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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정조의 제주사랑
권 무 일
1.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뚜렷하고 양반사회가 당쟁을 일삼던 조선의 사회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려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물이 되었고 자신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지긋지긋한 당쟁을 종식시키고 여러 당파의 의견을 조율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탕평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또 그는 해묵은 신분 사회를 타파하여 실제로 나라에 공헌하는 농공상인이 양반과 동일한 반열에 있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적자嫡子(정실에게서 낳은 자손)와 서얼庶孼(첩이나 외간여자에게서 낳은 자손)의 차별을 혁파하고자 했다.
정조의 등극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대부 중심에서 일반 서민 사회로, 획일적인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그리고 농업생산사회에서 생산과 유통을 아우르는 산업사회로 조선은 급격히 바뀌고 있었다.
정조는 채제공, 이가환, 박지원, 정약용과 같은 실사구시의 실학자들과 박제가, 홍사용, 유득공 등 서얼 출신의 신진개혁파들을 중용하였다.
정조는 조선 개국 이래 나라의 먹거리와 생활도구를 생산하면서도 압박과 멸시 속에 살아온 백성들의 편에 섰고 바로 국리민복이 나라 부강의 기초임을 인식했다.
정조는 역대 어느 왕보다도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한 임금이다. 그는 재위 24년간 60회의 암행어사 파견을 하여 그들을 통하여 지방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려 했고 백성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을 색출하여 응징하였다. 그는 임금의 왕화王化가 못미치는 먼 지역의 백성들이 사는 모습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을 어루만지려 했다.
2.
정조는 척박한 땅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탐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는데 재임 5년(1781) 6월에 암행어사(순무시재안사어사巡撫試才按査御史) 박천형朴天衡을 제주도에 파견하면서 손수 쓴 윤음綸音(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제주도 3읍에 반포頒布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윤음을 통하여 첫째 귤, 말, 흑소, 비자 열매, 진주, 모혁, 대나무, 각종 약재를 공물로 바친 일을 치하했고 둘째 제주 사람들이 돌담을 쌓고 띠를 엮어 지붕을 만들어 살면서도 검소하고 예절이 바르며 질병이 적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조는 선대왕인 영조가 특별히 제주를 생각하여 다른 지방과 동일하게 대했고 인정을 베풀어 기근이 발생하면 곡물을 보내고 방물을 바치러 오면 돌아가는 길에 양식을 보내고, 제주에서 인재를 찾으려 했고 각종 요역과 형벌을 감해주곤 했다고 밝혔다.
정조는 탐라사람들이 질고가 있어도 하소연할 길이 없고 재주가 있어도 발탁될 기회가 없으며 선한 일을 해도 상을 주는 이가 없으며 목축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듬어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탐라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맛있는 음식도 맛있는 줄 모른다고 자탄했다.
정조는 자신이 해녀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전복의 공출을 줄인 점, 백성들의 고역을 줄인 점, 농민의 편의를 위하여 중잣성을 쌓게 한 점 그리고 말목장의 편의를 도모하고 우마감을 포상하는 법을 정한 일을 자찬하기도 하였다.
3.
이때의 정조의 윤음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국조보감』에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전재轉載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은 이르노라. 아, 너희 탐라는 천 리나 떨어진 해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해마다 공물로 귤과 좋은 말을 진헌하였도다. 또 흑우와 비자 열매를 보내 제사용으로 이바지하고 진주, 모혁, 대나무, 화살촉 등과 각종 약재를 보낸 것은 손가락으로 다 셀 수가 없도다. 탐라 백성들은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고 띠를 엮어 지붕을 만들며 풍속은 검소하면서 예의가 있고 질병이 적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으니, 또한 해중의 도회지로다. 다만 토질이 척박하여 보리, 밀, 콩, 조만이 생산되고 생활수단은 배로 운송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으니, 아, 위태롭고 위태롭도다.
이에 조정에서는 특별히 진념軫念하여 내륙과 동일하게 어루만져주고 구휼하는 방도라면 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아, 선대왕(영조)께서는 지도를 고찰하고 공물을 살피시어 인정을 베푸셨다. 즉 기근을 알려오면 곡식을 실어보내고 방물을 바치러오면 돌아갈 때 양식을 보내주셨으며, 인재를 찾고 폐단을 알아보기 위하여 번번이 어사를 보냈고 요역을 가볍게 하고 형옥을 살피기 위해 매번 부임하는 관원에게 당부하였다. 따라서 온 섬의 몇만 명의 백성이 선대왕의 교화에 힘입은 지 50년이 흘렀다.
그러나 과인이 등극한 이후로는 한 가지 혜택이나 은총도 그대들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간 흉년이 든 해가 없었던 것은 하늘의 돌보심에 힘입었기 때문이지만, 파도가 순조롭지 못해 선박이 표류한 일은 매우 애석하다. 탐라 백성들이 멀리 겹겹의 푸른 바다로 둘러싸여 질고가 있어도 하소연할 길이 없고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발탁될 기회가 없는 이 점을 불쌍하게 여긴다. 아, 공물을 헌납하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있을 것이지만 누가 너희를 대변해 줄 것이며 관역이 많고 번거로울 것이지만 누가 너희를 위해 경감해 주려 하겠는가?
하늘이 인재를 낳음은 고금에 다를 바 없고 인성 또한 섬이나 육지나 다름이 없다. 가난한 집이라고 어찌 고유高維, 고조기高兆基와 같은 선비가 없을까마는 누가 인재를 추천하려 하겠으며 서민의 집이라고 어찌 김칭金秤처럼 효도하고 정씨鄭氏 열부처럼 정절을 지킨 사람이 없겠느냐마는 누가 추천해 올리려고 하겠는가?
국마장과 산마장의 말이 잘 번식하여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으며, 전복 잡는 사람들과 뱃사람들이 편안히 지내어 직업을 잃거나 살 곳을 잃는 탄식은 없는가? 송사의 판결이 공평무사하여 과연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은 없으며, 수령과 아전들의 가렴주구를 통절히 끊어 과연 곤궁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없는가? 이러한 백성들의 고통이 눈에 선하여 매번 남쪽을 돌아볼 때마다 진기한 음식도 맛있는 줄 모르겠도다.
아! 먼 곳이건 가까운 곳이건 모두가 나의 자식인데 지금 내가 너희들의 부모가 되었으면서 부모로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한밤중에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에 이조에 명하여 문무신하들 가운데 자급과 이력을 갖춘 사람을 택하여 세 고을의 수령을 교체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돌보는 정사를 새롭게 하고, 또 전 홍문관 응교 박천형을 어사로 명하여, 가서 나의 마음을 선포하게 한 다음 과거를 실행하여 인재를 뽑도록 하였으니, 이는 바로 소원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쓰일 기회인 것이다. 너희 대소 군민軍民들은 간절히 당부하는 나의 유시를 조용히 듣고 백성들의 질고를 묻는 나의 뜻을 깨달아서 나에게 숨기는 것이 없도록 하라.
아, 지난번에 특별히 명하여 인복引鰒(늘여 말린 전복)의 수를 줄이게 한 것이 비록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 바, 한 푼이나 반 푼의 효과라도 있었는가? 그리고 여섯 가지 고역을 혁파한 일, 각 산장의 횡축橫軸(중잣성)을 창시한 일, 구점군驅點軍의 예전 규례를 영원히 없앤 일, 우마감의 권상勸賞을 새로 정한 일도 전에 비하여 요량껏 처리하는 이로운 점이 있었는가? 그밖에도 백성이나 고을에 관계되는 폐단이 있으면 크건 작건 따지지 말고 모두 어사에게 달려가 호소하도록 하라. 짐은 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너희들을 위해 재량껏 처리하겠노라.
4.
정조 5년 6월 17일, 정조는 암행어사 박천형을 제주에 파견하기에 앞서 따로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이번 어사의 책임은 지극히 중대하다. 작년에 호서湖西에서 일을 잘 끝냈기 때문에 이번에 특별히 경을 가려 뽑은 것이다. 제주도는 먼 곳에 위치하여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였고, 그동안의 지방관들도 또한 조정의 덕의德意를 잘 선양宣揚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의 풍속이 어리석고 미혹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어사의 이번 길에는 그들을 위로하고 상달되지 않은 백성들의 고통과 억울한 쟁송과 옥살이에 대해서도 또한 일일이 조사하여 제주도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조정의 덕의를 알게 해야 한다. 그 후 제주도의 물정과 풍습을 상세히 잘 기록하여 별단別單으로 아뢰라.
제주도에 부임한 박천형 어사가 우선 손을 댄 것은 김시구金蓍耉 목사가 조정에 고변한 조정철趙貞喆 역모 혐의였다. 5년 전에 정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은전군恩全君(정조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모시기 위한 역모 사건으로 공모자들이 도륙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에 조정철의 장인 홍지해洪趾海가 가담한 일이 있었고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홍지해 3형제와 아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조정철은 가담하지 않았으나 장인에게 연루되어 정조 1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조정철의 처는 8개월 된 아들을 남겨두고 자결했다. 정조 5년 3월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김시구 목사는 조정철 집안과는 조상 때부터 불편한 사이인지라 조정철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조정철이 당시 제주도에 귀양 온 무리들(심익운, 이회수, 한후락, 김치양 등)과 더불어 반역의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정철 자신에게서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목사는 조정철의 현지처 홍윤애를 잡아다가 고문을 가하며 거짓 고백을 유도했다. 홍윤애는 100일 된 딸을 두고 있었다. 홍윤애에게서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 김시구 목사는 혹독한 형벌을 가했고 홍윤애는 가혹한 고문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정조 5년 윤5월 15일의 일이었다. 박천형은 이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박천형은 조정철 등을 여러 날 심문했으나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목사를 다그쳤다. 그러나 목사는 명확한 혐의사실을 입증하지 못했고 목사와 한통속인 판관과 대정 현감, 정의 현감도 마찬가지였다. 박천형 어사는 김시구 목사로 인하여 제주 사회가 한동안 불안과 혼돈의 도가니에 쌓여 있음을 개탄하며 목사 김시구, 판관 황인채, 대정 현감 나윤록, 정의 현감 송중현을 체포하였다. 취조와 형벌은 전광석화같이 이루어졌다. 박천형 어사는 6월 말, 이들 4명을 삭탈관직하고 한데 묶어 같은 배에 태워 서울의 의금부로 보냈다. 그들은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
7월 12일에 새로 임명된 제주 목사 이양정, 판관 이형묵, 대정 현감 이양재, 정의 현감 이우진이 한 날 한 시에 한 배를 타고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도 역사상 4명의 수령이 동시에 해임되고 잇따라 4명의 수령이 동시에 부임한 예는 전후를 통틀어 없는 일이었다.
조정철은 이 사건에 관한 한 무혐의로 처리되었지만 5년 전의 은전군 역모사건에 연루된 형벌이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의현으로 이배되어 거기서 9년을 살다가 다시 추자도로 이배되었다. 그는 도합 2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5.
박천형 어사는 임금의 뜻에 따라 그해 가을 제주도민을 상대로 문무과 과거시험을 시취했다. 그 결과 문과에는 김용, 변경우, 강성익 등이 으뜸으로 뽑혔고 무과에서는 이방익, 이광수, 김종보, 부사민이 으뜸으로 뽑혀 상경하여 2차 시취를 했다. 장원급제한 이방익李邦翼은 궁궐의 수문장을 거쳐 무겸선전관(외국사신을 접대할 때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에 올랐고, 정조 15년에는 35세 나이로 임금의 원자 돌을 맞아 행하는 활쏘기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임금을 경호하는 무관직인 충장위장(정3품)의 자리에 올랐다. 이방익은 정조 20년(1797년) 고향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우도 인근 바다에서 표류하여 16일 만에 대만해협에 이르렀고 중국을 거쳐 9개월 만에 돌아왔다. 그 후 그는 『표해가』와 순한글 『표해록』울 써서 남겼다.(권무일 저, 『평설 이방익 표류기』 참조)
박천형 어사는 정조의 비밀지시에 따라 제주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제주도의 물정을 조사하여 작성한 16항의 별단을 정조에게 올렸다. 이를 근거로 정조는 제주도에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제도의 개선, 방어진지의 간소화, 불필요한 부역의 폐지, 마정의 개혁, 조세의 감면뿐만 아니라 전복의 진상을 줄이고 귤에 대한 관리들의 착취를 엄금했다.
6.
이때를 즈음하여 관기였던 김만덕이 양인良人으로 신분상승을 했는데 그때까지의 전통사회에서는 기생의 경력을 가진 소위 퇴기가 조상이 양반이라 하더라도 양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만덕은 물상객주를 열어 제주도의 특산물을 육지 상인에게 팔고 육지의 상품을 들여와 제주도에 팔았는데 이는 해산물과 과일 등의 잉여농수산물이 존재했고 조선 사회에 상업활동이 기를 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만덕의 장사는 날로 번창했다. 기생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양인이 되고 다시 장사에 뛰어들어 거상이 된 것은 정조가 불붙인 시대적 산물이다.
정조 18년, 여름에는 가뭄이 심한 데다 가을에는 엄청난 태풍이 불어와 제주의 농토가 초토화되었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심낙수 목사는 제주의 참상을 적어 진휼미 2만 석을 보내 달라는 장계를 임금께 올렸다. 2만 석을 실은 조운선 12척이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추자도 인근에서 5척이 가라앉았다. 7척의 분량으로는 제주도 이재민에게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만덕은 급히 배를 띄워 육지에서 500석을 실어왔고 그중 450석을 구휼미로 내놓았다.
이에 감격한 정조가 김만덕을 궁궐로 불러올렸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인 금강산 구경을 시켜주기로 하면서 그녀가 이르는 곳마다 지방의 수령들로 하여금 편의를 봐주도록 했고 금강산내 절들에 지시하여 그녀를 안내하게 했다. 김만덕은 황진이에 이어 역사상 금강산을 오른 두 번째 여인이다. 58세임에도 씨억씨억한 그녀는 금강산 곳곳을 편답하고 낙산사를 거쳐 3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장안의 내노라 하는 대신들과 학자들이 그녀를 초청하거나 찾아왔다. 영의정 채제공, 병조판서 이가환 그리고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이다.
7.
김만덕은 제주도 좌면 동복리 출신으로 정조 20년(1797년) 초겨울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향했고 서울에서 머물다가 다음 해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금강산 구경을 하고 서울로 되짚어온 후 여름에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동복리 이웃 마을 북촌리 출신인 이방익은 정조 20년 초겨울 제주도로부터 표류하여 겨우내 봄내 중국을 편답하다가 여름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돌아왔다. 그는 제주도에 들를 새도 없이 전주 중군으로 발령받아 전라도로 향했다. 정조가 사랑한 제주의 두 사람 김만덕(1739년생)과 이방익(1757년생)은 길이 엇갈려 서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동시에 조선 사회에 큰 바람을 일으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방익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양자강 이남의 중국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었다. 이는 대단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18세기 대항해시대에 중국의 문물과 물류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조는 이방익의 표류담을 듣고는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졌다. 당시 실학자들은 상업을 진작시키고, 나라의 빗장을 풀어 외국문물에 눈을 떠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박지원은 ‘배가 해외에 나다니지 못하는데 나라가 어찌 가난하지 않겠으며 백성이 어찌 곤고하지 않겠는가?(舟不通海外 國安得不貧 民安得不困)’라고 일갈했다.
8.
정조는 왜 변방의 여인 김만덕을 만났을까? 정조는 김만덕을 예우함에 영의정을 앞세웠을까? 또 왜 비변사(군국문제를 맡아보던 최고행정기관)로 하여금 김만덕을 돌보게 하고 김만덕이 금강산에 오름을 허락하고 지방관리와 사찰에서 뒷바라지하게 하였는가? 왜 정조는 김만덕이 지나는 길목마다 지방관을 배치하여 수발을 들게 하였는가?
사농공상의 구별이 뚜렷했던 조선의 사회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조는 공리공론을 일삼는 양반과 농민, 상인을 같은 반열에 세워야 한다는 개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며 누구나 잘 사는 나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천하지존인 정조가 천민 출신에 불과한 김만덕을 불러올려 그녀의 손을 잡아준 것은 그의 개혁정치와 평등사상에 기인한 것이며 김만덕의 베품정신이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도다. 정조는 그 다음다음 해(1800년) 이름 모를 병으로 붕어했다. 정조는 해묵은 당파싸움을 척결하고 신진개혁세력을 앞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고 칼을 빼 들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채제공은 정조가 승하하기 1년 전에 죽었고 이방익은 1801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가환은 순조 1년에 감옥으로 끌려가 매를 맞고 죽었고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보내져 18년간 살았다.
정조가 승하한 후 박지원은 붓을 꺾고 서책을 던져버리고 술만 벗하여 살다가 순조 5년에 죽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상가에 다녀온 날 밤새 폭음하다 죽었다. 그후 조선은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들렸습니다. 권무일 학형의 제주도 사랑을 보고 감격합니다. 안부를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