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년 만의 첫 여성은행장'… 권선주 IBK기업은행장]
"입사가 늦은 남자 직원보다 승진이 늦을 때도 있었죠
'남자들은 家長이니까' 라며 자기 합리화도 했었어요"
"임신한 몸으로 밤늦게 일해 지금도 아이들이 아프면
'그때 내가 그래서 아픈가'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우리나라 은행이 생긴 지 '114년 만의 첫 여성 은행장'이라는 권선주(58) IBK기업은행장은 여걸풍(風)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담한 체구에 말씨도 얌전했다.
―이런 평등한 세상이 올 줄 몰랐지요?
"생각보다 빨리 온 것이죠. 우리는 10년은 더 기다려야 될 줄 알았어요. 작년에 여성 금융인 모임에서 건배하면서 '앞으로 10년 안에 여성 은행장이 나와야 한다'고 외쳤거든요."
―그 전까지는 여성이어서 조직 내 승진에서 차별을 받았나요?
"저보다 입사가 늦은 남자 직원보다 승진이 늦을 때도 있었죠. 저는 군대를 안 가서 후배 남자들이 나이가 많았죠. '남자들은 가장(家長)이니까 나보다 일찍 승진하는 게 맞다. 내게 기회는 천천히 온다'며, 자기 합리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이제 아들과 딸을 둔 부모 입장이 돼보니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있기도 해요."
―은행 근무 36년인데, '나도 은행장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내정되기 이틀 전에 제 이름이 언급됐을 때도 반신반의했어요."
―당초 기업은행 계열 자회사 사장으로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낙점을 했다면서요?
"아마 그럴 겁니다. '자회사 사장으로 갈 수도 있으니 정보 제공 동의서에 사인을 하겠느냐'고 했거든요. 은행장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지요."
- 권선주 기업은행장은“둘째 아이 출산 때 남편이 은행에 출근 도장을 갖고 가 출산휴가를 대신 신청해줬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다들 그렇게 말해요. 여성 금융인들도 '서프라이즈!'라고 했으니까요. 대통령께서 제가 여성이지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거겠지요."
―본인에 대한 내부 직원들의 평가는 어떤가요?
"저에 대한 직원들의 설문조사를 봤어요. 자신들의 말을 잘 경청해줄 것 같지만, 여성이니까 고객들과 접촉이 줄고 교섭력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었어요. 저는 자신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부족한 면을 채우려고 노력해왔어요."
―실제 맡아보니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요?
"은행장은 의견 조율자 역할을 잘해야 해요. 정부 지분이 50% 이상이니 그쪽과도 협의를 잘해야 하고, 또 고객과 주주, 직원들의 이해가 달라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어렵지요."
―은행장이면 전국의 지점까지 통틀어 기업은행에 보관된 돈의 임시 주인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이게 가장 부럽군요.
"지점 수가 647개고 예금 잔액이 146조원일 겁니다. 고객 돈이지만, 임시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은행은 남의 돈으로 장사하는 기관이니까요."
―아버지가 지점장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니 은행원 직업이 참 좋다는 걸 알았나요?
"친척 중에 너무 많은 은행원이 있었어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큰아버지도 은행원이었고, 사촌 언니와 친언니, 여동생들도 은행원이 됐어요. 그러니 은행원 직업이 편하게 느껴졌어요. 은행원이 창구에서 돈만 세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실력을 기르면 남자 동기들과 똑같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입행 동기 55명 중 4명이 여자였다. 여자 동기는 결혼하면서 모두 퇴사했고, 남자 동기도 이제 모두 은퇴했다.
―그때만 해도 남성 중심의 직장 풍토였지요?
"당시 숙직실에서 고스톱을 많이 쳤어요. 저는 같이 치지는 않았지만 돈 바꿔주는 심부름을 해줬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남성들과의 팀워크가 중요하고, 제가 여자라서 봐주는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주위 평가는 어땠나요?
"은행 남자 동기들은 대놓고 '너무 소심하지 않으냐' '모든 걸 세밀하게 분석하고 꼼꼼하지 않으냐'는 식으로 코멘트를 했지요. 솔직한 평가였어요."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성적(性的)으로 중성화되어가지 않았나요?
"그렇게 되기 쉽죠. 남성처럼 와일드하게 꾸미는 여성도 있었어요. 저는 남성을 닮을 필요가 없다고 봤어요. 저 자신으로서 인정받으면 되지…."
―소주 폭탄주 10잔을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술자리에서 취하거나 흐트러진 적은 없어요. 제가 멀쩡하게 앉아 있으면 다들 조심하죠. 자신들이 관찰당하는 기분이 들어 불편해했죠. 뒤로 들리는 얘기가 '안 와도 되는데' 하는 겁니다. 제가 오면 빨리 가기를 원했죠."
―회식에 초청받지 않았는데도 갔다는 겁니까?
"외톨이가 안 되기 위해 회식에는 끼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참석자들은 불편하게 여겼죠. 은행 동기들 모임에서도 저를 불러준 적이 없어요. 뒤늦게 그런 모임이 있는 줄 알고 '가겠다'고 하니까 '안 와도 된다'고 해요. 편하게 놀고 싶은데 앞에 정신 말짱한 누군가가 앉아있으면 불편했겠죠. 저도 이런 분위기를 알아 2차를 간 적은 없어요."
―우리 사회의 남자들이 불쌍한 존재라는 걸 느낀 적은 없나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직장에 모든 걸 바치면서 야단을 맞거나 아부를 해야 할 때도 있고. 그렇게 해서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남편에 대해서도 그런가요?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젊을 때는 의견 충돌이 많았으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측은해지더군요."
―여성 직장인의 첫 관문은 출산(出産)인데.
"제도적으로는 석 달 육아휴직이 있었지만 큰아이를 낳고서 한 달 만에 복직했어요. 둘째 아이 출산 때는 토요일까지 근무하고 일요일에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어요. 남편에게 은행에 출근 도장을 갖고 가 출산휴가를 대신 신청해달라고 했죠."
―남편이 "이제 그만두라"는 말을 안 했나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제가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요. 일을 하는 게 즐거웠고, 여성이 일하는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죠. 솔직히 집에서 아이만 돌보면서 제 삶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이는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엄마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이 자녀의 정서 발달과 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전업주부도 충분히 가치 있는 역할이지요.
"아이에 대해서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를 늘 끼고 잤어요. 밤에 아기가 보채니까, 남편은 '한 사람이라도 편하게 자자'며 이불을 싸 들고 다른 방으로 갔어요. 남편도 다음 날 출근해야 하니까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숙제를 시키면서 저는 곁에서 밀린 업무를 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종일 자녀 옆에 있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겨요. 한국 여성들은 많은 교육을 받고 에너지가 있는데 이를 자녀에게 모조리 쏟는 것은 과잉보호고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5년간 해외 근무를 나가는데 따라가지 않았죠?
"그때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려면 내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데 저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아이들과 함께 여기에 남았죠."
"방학 기간 남편이 있는 곳으로 잠깐 보냈어요. 아이들이 원하면 대학 가서도 얼마든지 외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내 직장은 나의 인생이고, 아이들과는 별개의 것이죠."
―내 인생도 있지만, 자녀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주는 엄마의 인생도 있잖아요.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의 문제가 되죠. 항상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일을 하고 싶었지,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전업주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다른 거죠. 오히려 일을 하는 제 모습이 자녀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아침밥은 지금까지 꼭 해왔고, 심지어 새벽 골프를 치러 나갈 때도 밥은 해놓고 갔다면서요?
"애들에게 아침밥을 먹이겠다는 걸 목표로 삼았어요. 밤을 넣은 잡곡밥을 짓고 보리차를 끓이는 것은 제 손으로 해요.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요."
그녀는 기업은행에서 '여성 최초'의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여성 최초 1급 승진' '첫 여성 지역본부장' '첫 여성 부행장' 등이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입사 5년 만에 외환 업무를 맡았을 때 가장 감격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외환 업무는 외국과의 시차 때문에 은행 문을 내리고 업무가 시작돼요. 거래처인 중소 업체 사장들도 상대해야 하고. 그때까지는 남성 영역이었지요. 신입 행원 시절 얘기하니까 '그건 여성이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반발한 게 아니라 외환 업무 공부를 했어요. 제가 따낸 연수 성적표를 보고서 지점장이 '한번 해보라'며 기회를 주셨어요."
―정각 퇴근에 집으로만 귀가했다면 오늘이 있을 수 없었겠지요?
"밤 10시 넘어 퇴근한 날이 많았어요. 임신한 몸으로도 그렇게 했어요. 배 속 아기에게 좋지 않았겠죠. 그래서 지금도 아이들이 아프면 '그때 내가 그래서 아픈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나중에 너희가 아이를 낳으면 내가 보상 프로그램으로 돌봐주겠다'고 말해요."
―직장에 자신을 모두 바친 셈이군요.
"일을 싫어했다면 못 하죠. 저는 출근할 때 항상 즐거웠고 부담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과연 일이 늘 좋을 수만 있을까요?
"저는 정말 일이 좋았어요. 물론 까다로운 고객을 만나 인격적인 모욕을 받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있었지요. 그때도 '인내심을 배워 내 내면을 강하게 키울 기회'라고 여겼어요."
―교과서 같은 말씀이고, 솔직히 그런 순간에는 어떻게 했죠?
"저는 1978년 여자를 뽑는 첫 대졸 공채로 들어왔어요. 여자 후배는 있어도 여자 동료가 없었어요. 대화 상대가 없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퇴근해 남편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었어요. 제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만두라'는 말만 하니까요. 속이 상하는 일이 있을 때면 혼자서 글을 썼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일도 적으면 마음이 안정됐어요."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나요?
"일에 더 많은 가치를 뒀지만…, 행복이라고 했나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때지요. 가정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은 해요."
마지막 답변에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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