 광명이 생겨나면서 밝음은 드러나고 어둠은 제거되며 지혜가 생하고 장애가 멸한다. 마치 사람의 두 눈이 양(量)에 따라 차이가 없는 것처럼, 모든 분위(分位)에서 밝게 비추는 것이 차이가 없으니, 지혜의 광명이 나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광명 속에서는 어둠의 성품이 있지 않다. 밝음과 어두움의 두 법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삼마지 중에서 어둠의 성품을 여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능히 심일경상(心一境相)에 머물겠는가? 그러므로 만약에 삼마희다(三摩呬多) 중에서 여실하게 깨달아 알면, 능히 한결같이 바른 지혜에 수순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설한 것은 모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다음으로 삼마희다 속에서 마땅히 지혜로 모든 무색의 모습[無色相]을 관하면, 일체의 법에서 다 얻을 것이 없다. 저 온갖 상응하는 분위(分位)의 모습 중에는 나아갈 바도 없고 깨달음을 발할 것도 없다. 자기에서든 남에게서든 다 성품이 없음을 보면, 성품이 있다고 분별하는 희론의 모습 등 일체가 쉬어 멸한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 모습 없는 성품[無相性]을 관하는 가운데서 상응함을 얻는다. 마음이 있는 분별[有心分別]은 모두 세울 수 없는지라 저 성품도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혹 성품이 있어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견해는 마땅히 그쳐야 한다. 이와 같이 그친 후에 만일 성품이 없다는 분별로 바꾼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설령 성품 있음이 삼시(三時)에 상응한다 하더라도 혜안(慧眼)으로 모습 없음과 얻을 것이 없음[無相無得]을 관한다. 또 어떻게 삿됨을 그치는가? 여실한 뜻[如實義]이란 성품이 있음과 성품이 없음을 마땅히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동일한 성품과 다른 성품 또한 분별할 수 없다. 이 가운데에서 만일 성품과 성품 없음의 두 분별을 여읜다면, 능히 모든 분별이 공(空)임을 비추어 통달할 것이라서 저 능히 비춤[能照]과 비추어지는 것[所照]의 성품 또한 있지 않으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분별 없는 상응을 얻는다. 이 중에 이와 같은 상응에 머무른다면, 곧 일체의 분별은 모두 능히 끊어져 멸할 것이다. 모든 번뇌의 장애와 지혜에 대한 장애도 또한 능히 끊어지는데, 저 번뇌장의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성품 중에서 성품 등 전도된 근본이 모두 제거된다.
『성이제경(聖二諦經)』 등에서 설하였다.
“이와 같은 상응의 행 속에서 일체의 성품 등의 분별이 끊어진 후에 성품 등의 전도(顚倒)가 두루 다하여 무명의 자성과 번뇌장의 근본이 즉시 끊어지며, 그 근본이 끊어진 후에는 모든 번뇌의 장애도 다 능히 끊을 수 있다.”
또한 『성이제경』에서 설하였다.
“묘길상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능히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번뇌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묘길상보살이 말하였다. ‘승의제 중에서는 필경 생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법의 생하지 않는 성품 가운데에서 세속의 모든 것은 실답지 않은 전도이다. 마땅히 일체의 성품 등에 일으킨 전도된 사유분별을 그쳐 쉬어야 한다. 만약에 저 사유분별을 그쳐 쉬지 않으면, 곧 아공상(我共相:我로 비롯하는 공상)이 있게 되는데, 아공상이 있으면 곧 모든 견해가 일어나 성립된다. 만약에 견해가 일어나 성립되면 곧 번뇌가 굴러간다. 만약 천자(天子)가 능히 승의제 중에서 일체의 법이 필경 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곧 승의제의 열 가지 종류의 전도 없음을 갖추게 된다. 만일에 승의제 중에서 전도가 없으면 곧 분별이 없게 되고, 분별이 없으면 소멸의 상응[滅相應]을 얻게 되고, 소멸이 상응하면 아공상은 곧 얻을 수가 없고, 아공상이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저 견해들은 능히 일어나 성립될 수 없으며, 나아가 승의제 중에 열반의 견해 또한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으므로 무생(無生)의 행(行) 중에서 일체의 번뇌가 필경 조복된다. 천자는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모든 번뇌는 승의제의 장애 없는 지혜[無礙智] 중에서는 필경 공(空)이며, 필경 모습이 없으며[無相], 필경 성품이 없다[無性]. 이와 같이 아는 자가 번뇌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천자여, 비유하자면 독사가 주술로 해로움을 입는 것처럼 저 번뇌의 종자 또한 마찬가지다.’ 천자가 또한 물었다. ‘무엇이 번뇌의 종자입니까?’ ‘묘길상이 천자에게 말하였다. ‘승의제의 필경 생함이 없는 성품 중에서 만약 일체의 법에 분별이 일어날 때라면, 이것이 곧 모든 번뇌의 종자가 된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성품 등의 전도가 일어나며, 전도 중에서는 능히 비추어 통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에 끊는 법[所斷法] 중에서 일체의 전도를 모두 능히 끊는다면, 모든 지혜의 장애는 능히 바르게 결정되어서 다 제거되어 버린다. 지혜의 장애가 끊어지고 나면 상속의 성품은 없어진다. 비유하자면 햇빛이 비치면 구름들의 가림이 사라지면서 모든 곳을 밝게 비추어 장애가 없는 것처럼 저 지혜의 광명도 청정하고 밝게 비추는 것이다. 색이든 마음이든 일체의 자성도 또한 이와 같다. 모든 사물의 참된 성품은 결정코 상속이 없는 성품 중에서 상주하니, 진실하게 일체 사물의 성품의 여실한 뜻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사물의 성품을 어떻게 말로써 설하여 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승의(勝義)와 세속제(世俗諦) 가운데에서 여여하게 설한 바이니, 일체의 색상(色相)과 모든 사물의 성품을 여실하게 깨달아 안 후에 곧 일체지(一切智)를 얻는다. 이와 같이 설한 바의 장애를 끊는 뜻은 일체지의 가장 높고 수승한 도를 증득하는 것이니, 그것은 성문 등의 도가 아니다. 성문 등의 도로는 모든 전도를 능히 다 제거할 수 없고, 또한 다시 바르게 두 가지 장애를 끊을 수 없다.’”
『능가경』에서 설하였다.
“대혜여, 저 성문인은 따로 다른 원인을 일으켜서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있다. 그는 법을 보고서 열반을 취하여 스스로 부처를 얻었다고 하지만 능히 법무아(法無我)의 도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 대혜여, 이것은 해탈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성문인은 자신의 지혜로 증득한 것이 아직 참된 출리(出離:미망의 세계에서 벗어 나옴)가 아닌데도 출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다른 견해가 구르기 때문에 그가 지은 것은 이것과 상응하지 않으며 그가 행한 도는 참된 해탈이 아니다. 세존께서는 단지 일승(一乘)의 법을 설하셨을 뿐 성문 등의 도는 설하지 않았다. 저 성문인은 단지 온(蘊) 속에서 무아를 관찰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은 인무아(人無我)이다.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마땅히 삼계의 일체가 오직 식(識)뿐임을 관해야 한다. 만약에 식 밖에 어떤 뜻이 무아를 얻는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은 곧 둘이 없는 지혜의 무아 속에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성품[他性]으로써 들어갔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른 성품으로 들어갔다면, 그것은 곧 오직 식뿐인 성품[唯識性]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의 「성출세품(聖出世品)』에서 설하였다.
“다시 다음으로 불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 나툰 것이며, 이 마음은 또한 중(中)과 변(邊)이 없어야 얻을 수 있다. 만약에 변(邊)이 있다고 말하면 곧 생하는 것이 있고, 중(中)이 있다고 말하면 곧 머무르는 것이 있다. 일체 모두가 분별의 모습이므로 만일 마음에 중과 변이 없으면 능히 저 둘이 없는 지혜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와 같이 들어가는 것이 진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모든 상응하는 분위(分位)는 마땅히 어떻게 생하는가?’ 답하여 말하길, ‘그것은 청정하고 수승한 원력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보살은 대비를 발하여서 두루 중생을 위하여 이로운 일을 짓는다. 그 원력으로부터 수승하고 높은 모든 보시 등의 명백한 선행이 생겨 나온다. 그것은 곧 진실하고 청정함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보살의 대비이다. 만일 일체의 중생이 아직 모든 법의 성품 없는 청정한 지혜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면, 보살은 윤회에 따라 들어가긴 하지만 다시 윤회의 과오에 물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저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적정한 법 가운데에 머무르겠는가? 경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다.
상대의 장애가 없는 가운데에서 보는 것이
가장 수승한 무아의 지혜이도다.
그러므로 만일 둘이 없는 모습 가운데에서 둘이 없는 언어를 설한다면, 이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니 곧 승의제 중에 참된 승의락(勝意樂)이다. 둘이 없고 상대의 장애가 없는 지혜 속에서는 필경 무아이며 자성이 있지 않아서 즉각 보는 바와 상응함을 얻는다. 저 봄[見] 있는 것은 따로 달리 봄은 없는 것이니, 일체에 분별이 없고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고 일체가 적정하다.’ 또한 묻기를,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능히 모든 상응하는 행을 일으키겠는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혹시 저 실다움을 보는 일이 있다면 승의를 수순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 중에는 주재(主宰)가 자재(自在)하게 상응하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봄이 있는가? 다만 세속의 법 중에서 색 등의 경계에 수순하는 모습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혜가 생기하면 식(識) 또한 세간에서 행한 바를 수순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저 지혜라는 걸 알아야 한다. 지혜 가운데에 그윽이 회통함(冥會)은 본 바가 있음을 말하지만, 또한 실제로 주재 등의 모습은 있지 않다. 만약에 둘 없는 상대의 장애가 없는 지혜가 생기할 때면, 여실하게 깨달음을 열어야 비로소 능히 이 지혜 가운데에서 여실하게 봄[如實見]을 얻는다. 일체의 법이 승의제 중에서는 자성이 있지 않으나 세속제는 결정코 상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과 달리 설한다면,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좁고 낮은 지혜이다.’”
『성이제경』에서 설하였다.
“승의제 중에서는 필경 성품이 없으니, 세속의 도에서도 그대로 따라서 관해야 한다. 만일 이것과 달리 한다면, 저 어리석은 범부 중생과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부처 등의 모든 분위(分位)가 어찌 성립한다고 말하겠는가? 말하자면 세속은 인이 없기 때문이며, 세속은 생함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은 그렇지 않으니, 세속의 도(道)에서는 따라서 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승의제에서는 실로 생하는 바가 없으니, 승의제에서 만일 얻는 바가 있다면 마치 토끼의 뿔 등과 같은 것이다. 모든 세속의 법은 허깨비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 등과 같다. 이와 같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세속의 반연하여 생함은 승의제와 함께 하는데, 이 가운데서 사물의 성품은 화합하지 않음이 없다. 저 살피고 생각하고 관찰함은 고쳐서 바꾸는 성품[改轉性]이 없으니, 이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로 세간의 일체가 허깨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번뇌의 업은 곧 허깨비의 원인이고, 중생들의 계속 생함은 곧 허깨비가 구르는 것이다. 복과 지혜에 상응하는 모든 행들도 또한 허깨비의 원인이니, 이와 같이 상응하는 지혜는 곧 허깨비 가운데 구르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설하였다.
“수보리야, 모든 성문은 변화신과 같고[如化], 연각은 변화신과 같고, 보살은 변화신과 같고, 여래는 변화신과 같다. 번뇌는 변화신과 같고, 업은 변화신과 같다. 수보리야, 이러한 연고로 일체의 법이 변화신과 같다. 이와 같은 것들의 차별된 모든 행과 중생 등은 모두 허깨비의 모습과 같다. 저 허깨비 가운데서 요달해 아는 듯한 것은 모두 실제로는 취착하지 못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이것이 바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이라 집착하고 취착하면 곧 어리석은 범부 중생이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은 참으로 서로 어긋남이 없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허깨비처럼 지은 일들이여,
변화신으로부터 해탈을 일으키도다.
이것은 앞에서 요달해 알았듯이
변화신 중에서는 취착함이 있지 않도다.
삼유(三有)를 설하여 변화신과 같음을
부처님과 보살님께서는 모두 아시니
알고서는 수승한 갑옷을 입으시고
세간의 이익을 지으시네.
이와 같은 것들의 온갖 행(行) 중에서 마땅히 참된 성품을 관하여야 한다.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사마타 중에서 만약 밑으로 가라앉는 마음[沈下], 높이 들뜨는 마음[高擧心] 등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일체의 법은 모두 자성이 없다고 관해야 한다. 이때 높고 낮음의 작의지(作意智)를 마땅히 여의어야 성취함을 얻는다. 저 사마타와 비발사나(毘鉢舍那)의 상응하는 행이 행하는 도는 즉각 구족함을 얻고 나아가 능히 신해력(信解力) 등을 일으켜서 해행지(解行地)에 머무른다. 관을 행한 후에 욕망이 일어날 때에는 되돌아서 다시 승의제 중에는 자성이 있지 않음을 사유한다. 세속제도 또한 이와 같이 머무른다.
『보운경(寶雲經)』에서 설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무아의 이치를 얻는가? 선남자여! 보살은 마땅히 바른 지혜로써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관찰할 때에 이 색의 생함은 얻을 수 없으며, 모임도 얻을 수 없으며 멸함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의 생함[生]이나 모임[集]이나 멸함[滅] 모두 얻을 수 없다. 저 승의제 중에서 생함이 없는 행[無生行]을 깨달아 안 후에 혜관찰(慧觀察)을 일으키면 다시 행한 바에서 취착함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자를 말미암으면, 이처럼 자성이 없는 가운데 성품이 있다고 집착해서 전도되어 취착한다. 그러므로 생사의 순환은 다함이 없으며 온갖 고통을 현실로 받음은 휴식이 없다. 보살의 대비는 이와 같이 항상 일어나니, 간단없는 사념으로 현전(現前)을 짓고 연민의 이익으로 수승한 원행(願行)을 일으킨다. 내가 행한 대로 따르면 일체지(一切智)를 얻어서 이 법성을 여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런 연후에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공양과 칭송을 올리고, 지은 바를 이루고 나서는 공(空)의 비장(悲藏)으로부터 일체의 보시 등의 복행(福行)을 발생하는 것이다.”
『성법집경』에서 설하였다.
“만일 보살로서 여실하게 드러내 보이는 자라면, 말하자면 일체 중생 속에서 대비로 전전한다. ‘나는 이 삼마지의 즐거움을 일체의 법 가운데에 여실하게 드러내 보이니 일체 중생에게 지어서 이루는 것이다. 이 대비가 개발됨으로 말미암아 곧 증상의 계(戒)ㆍ정(定)ㆍ혜(慧) 등 모든 학문이 원만함을 얻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와 방편은 모든 보살들이 행하는 수승한 도에 상응하니, 세속제를 끊지 않고 승의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만일에 세속을 끊지 않는다고 한다면 곧 능히 대비로써 선도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여 훌륭히 이로운 일을 짓고 전도됨을 멀리 여의니, 이것을 출세간의 지혜를 능히 훌륭하게 건립한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야 방편을 순조롭게 행하게 되어서 온갖 방편이 행해지는 때에도 허깨비와 같은 모습임을 요달해서 또한 전도되지 않는다. 출세간의 지혜로써[出世智] 가장 수승한 방편을 여여하게 잘 닦아야 능히 진실한 말 가운데서 용맹하고 굳센 뜻을 일으키며 수승한 지혜를 낳는다. 보살은 이 혜방편(慧方便)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소행(所行)의 수승한 도(道)에 머물면서 상응한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선정이 다함없어야 능히 지혜와 방편을 낳을 수 있다. 그 낳은 것이 바로 행자(行者)가 행하는 수승한 도(道)에 상응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광석보리심론』 3권(ABC, K1449 v40, p.500a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