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이갑, 최석하 삼씨는 하(何) 사건을 인(因)함인지 일본으로 도거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 (황성신문, 1910. 4. 6)
신문기사가 전한 소문과 달리, 세 사람이 실제로 향한 곳은 일본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이종호는 내장원경 이용익의 손자로 조부의 뒤를 이어 보성학교(고려대의 전신)를 경영했고, 최석하는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쫄업하고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해 태극학회를 이끌었다.
전직 육군 참령(지금 소령) 이갑이 이들과 동행한 것은 비밀결사 신민회의 일원으로 연해주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육군 참령 이갑 대한제국 군 장교
이갑은 1877년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향반 출신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12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했다. 그가 응시한 과거는 왕세자와 동갑(갑술년생)인 소년들에게 은전을 베풀기 위해 치른 시험이었다.
그보다 3년 후인 정축년에 태어난 이갑은 나이를 속이고 과거에 응시했다. 당시 평안감사 민영준은 이를 트집 삼아 이갑의 부친을 옥에 가두고 고문과 협박으로 그에게 재산을 바치게 한 후 풀어주었다.
부친이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사망하자, 이갑은 스무 살 되던 해 부친의 복수와 부조리한 사회의 개혁을 위해 무작정 상경해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다가 1898년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조 학교와 육군사관학교(15기)를 졸업했다.
이갑은 1903년 견습사관으로 도쿄 근위사단에 배속되었고, 이듬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장교 신분으로 귀국해 참전했다. 친러 내각이 물러나고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한국군 장교로 임관해 군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시종원경으로 좌천된 민영준을 찾아가 군도(軍刀)로 으름장을 놓아 10여년전 그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 부친의 원한을 갚았다.
이갑은 일본 한국주둔군 간부들과 대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일본 세력이 출세의 발판이었지만, 국권 수호라는 군인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그는 황해도·평안도 출신 인사들과 서우학회를 조직했고,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한북흥학회와 통합해 서북학회를 설립했다.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등과 함께 설립한 서북학회는 ‘월보’를 발행해 교육구국과 실업진흥 등 실력양성론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갑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 고종의 양위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희두, 어담, 임재덕 등 군부 수뇌부와 함께 군대를 동원해 양위를 막으려다 발각돼 육군법원에 구속되었으나, 곧 무죄방면 되었다.(황성신문, 1907. 8. 26)
그는 군대해산으로 장교 60여명만 남게 된 군부에 복직되지만, 이듬해 사임하고 안창호 이종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종호가 군자금 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망명 후 무관학교를 설립하지는 못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범진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범진의 자결 후 그는 정신적 충격과 과로로 쓰러졌고, 시베리아 일대를 전전하다가 1917년 4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일본 육사 후배(제 26기)이면서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응준이 그의 사위다.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