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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 태어나 자란 곳…'대석학의 산실'
단종 폐위로 낙향한 퇴계 조부가 지은 정자, "잠잘때도 먹을때도 글과 함께" 대대로 면학
퇴계와 넷째 형 가장 탁월…'금곤옥제' 불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 전경. |
"나는 글에 대하여 먹을 때도 글과 더불어 함께 먹고 잠을 자도 함께 꿈꾸며, 앉아도 글과 함께 앉고 걸어도 글과 함께 걸어 잠시도 가슴에서 글을 잊은 적이 없다. 너희들도 이와 같아야 한다. 유유자적하며 세월만 보내다가 어떻게 성취를 바랄 수 있겠느냐.(吾於書, 食與俱嚥, 寢與俱夢, 坐與俱坐, 行與俱行, 未嘗頃刻而忘于懷, 汝輩乃如此, 悠悠度日, 何能有望於成就哉)" 퇴계가 부친의 행장에서 자녀들에 대한 부친의 가르침을 서술해 놓은 글이다.
퇴계의 조부는 "지금처럼 부지런하고 괴롭게 공부를 하는 것을 탄식하지 말라. 반드시 훗날 조상에게 다함없는 효를 바칠 수 있을 것이다(莫嘆如今勤苦業/定知他日孝無疆)"라는 권학시를 남기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노송정(老松亭)은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이 이곳으로 처음 입향하여 지은 거처의 정자로, 퇴계와 같은 대유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연유와 뿌리가 있는 곳이다. 이 노송정 종택은 퇴계가 태어난 퇴계 태실이 있는 곳이며, 퇴계가 자라난 곳이기도 하다.
#노송정 내력
노송정 이계양(1424~88)은 단종 원년(1453)에 성균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려는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길의 뜻을 접고 낙향하여 산수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안동 주촌(현 와룡면 주하리)에서 태어난 이계양은 혼인 후 예안 동쪽 부라촌(현 예안면 부포리)에 거주했다. 어느날 봉화 훈도(각 도의 군현에 배치하는 종9품 외관직)로 부임하다가 온혜를 지나면서 그곳의 산수가 마음에 들어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두루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다 신라재 고개에서 쉬는 도중 온혜에서 온 한 승려와 만나 함께 쉬면서 온혜지역의 풍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이 합치돼 함께 온혜로 돌아와 두루 살펴본 뒤 노송정 부근을 택지로 점지했다. 그 승려는 그곳 터가 귀한 아들을 낳을 곳이라 했다.
이계양은 결단을 내려 1454년 온혜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온혜는 거주민이 한 집 밖에 없었고, 수목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였다고 한다. 그는 성품이 맑고 고요하며,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힘쓰지 않았다. 오직 농사짓고 낚시하며 산수간에 자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자손들을 올바로 교육시키는 데 일생을 바칠 뜻을 두었다고 퇴계가 남긴 '선조고사적(先祖考事蹟)'에 전한다.
이계양은 단종이 폐위된 세조 원년(1455)에 온혜의 거처 뜨락에 소나무를 심고 키우며 거처에는 '노송정(老松亭)' 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또한 노송정이라 했다.
노송을 사랑하여 소나무를 심고 노송정이란 이름을 붙인 뜻은 공자 말씀에 '세한이 된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맨 나중에 시드는 줄 알겠도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라고 한 것과 중국 동진시대 도연명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와서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배회하도다(撫孤松而盤桓)'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벼슬길에 더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노송에 마음을 의탁한 깊은 뜻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으려 한 세한송백 같은 지조를 지키고, 도연명처럼 전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본성대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이계양이 심은 노송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본래 그의 부친 이정(李禎)옹이 북한 영변에서 '만년송' 세 그루를 가져와 한 그루는 주촌의 맏아들 집 경류정(慶流亭)에 주어 오늘날까지 자라고 있고, 사위에게 한 그루 준 것은 일제 때 훼손됐다. 나머지 한 그루는 이계양이 심었는데 수백년 동안 잘 자라오다 120여 년 전 폭설로 부러져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20년 전 경류정 노송(천연기념물)의 어린 소나무를 가져와 다시 심은 것이 자라고 있다.
#퇴계 조부와 부친의 남다른 자녀교육
이계양은 아들 둘을 두었다. 큰 아들 식(埴)은 퇴계의 부친이고, 둘째는 우()로 호가 송재(松齋)이다. 이계양은 일찍부터 독실하게 학문에 정진하여 체득한 것을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식은 진사 합격 후 집 부근 산기슭에 독서공간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독실하게 공부를 하였으나 퇴계가 태어난 이듬해에 불행히도 별세했다.
퇴계 부친이 얼마나 학구열이 강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던 식의 장인이 불행히도 일찍 별세하자 장모되는 남씨 부인은 자기 자식들이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음을 한탄하다가, 사위가 학문에 열성적인 것을 보고 많은 서적을 모두 사위에게 넘겨준다. 그러면서 "내 들으니 서적은 공적인 기물이다. 반드시 학문하는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아이들은 이 보물을 소장하기엔 부족하다"고 했다 한다. 퇴계가 자신의 부친 행장에 기술한 내용이다.
식과 우 두 형제가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힘은 이계양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고, 그 결과 송재공 또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두 형제를 영남수사(嶺南秀士)로 꼽았고, 형제가 금과 옥과 같다고 하여 금곤옥우(金昆玉友)로 칭송되기도 했다. 송재공은 형이 별세하자 형이 남긴 서책으로 퇴계를 비롯한 조카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쳤고, 그 중 퇴계의 넷째 형인 해(瀣)와 퇴계가 가장 우뚝해 금곤옥제(金昆玉弟)로 불렸다.
이처럼 노송정의 내력을 살펴보면 퇴계가 학문을 크게 이룬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송정의 주인공인 퇴계 조부 이계양에서부터 쌓여온 공덕이 퇴계가 세계적 대석학이 될 수 있었던 터전이 됐던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노송정에 들어가는 문인 '성림문(聖臨門)'. 퇴계 모친이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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