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 유운룡 '선비 체취' 꽃내음 되어… 하회일대 秘境 벗삼아 동생 성룡과 학문연구·강학 퇴계 정신 계승…부귀영달 집착하는 학문풍토 비판
유유히 흘러내리는 낙동강을 굽어 보고 있는 겸암정 전경.
안동 하회라고 하면 서애(西厓) 유성룡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형인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1601)의 학덕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많지 않다. 하회마을 건너편인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낙동강 변 부용대 왼편에 안온하게 자리 잡은 겸암정(謙菴亭·중요민속자료 제89호)은 선생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있는 곳이다.
겸암은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풍기군수와 원주목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풍기에 있는 우곡서원(愚谷書院)에 봉향되었다.
#겸암정의 내력
겸암정사(精舍)로도 불리는 이곳은 겸암이 29세쯤 강학과 수양처로 지어, 동생인 서애 유성룡과 더불어 학문연구에 몰두한 곳이기도하다. 퇴계 이황의 정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은 겸암정사기문에서 이 정자의 절경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안동은 예부터 이름난 산수가 많으나 동남쪽이 기묘하고 빼어난 절경이다. 그중 하회일대가 가장 절경으로 달관대, 옥연, 도화천, 만송주 등 여러 승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별천지 같으나 유독 겸암정이 더욱 아름답고 하회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정자가 위치한 곳이 양 암반사이에 있어 골짜기가 넓고 깊으나 정자는 그윽한 곳에 있고 지세가 높아 강기슭 따라 지나가면서 옆으로 흘겨보면 암벽 칡넝쿨사이로 숨듯이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정자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대체로 있어도 없는 듯, 안으론 부(富)하면서도 밖으로는 검소한 것이 모두 겸(謙)의 덕에 가까운 뜻이다'.
겸암정의 글씨는 퇴계 선생이 정자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액을 써 보낸 것으로 전한다. 겸암이라는 이름은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뜻을 따온 것이다. 정자의 마루 안에 있는 겸암정사라는 글씨는 조선중기 중국 명나라의 신필로 알려진 원진해의 글씨라는 설이있다.
#겸암정은 겸(謙)의 덕(德)을 수행하던 곳
겸암은 성품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며, 좋고 싫음의 구분이 너무 분명했다. 감정을 드러냄에도 항상 솔직하여 동지 간들이 공경하면서도 멀리할 만큼 모난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겸암은 퇴계선생에게 겸암이란 이름을 받고 이 정자에서 5년여 각고의 수행 끝에 모나고 별난 성품을 다스려 너그럽고 원만한 덕성을 길러, 도량이 너그럽고 혼후(渾厚)한 인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인품은 훗날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에게 존중받았다. 택당(澤堂) 이식이 지은 겸암묘갈명에는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여(謙謙君子), 내면의 본체는 굳세고 외면의 마음 씀은 온유하셨도다(體剛用柔)'라고 적고 있다.
대산은 겸암정사기문에서 겸암의 깊고 깊은 수행의 경지를 이렇게 찬탄하고 있다. '겸암선생은 이 정자에서 천지의 차고 비는(盈虛) 도와 산천의 덜고 더하는(損益) 묘리를 묵연히 감상하다 깨달음의 흥이 극에 이르면 돌아왔다. 방안은 허명(虛明)한데 좌우로 도서에 싸여 만상이 태극의 한 이치에 모여 함유되어 있음을 알았다. 학문의 성취는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이 하였고 도는 이미 깨달았으나 깨닫지 못한 것 같이 여기었다. 사람들이 도의 광채가 난다고 하여도 겸암선생은 오히려 모자란 듯이 여겨 부지런히 힘써 종신토록 변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운명했을 때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는 조정과 간소하게 치르려는 유족과 제자들 간의 갈등을 무리 없이 조정하는 등 예학에도 깊은 경지를 보였다.
#당시 학문을 닦는 자세를 비판한 퇴계와 겸암의 대화
겸암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심성을 닦는 도학의 실천공부에 주력하였다. 스승 퇴계와 나눈 대화 가운데 "지금 사람은 이 한권의 책을 다 읽지도 않고 과거(科擧)말이 나오면 다 버리고 달려가 마침내 부귀영달을 꿈꾸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하니, 퇴계는 "인재가 무너지는 것은 다 과거의 폐단"이라고 하였다. 이는 학문의 근본이 자신의 덕성을 닦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부귀영달에만 집착하는 당시의 폐단을 걱정한 것이다. 덕성을 기르지 않고 부귀영달을 꾀하면 국가와 백성을 저버리게 되고 결국 자신마저 무너지는 것이기에 순수한 도학자의 길을 걷는 참 선비들은 이를 아프게 경계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고시열풍의 폐해와 다르지 않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겸암은 퇴계의 정신을 계승해 근사록, 심경, 주자서절요 등을 연구하여 존덕성(尊德性) 공부에 열중했던 기록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가 이 정자에서 옛 선비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체취를 느끼지 못하고 단지 건물의 풍광만 즐기고 간다면 오히려 세속의 먼지만 남겨놓고 가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