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6:24~7: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7:2)
언제가 아람 군대를 신사적으로 되돌려 보낸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데 그 아람 군대가 시간이 좀 지나고 전열이 정비되자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와서 포위하였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원망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포위로 인해 출입이 불가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궁핍해지기 시작했고, 식량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궁핍했던지 자식을, 인육을 먹는 일까지 발생했다.
성경의 교훈은 항상 어려운 상황, 절체절명의 상황, 절망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바라라고 하지만
자식을 먹을 정도의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분명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지만
과정 중에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어떻하나?
먹힘을 당한 그 어린 자식들처럼 말이다.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은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이지만
자식이 당한 일처럼, 우리가 감당하거나 도저히 부조리해서
계산이 되지 않는 일은 어떻게 마음으로 처리해야 하는가?
결국 내가 이해하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역 이상의 영역에서 해결함을 주시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입성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상황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다. 무지성 신뢰이다.
그리고 애매한 두 가지 갈래 길이 있다.
오늘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든 궁핍한 상황이 당장 개선될 것이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믿는 것이 하나이다.
내 이성은 어떻게 그런 것을 믿을 수 있는 지를 계속 반문하지만
그래도 믿어야 한다고 내 전인격적으로 이끌어 간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나에게 꼭 필요하거나, 당연히 그렇게 되면 안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앞에서와 같이 개선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실 때
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경우이다.
어쩔 때는 상황을 기적처럼 개선해주시다가도
어쩔 때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을 방치하신다.
이 모두 믿음으로 극복해야 하는 일인 것만 공통적이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의 능력의 한계로 여긴다.
온 우주에 널프러지게 장치한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를 깨닫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결국은 최상의 것으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어제 잠자리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생의 대수술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는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혼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주님의 손길로 보듬어 주시옵소서.
대수술을 앞둔 처남과 교회의 지체들, 주님께서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