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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2024년 여름호 반경환 명시감상
박용숙, 최병근, 임덕기, 최윤경, 김선옥, 정해영, 이선희
멸치, 고래를 꿈꾸다
박용숙
고래가 될 수 있을까?
메타버스에는 널려있다지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오늘도 홈쇼핑 최저가 핸드폰 결제
그래도, 태평양 가슴에 품으니
이까짓 편의점 아르바이트 서너 개쯤이야
하루 세끼 삼각김밥도 견딜 수 있어
바다 한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내 모습
날치 꽁치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아
노는 물도 당연 다르지
옥션의 경매 정보나 쿠팡의 쿠폰도 팡팡 쌓이고
광고판도 뼈대 있는 내 이름 석 자로 빛나고 있지
이제는 겪을 일 없는 풍파
신의 가호란 말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 이놈 똥 뺄 것도 없겠네
달랑 소주 한 병으로 나를 깨운 거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저 아줌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떤 세상 꿈꾸는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술고래 말고
푸른 물결 헤쳐나가는 대왕고래
가슴에 산다는 걸
정말, 고래가 될 수 있을까?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노예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모든 자유와 생명과 노동마저도 주인을 위해 바쳐야 하는 자를 말하지만, 가난한 자는 자유와 생명과 노동마저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노예는 생명 있는 도구이고, 도구는 생명 없는 노예라는 말이 있다. 그 옛날에는 주인과 노예의 신분이 세습되었지만, 오늘날은 ‘인간 존중’과 ‘인간 해방의 탈’을 쓰고 모든 노예제도는 다 없어지고 말았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즉, 모든 노예제도는 형식적으로만 사라졌지, 그 사악하고 교활한 노예제도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구조’ 속에 여전히 살아 있으며, 이 세상의 흙수저들은 그 가혹한 노예제도의 늪 속을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수의 부자들만을 위한 사회이며, 그 나머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 생활의 밑바닥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구글이든, 아마존이든, 애플이든, 마이크로 소프트이든, 트위터이든, 페이스 북이든, 네이버이든, 카카오이든지 간에, 소위 플랫폼 기업들이 모든 부를 독점하고 있으며, 이제는 인공지능사업에 의하여 모든 일자리들이 다 사라지고, 모든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이 고사 직전에 있으며, 우리 젊은이들은 그들의 일자리를 찾기가 밤하늘에서의 별따기보다도 더욱더 어렵게 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자율주행차는 택배와 택시와 화물기사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불원간 인공지능 병원과 인공지능 법원, 인공지능 검찰청과 인공지능 법률사무소들이 수많은 법조인들과 수많은 공직자들의 일자리를 다 빼앗아가고 말게 될 것이다.
박용숙 시인의 [멸치, 고래를 꿈꾸다]는 우리 젊은이들의 ‘풍요 속의 빈곤’을 노래한 시이며, 도저히 불가능한 희망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가상의 공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메타버스”에는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것들이 널려 있고, 언제, 어느 때나 “홈쇼핑”을 통해 “핸드폰으로 결제”하고 구입할 수가 있다. 멸치는 우리 젊은이들이고 취업준비생들이며, “그래도, 태평양을 가슴에 품으”며,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일을 하면서 꿈을 잃지 않는다. 넓고 넓은 태평양의 고래를 꿈꾸며, “하루 세 끼 삼각김밥”으로 견디며, “바다 한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내 모습”을 잃지 않는다. 날치와 꽁치들, 즉, 소위 수많은 손님들과 부자들의 갑질에도 기죽지 않고, “옥션의 경매 정보나 쿠팡의 쿠폰도 팡팡” 쌓아놓으며, “이제는 겪을 일 없는 풍파”와 “신의 가호란 말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참고 견딘다.
하지만, 그러나 수많은 손님들과 부자들의 눈에는 “이놈 똥 뺄 것도 없겠네”라는 시구에서처럼 “멸치”의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달랑 소주 한 병으로 나를 깨운”다. 제아무리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저 아줌마는 모를 거야”라고 태평양의 고래를 꿈꾸고 있을지라도 멸치는 먹이사슬의 최하 천민이지, “푸른 물결 헤쳐나가는 대왕고래”가 될 수가 없다. “정말, 고래가 될 수 있을까?” 아아, 우리 젊은이들이여, 아아, 우리 흙수저들이여! 이 세상에는 신도 없고 천국도 없고, 오직 사악하고, 또 사악한 부자들(주인들)뿐이 없단다. 이 세상에서 꿈꾸는 것은 자유이지만, 편의점의 멸치란 오직 소주 한 잔의 안주거리로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역사의 종말은 탐욕에 있으며, 이 탐욕의 극단적인 예는 수많은 사치재의 생산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모든 동식물들은 최소한의 동체성의 보존을 위한 먹이활동에만 그치지만, 우리 인간들은 생필품이 아닌 사치재 생산을 위해 모든 학문과 예술과 문화 활동을 발전시켜 나간다. 대저택, 고급승용차, 호화유람선, 비행기, 우주선, 미사일, 스포츠 등, 그 어느 분야이든지 먹고 사는 생필품이 아닌 사치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탐욕과 사치재의 생산에는 한계가 없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평등의 권리’는 다 없어지게 된다.
소수의 부자들 이외에는 모두가 다 그토록 더럽고 추악한 노예 신세를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와 생명과 노동력을 다 빼앗긴 멸치는 대왕고래가 될 수가 없다.
옛날에는 인간의 탐욕을 단죄했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의 탐욕을 끊임없이 미화하고 신성시 한다. 옛날에는 최후의 심판관이 정의의 사도였지만, 오늘날에는 최후의 심판관이 우리 탐욕의 대가들, 즉, 최고의 부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의 도덕과 윤리학의 근본 토대는 ‘적반하장의 예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처럼
최병근
풍경소리 들으러 갔다 거기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와중에 누군가 대장간에라도 다녀왔는지
사천왕 작두 창칼이 춤추고
목이 잘린 말들
말들이 히힝 울었다
경마장이 아니었는데
재갈을 물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첩첩산중
결가부좌로 포박당한 부처가
유리안치 되었다
일곱 걸음만 걸을 수 있게 해다오
연꽃 위에서 이슬과 노는
개구리나 되게
누구의 명이던가
붉은 장삼을 두른 나무들이
대웅전 지붕 위에
단지한 손가락을 불쏘시개로 던져
불을 질렀다
발치 사하촌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났다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만적인 대사기극은 종교라고 할 수가 있으며, 모든 종교인들은 이 대사기극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 모든 교리가 진리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진리란 참된 이치이며, 그 어느 누구의 비판이나 반박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부처와 예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천국(극락)에 가고, 부처와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천당은 당근이 되고, 지옥은 채찍이 된다. 이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끊임없이 어리석고 나약한 대중들을 협박하며,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유린하고, 그 재산들을 다 약탈해간다. 어느 누구도 부처와 예수를 본 적도 없고, 부처와 예수의 저서는 커녕, 그들의 글귀마저도 발견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나 부처의 진신사리는 히말라야의 설산보다도 더 높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전인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경과 경전은 수많은 사람들이 조작해낸 대사기극의 진수이며, 이 종교적인 잔혹극보다 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있을 수가 없다.
최병근 시인의 [모처럼]은 불교의 ‘법란’을 희화화시키고 있는 시이며, 이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리도 없는 부처가 우리 사제들, 즉, 그 대사기꾼들에 의해 “결가부좌”로 “유리안치”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경전들은 진리가 되고, 부처(예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불상이 부처가 된다. 우리 사제들, 즉, 이 대사기꾼들은 이 존재하지 않는 진리를 움켜쥐고 그 모든 종단과 사찰의 경영권을 두고 싸우며,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을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만든다. 자기 자신만이 진리를 움켜쥐고 있으니까 모두가 바보천치이고, 타인의 말과 사유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 어떤 양보와 타협도 할 수가 없다. 진리가 아니면 허위이고, 적이 아니면 동지이다. 이 진리 싸움의 피비린내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한 싸움으로 모든 종교의 역사를 잔혹극으로 만들어 버린다.
조용한 산사의 그윽하고 맑은 풍경 소리도 없었고, 이 세상의 삶에 지치고 병든 사람들의 마음과 육체를 어루만져주는 사제도 없었다. 종단과 종파의 싸움이 있었고, 주지와 스님들의 싸움이 있었고, 사찰과 신도들의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누군가 대장간에라도 다녀왔는지/ 사천왕 작두 창칼이 춤추고/ 목이 잘린 말들”과 “말들이 히힝 울었다.” 산사는 복마전이고 경마장이며, 전지전능한 부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첩첩산중”에 “결가부좌로 포박당한” 포로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산사에 유리안치된 부처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구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부처와 예수,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부처와 예수----. 이 세상에 비록, 하나의 가상이자 허구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제들의 이권利權의 희생양이 된 부처와 예수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도 없고, 그 불쌍하고 가련한 신음 소리는 마침내, 하늘을, 대자연을 감동시켰는지도 모른다. “일곱 걸음만 걸을 수 있게 해다오/ 연꽃 위에서 이슬과 노는/ 개구리나 되게”가 그토록 불쌍하고 가련한 부처의 하소연과 신음 소리라면, “누구의 명이던가/ 붉은 장삼을 두른 나무들이/ 대웅전 지붕 위에/ 단지한 손가락을 불쏘시개로 던져/ 불을 질렀다”는 것은 부처와 예수를 구원하는 하늘의, 대자연의 구원의 손길이었던 것이다.
최병근 시인의 [모처럼]은 최후의 심판과도 같은 판결문이며, 한 마리의 포로와도 같은 부처와 예수를 구원하는 복음의 말씀과도 같다.
붉디붉은 대자연의 단풍으로 모든 사찰과 경전들을 다 불태우고, 부처와 예수의 해방을 위하여 사하촌의 마을에서 떡방아를 찧게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인다. 중을 만나면 중을 죽이고, 목사를 만나면 목사를 죽인다.
시는 언어의 경전이고, 시인은 영원한 혁명가이자 구원자이다.
획일성에 대하여
임덕기
네모난 아파트 공간에서 생활하고
네모난 스마트 폰으로 세상소식을 접하고
네모난 책상 앞에 앉아
네모난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한다
똑같은 얘기들이 떠도는 단톡방에서 사연을 읽고
똑같은 포장음식을 사다 식사를 해결하고
유행하는 얼굴 모습으로 성형하고
유행하는 화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유행하는 줄인 단어로 암호처럼 말하며
지루하고 단조로움을 퍼트리며 거리를 걸어간다
개성은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다른 사람 흉내 내는 무뇌형 로봇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며 걸어간다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이 다른 만큼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천차만별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학자의 행복도 있고, 정치인의 행복도 있다. 군인의 행복도 있고, 법조인의 행복도 있다. 어린 학생의 행복도 있고, 노인의 행복도 있다. 이처럼 행복이란 그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고, 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수많은 동료들과 수많은 적대자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서로 협력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된다.
어느덧 철학의 시대가 가고 과학의 시대가 도래한 지도 오래되었다. 철학의 시대는 이 세상의 삶의 이치를 파악하여 모두가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을 최선의 목표로 설정했지만, 그러나 과학의 시대는 철두철미하게 공동체 사회를 파괴하고 그 행복의 척도를 황금의 법칙에 두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돈이 궁극적인 목표이자 최고의 선이 되었고, 이 돈 앞에서는 그 어떤 직업의 차이와 자유와 평등과 사랑과도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철학은 그가 농부이든, 학자이든, 경제인이든, 정치인이든, 예술가이든지간에 이 세상의 삶의 풍요로움보다는 삶의 질을 따져 묻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했지만, 그러나 과학은 오직 돈을 최고의 목표로 상정하고 삶의 질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대저택과 호화 별장, 고급승용차와 자가용 비행기, 산해진미의 음식과 명품 옷, 현금과 부동산 부자와 주식 부자 등이 행복의 척도가 되었고, 그 어느 누구의 불행이나 상대적인 빈곤 따위 등은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고 할 수가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인간로봇과 인공지능 등은 현대과학의 꽃이며, 이 디지털 기기에 종속된 우리 인간들은 이제 행복이란 무엇이고, 삶의 질이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이고, 개성이란 무엇인가라고 따져 묻지도 않는다. 과학의 법칙은 인과의 법칙이며, 이 인과의 법칙은 그 어떠한 특별한 사건이나 예외적인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모든 인간들의 출신성분과 종교와 이념과 취미와 직업과 연간소독과 재산의 규모 등이 다 노출되었고,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은 이 정보량을 토대로 하여, 우리 인간들을 전면적으로 관리하고 통제를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철학은 둥굶의 세계이며, 저마다의 개성과 자유와 취향을 존중하지만, 과학은 네모의 세계이며, 그 모든 개성과 자유와 취향이 말살된 획일성의 세계이다. 그 결과,네모난 아파트 공간에서 생활하고, 네모난 스마트 폰으로 세상소식을 접한다. 네모난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네모난 컴퓨터로 이 세상과 소통한다. 수십 억, 또는 수천 명의 인간들이 똑같은 얘기들이 떠도는 단톡방에서 사연을 읽고, 똑같은 포장음식을 사다가 식사를 해결한다. 똑같은 유행하는 얼굴 모습으로 성형하고, 똑같은 유행하는 화장과 머리모양을 한다. 똑같은 유행하는 옷을 입고, 똑같은 유행하는 줄인 단어로 암호처럼 말한다. 모든 인간들은 컴퓨터와 스마트 폰과 인간로봇과 인공지능 등에게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다 빼앗겼으며, 수천 만 명이, 아니 수십 억 명이 단 하나의 회로와 미로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개성은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자유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박탈되었고, 저마다의 사유와 취향은 모두가 다같이 획일성의 코드에 갇히게 되었다.
임덕기의 시인의 표현대로, 무뇌형 로봇과 무뇌형 인간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을 흉내내는 획일성의 시대----. 이제 돈은 성공과 출세의 보증수표가 되었고, 모두가 다같이 그 돈벌이에 의해서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학, 철학 등, 모든 학문의 목적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그 결과, 진리탐구와 공동체 사회의 행복 등은 단지 하나의 필요악이 되고 말았다.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직업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긍지 같은 것은 없게 되었으며, 모든 학자와 성직자와 정치인들마저도 돈을 숭배하고 돈을 찬양하는 신성모독자와 대역죄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행복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평화란 무엇이고, 국가와 사회란 무엇인가? 도덕과 법률이란 무엇이고, 지상낙원과 내세의 천국이란 무엇인가 등의 진리탐구와 공동체 사회의 목적이 사라지고, 그 목적들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 과학의 시대는 인간의 죽음의 시대이며, 인간로봇과 인공지능에게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다 바친 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과 인간로봇과 인공지능 등이 없으면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미치광이가 될 것이고, 이 미치광이의 형태로 획일성의 코드에 묶여 개성과 자유와 모든 취향들을 다 빼앗기고 살아간다. 철학자는 사유하지만, 과학자는 계산한다. 철학자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 숨쉬고 저마다의 행복을 역설하지만, 과학자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다 빼앗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삶과 똑같은 행동을 강요한다.
임덕기 시인의 [획일성에 대하여]는 그의 삶의 철학이 돋보이는 시이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획일성’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정확하게 고발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철학자(시인)는 모든 성인군자와 천사들의 호위무사이며, 공동체 사회의 행복과 전체 인류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희생시키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과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정당한 일마저도 다 거절한다. 이에 반하여, 과학자는 자본가들의 호위무사이며,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더럽고 추한 일들도 다 저지르고 보지만, 그러나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공동체 사회의 행복과 전체 인류의 명예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철학자가 제공하는 음식(지혜)은 영양가가 풍부하고 피와 살이 되지만, 과학자가 제공하는 음식은 영양가가 전혀 없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공갈빵과도 같다. 철학자는 비록 가난하고 검소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건강에 이로운 숲길을 거닐며 행복하게 살고, 과학자는 고급옷과 고급음식을 먹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언제, 어느 때나 배 고프게 살아간다.
아아, 그러나 과학의 시대가 쇠퇴하고, 다시 철학의 시대가 도래할 그러한 날들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임덕기 시인의 너무나도 아름답고 뛰어난 시, [획일성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한 사람의 철학예술가로서 너무나도 뼈 아프게 묻고, 또, 물어 본다.
낙화
최윤경
살아있는 번뇌도
꿈틀대는 고뇌도
피면서 피면서 사라진다
피는 것도
지는 것도
다 한순간
난 왜 이렇게 미운 것이 많아서
자꾸만 가슴에 얼룩을 만드는가
울컥
고요해져야겠다
딱딱하게 굳은 응어리
물컹하게 삭여야겠다
허공은 어둠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밤을 수놓은 불꽃 사리는
비처럼
별처럼
꽃처럼
훨 훨 훨
나의 헛됨을
아서라
사르라
날려라
자꾸만 타이르신다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가난한 자유인보다는 배 부른 노예가 더 낫다라는 말도 있고, 죽은 정승이 살아 있는 개만도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탄생은 죽음의 첫걸음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 삶의 의지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산다는 것은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침내, 끝끝내 ‘인간이라는 종족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생물학적인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개인보다는 종이 더 크고, 어느 누구도 이 종족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어떤 사리사욕과 불륜과 온갖 범죄 행위마저도 이 종족에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지, 그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 종족에의 의지와 종족에의 의지가 부딪친 결과,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이 일어나고, 이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을 예방하고 종결하기 위한 것이 우리 인간들의 도덕과 법률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도 오만방자해졌고, 개인의 의지, 즉,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종족에의 의지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귀영화와 영생불사의 꿈이 그것인데, 이 부귀영화와 영생불사의 꿈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신성모독의 대역죄이자 종족에의 의지에 반하는 범죄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그 어떤 꽃도 십일을 넘기지 못하고,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이윽고 죽는다.
“살아있는 번뇌도/ 꿈틀대는 고뇌도” 꽃이 피면 봄눈 녹듯이 다 사라진다. 꽃이 핀다는 것은 최종적인 삶의 목표이자 존재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이 종족의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후손들을 위해 이윽고 사라져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피는 것도/ 지는 것도/ 다 한순간”인데, “난 왜 이렇게 미운 것이 많아서/ 자꾸만 가슴에 얼룩을 만드는가”라는 한탄은, 아직도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죽음의 본능’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종족에의 의지의 두 본능이며, 삶에의 의지가 더 크면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죽음에의 의지가 더 크면 삶을 더 두렵게 생각하고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된다.
최윤경 시인의 [낙화]는 최윤경 시인이 온몸으로 쓰는 열반의 낙화이며, 그 티없이 맑고 순수한 마음이 “비처럼/ 별처럼/ 꽃처럼/ 훨훨훨”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낙화는 새이고, 새는 시인의 최후의 날갯짓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면 모자람만도 못하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 인간들의 부귀영화와 영생불사의 꿈은 우리 인간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 인간들 모두를 다같이 ‘바보--천치’로 만들어버린다. 요컨대 부귀영화와 영생불사의 꿈에 사로잡혀서 온갖 자연의 질서를 다 파괴시키고, 죽는 법과 사는 법을 모르는 영원한 ‘바보--천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천국----.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성장산업인 실버산업은 미치광이들의 광태이며, 인류의 역사의 조종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먼지
김선옥
이불을 턴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저 먼지들
햇빛 속에 날개가 번득인다
내 몸 일부였던
저울 눈금에도 없는 먼지
내가 저렇게 가벼운 적 있었던가
밤새 떨어진 살꽃잎이 먼지라면,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아이들도 다
엄마의 몸에서 떨어진 한 톨 먼지다
날개를 달고
엄마는 하늘로
자식들은 서울로 부산으로 청주로
날아갔다
가끔씩 모였다 흩어지는 먼지들
이승은 저승을 향해 지우다
한 줌 먼지로 날아갈 몸
먼지는 매일 내려앉으며
날아오르는 법을 배운다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빛이란 무엇인가? 뉴턴은 빛이란 수많은 알갱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입자라고 말한 바가 있고, 맥스웰은 빛이란 파동, 즉, 전자기파라고 말한 바가 있다.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후 뉴턴의 입자설은 그 영향력을 상실한 것도 같지만, 그러나 전자기파를 실어나르는 ‘에테르’ 역시도 입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선옥 시인의 [먼지]는 ‘인간 존재론’이며, ‘우리는 먼지로 태어나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노래한 수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옛날의 교황의 왕관을 떠받쳐주던 것은 신앙이었지만, 오늘날의 교황의 왕관을 떠받쳐주는 것은 돈(황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인은 신 앞에서 평등하지 않고, 돈 앞에서 평등한 것이다. 아니, 만인은 돈 앞에서 평등한 것이 아니고, 돈을 소유한 힘 앞에서 평등한 것이다. “돈을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다양한 계급과 계층으로 나누어 지고, 따라서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신분에 따라서 더욱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다가 죽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돈도 하나의 입자이고 빛이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늘, 항상 망각하는 것은 그 모든 소망과 꿈과 희망이 다만 한 톨의 먼지이고 빛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불을 턴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먼지들”, 그 먼지들이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햇빛 속에서 날개를 번득인다.” “내 몸의 일부였던/ 저울 눈금에도 없는 먼지”,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아이들도/ 엄마의 몸에서 떨어진 한 톨의 먼지”였던 것이다. 자유라는 먼지, 평등이라는 먼지, 사랑이라는 먼지, 돈이라는 먼지, 명예라는 먼지, 권력이라는 먼지, 공산주의라는 먼지, 자본주의라는 먼지 등,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단 한 톨의 먼지에 불과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 먼지들을 더욱더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지금도, 이 순간에도 살인, 강도, 강간, 사기, 사랑, 치정, 이혼, 신앙, 예배, 제사, 복종 등의 다양한 싸움들을 벌여보지만, 이 최종적인 결말은 한 톨의 먼지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날개를 달고/ 엄마는 하늘로” 날아갔고, “자식들은 서울로 부산으로 청주로/ 날아”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가끔씩 모였다가 흩어지는 먼지들”에 불과하고, “이승”에서 “저승을 향해” 한 줌의 먼지로 날아갈 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삶이란 무엇인가? 먼지로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도 한 줌의 먼지이고 빛이고, 모든 소유권과 특허권과 상표권도 한 줌의 먼지이고 빛이다. 즐겁고 기쁜 것도 먼지의 움직임에 불과하고, 괴롭고 슬픈 것도 먼지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축제는 먼지의 축제이고 빛의 축제이며, 우리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와 엄마처럼 하늘로, 하늘로 날아가는 [먼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근본물질은 먼지(빛)이고,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10살에 죽으나 500살에 죽으나 그 어떤 차이도 없는 것이다.
소위 고소 고발전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현대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인가? 고소 고발이 거의 없는 신용사회가 더 좋은 사회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고소 고발이 거의 없는 신용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같이 문명과 문화의 혜택 속에서 저마다 수많은 가면들을 쓰고 골육상쟁의 소송전을 연출해내면서 살아간다.
이 고소 고발의 소송전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 양식인데, 왜냐하면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이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지적 재산권들이 등장했고, 이 지적 재산권을 둘러싸고 남녀노소, 부모형제 따질 것도 없이 천하무적의 전사가 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소송전이고, 한 줌의 먼지에서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한 우리 인간들의 너무나도 어리석고 파멸적인 우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지와 먼지의 대폭발----. 우리 인간들과 모든 생명체들의 조송 소리와도 같은 소송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을 보낸다
정해영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수없이 해도
아직 다하지 못한
밑바닥에 남아 있는
몇 마디의 말
너무 늦게 깨달아서
그때를 놓쳐버려
들어 줄 귀가 없는 말
어디 계시는가 지금쯤
꿇어 엎드려
기도로 하는 말
우리 집 강아지는 들어도
꼬리만 흔드는
오래 두어서
허물허물해진
말 같지 않은 말을 보낸다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우리 인간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아마도 돈과 명예와 권력일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재화이며,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사회적 동물의 특성상, 우리 인간들의 욕망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만인 대 만인의 싸움’, 즉, ‘무차별적인 싸움’의 대상이 된다.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의 수단인 동시에 최고급의 싸움의 수단이 된다.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설산과 빙하를 녹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천사와 악마의 관계로 만들 수도 있다. 사랑의 말은 만인들을 불러 모으고, 혐오의 말은 만인들을 떠나가게 만든다. 자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공동체 사회를 만든다면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마을이 될 것이고, 모두가 다같이 ‘한마음--한뜻’으로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가도 이익의 분배를 둘러싸고 싸우게 되면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이를 북북 갈고 떠나가게 될 것이다. 사랑의 말은 아주 소중한 칼이 되고, 혐오의 말은 타인들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
봄날의 꽃샘 추위와 여름날의 장마와 태풍을 다 견딘 나무에게서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과일이 열리듯이, 우리 인간들의 말이 가장 아름답고 달콤할 때는 더없이 맑고 깨끗한 노년의 말일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철부지 어린애 같아지고, 싸울 일도 싸우지 않게 된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니 가진 것을 다 나누어 주고,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니 지나친 미사여구와 과장된 말이 없어지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니 쓸데없이 무리를 짓고 음모를 꾸밀 일도 없어진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 어떤 허물까지도 다 받아준다는 말이고, ‘고맙다’는 말은 그동안 나를 도와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말이고, ‘미안하다’는 말은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거나 민폐를 끼쳤다는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이다.
[말을 보낸다]는 정해영 시인의 언어철학, 즉, 도덕철학의 진수가 되고, ‘사랑한다’와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그의 도덕철학의 세 기둥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한다’와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아주 단순하고 간결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말들의 아름다움이 가을날의 붉디 붉은 사과처럼 주렁주렁 열리고 있는 것이다. 말의 과즙과 말의 당도, 말의 향기와 말의 영양소들이 정해영 시인의 [말을 보낸다]의 세 기둥 말들의 주요 성분이 되고, 따라서 정해영 시인은 “어디 계시는가 지금쯤”이라고 그 기둥 말들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
인생은 짧고 할 말은 너무나도 많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도 너무나도 많았고, 우리들을 그토록 인자하고 친절하게 도와주웠던 사람들과 우리들이 그토록 잘못을 범했거나 민폐를 끼쳤던 사람들도 너무나도 많았다. 수없이 해도 아직 다하지 못한 말, 밑바닥에 남아 있는 몇 마디의 말, 너무 늦게 깨달아서 그때를 놓쳐버려 들어 줄 귀가 없는 말, 꿇어 엎드려 기도로 하는 말, 우리 집 강아지는 들어도 꼬리만 흔드는 말----. 더없이 맑고 푸른 가을날, 건강에 이로운 ‘시인의 길’을 걸으면 ‘사랑한다’와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말이 천만 평, 백만 평의 붉디 붉은 사과처럼 열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맛있는 말은 “오래 두어서/ 허물허물해진/ 말 같지 않은 말”, 아니, 오랜 시간을 두고 그 모진 비바람을 다 견디어 낸 사과같은 말일 것이다.
젊음은 언제, 어느 때나 싱싱하고 매력 만점이긴 하지만, 그러나 젊음은 떫고 비린내가 난다. 늙음은 언제, 어느 때나 연약하고 정점을 다 찍은 것 같지만, 그러나 늙음은 더없이 달콤하고 그 말의 향기가 오래 간다. ‘사랑한다’와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말에 의해서 모든 욕망과 싸움이 다 해소되고, 그 말들에 의해서 이 세상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펄쳐진다.
‘사랑한다’와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말은 ‘나’를 비운다는 말이며, 이것이 정해영 시인의 도덕철학의 근본토대인 것이다. 누구나 부처가 되고, 누구나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입신入神, 해탈解脫, 득도得道의 길은 아주 하찮거나 그토록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다.
말 한 마디로 모든 이민족과 이교도와 자본가들을 다 죽일 수도 있고, 말 한 마디로 소수 민족과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그 모든 이교도들을 다 살릴 수도 있다. ‘이교도와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전자의 예에 해당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만인은 평등하다’는 후자의 예에 해당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말은 ‘사랑한다’와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시야를 다 갖춘 성인군자와도 같은 말들의 은총이 쏟아져 내린다
[말을 보낸다], [말을 보낸다].
일찍이 어느 누가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말을 한 편의 시로 써서 보냈단 말인가? 시인과 시인의 거리는 잘 익은 사과와 풋사과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인간의 꽃은 말의 꽃이고, 말의 꽃의 결과는 말의 열매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말의 꽃으로 피어나고, 인간의 일생은 말의 열매로 끝난다.
타조의 지식백과
이선희
울타리를 벗어나니 본능이 살아나네요
본래 소속이 야생이라
작은 머리에 검고 큰 눈동자가 있어요
머릿속으로 보는 것보다
눈으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눈이 밝아 안경 없이도 멀리 볼 수 있어요
빠르게 맹수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훔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판단하지요
날개는 펼 수 있지만 한 번도 날아 본 적은 없어요
자꾸 불어나는 몸집
퇴화된 아늑한 날개 속에 고개를 파묻고는 해요
자신을 숨기는 법도 알아야 하거든요
식성은 아무래도 잡식성이 유리하겠지요
초식과 육식 때로는 모래와 돌까지 삼켜요
삶이 다 초원은 아니라서
때때로 사막 같은 곳이라서
무리 속에서 태어나고
무리 생활을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날개가 역할을 못해서 다리로 나섰어요
이 다리 좀 보세요 달릴수록 강해져요
태생의 억척은 타고나지 않았어요
다행일까요?
새 중에서는 달리기 잘하는 가장 큰 새거든요
세링게티 국립공원에서 사진 한 장 보내요
자칼 매 하이에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른 초원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멋지게 폼 좀 잡아봤어요
아 셀프 사진은 아니예요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크고 무거운 죄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원죄이고, 너무나도 오만방자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지옥이 만원’이라고 해도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자의 주체성을 빼앗고 말살하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체들의 주체성을 빼앗고 그 동물들을 가축화시키거나 인간화시켜왔던 것이다. 수많은 동물들을 가축화시킨다는 것은 그 동물들로부터 노동력과 고기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고, 가축으로 길들일 수 없었던 동물들은 그 동물들의 야생성을 박탈하여 수많은 동물원에서 경제적 이익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사육을 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가축화시킨 동물보다도, 야생성을 박탈당한 동물보다도 더욱더 불행하고 비참한 생활에 빠진 동물들이 있으니, 그것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화시킨 동물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고양이나 개와 앵무새들마저도 자기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야생성을 버리고 인간화시켜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미명 아래 자기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자유와 습성과 종족의 번식기능마저도 다 빼앗기고, 온갖 농담과 재롱과 웃음을 강요당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동물병원의 수의사는 반려동물의 생체실험과 수명연장을 담당하는 악마이고, 동물원의 조련사는 반려동물들의 마지막 야생성까지도 박탈하여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악마이며, 마지막으로 수많은 반려동물들의 짝인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반려동물들을 다양하게 분장시키고 오래 오래 끌고 다니며 고문치사시키거나 자기 자신의 죽음과 함께 순장당해 줄 것을 강요하는 악마의 역할을 담당한다. ‘반려동물’은 ‘인간만세 사업’이며, 그 어떤 말보다도 더욱더 더럽고 추악하게 타락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도, 당신도 반려동물을 위해 살고, 반려동물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 전재산을 다 바치고, 당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천당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타조는 타조목 타조과에 속하는 새이며, 날지 못하는 새를 대표하는 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조의 수컷은 키가 2.5m에 달하지만, 절반은 목의 길이이고, 몸무게는 155kg이나 되며, 현존하는 새의 알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타조는 5마리에서 50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살고, 대개는 초식동물들의 무리 속에서 살지만 도마뱀과도 같은 동물성 먹이도 잡아먹는 잡식성 동물이고, 우리 인간들은 타조의 알과 고기와 깃털을 얻기 위해 사육하기도 한다.
이선희 시인의 [타조의 지식백과]는 세링게티 국립공원의 타조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 타조의 ‘주체성(야생성)의 회복’과 ‘홀로서기’를 기원하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본래 소속이 야생이라” “울타리를 벗어나면” “본능이 살아나고”, “머릿속으로 보는 것보다/ 눈으로 생각하는 것을” 더욱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작은 머리에 검고 큰 눈동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눈이 밝아 안경 없이도 멀리 볼 수 있”고, “빠르게 맹수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훔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판단”하게 된다. 타조는 생각하는 동물이 아닌 바라보는 동물인데,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보다 바라보는 것이 종의 보존과 생존경쟁의 장에서 더욱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타조는 눈으로 보고 눈으로 생각하며,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 보호와 모든 먹이활동을 눈으로 하게 된다. 날개는 펼 수 있지만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고, 퇴화된 날개 속에 고개를 숙여 머리를 파묻기도 한다. 식성은 아무래도 잡식성이고, 초식과 육식은 물론, 때로는 모래와 돌까지도 삼킨다. 무리 속에서 태어나고 무리 속에서 생활을 하지만, 그러나 세링케티 국립공원의 타조는 “혼자 있는 것”을 더욱더 좋아한다. “이 다리 좀 보세요, 달릴수록 강해져요.” 하지만, 그러나, 태생의 억척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은 야생의 터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다행일까요?/ 새 중에서는 달리기를 잘하는 가장 큰 새”라는 것은 세링게티 국립공원의 사육장과 울타리를 뚫고 가장 아름답고 멋진 타조의 삶을 살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대자연과 우주를 자기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원으로 삼을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조의 눈은 ‘생각하는 머리’보다도 더 좋은 눈이고, 타조의 다리는 그 어떤 새의 날개보다도 더욱더 튼튼한 다리이고, ‘홀로서기’를 이룩하고 ‘고립무원의 삶’을 즐길 줄 아는 타조는 “자칼 매 하이에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른 초원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영원한 황제의 삶’을 즐기고 있는 타조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