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치가 굵은 벚나무 산어귀를 지킨다. 텅 빈 속이 까맣게 탔다. 나무도 이렇게 비워내며 나이를 먹는가 싶어 애잔하다. 그 몸으로 어디서 힘이 솟구치는지 가지마다 꽃은 벙글어지고 산바람이 연분홍 꽃잎을 소리 없이 떨군다. 허공에 맴돌던 꽃잎들이 돌탑 위로 내려앉고 굄돌 사이에도 소복소복 쌓인다. 돌탑이 아니라 꽃탑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꽃핀 나무도 간절하게 빌어야 할 소원이 많은가 보다. 매일 오르내리는 길이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다. 동글납작한 돌 하나를 주워 탑에 살포시 올리고 합장한다.
두 번째 수필집을 엮고 지인들에게 책을 보낸 지 석 달이 넘었다. 그런데 오늘 지인이 보낸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투병 중이라 3년 동안 서울에 머물다 보니 이제야 책을 보게 되었다는 글의 서두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럴 수가! 자녀 삼 남매를 잘 키워 놓고 사업가 남편 따라 지방에서 지내며 행복해하던 그녀가 아닌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 남겨진 것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뿐이라고 했다. 유방암이 온몸으로 전이되고 지독한 항암치료에도 가느다란 희망은 없고 날마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마냥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처절한 순간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글은 눈물방울이었다. 마지막 소원이라면 팔월에 막내아들 장가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갔으면 편안히 눈을 감겠다는 문장에서는 그녀의 애절한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내게도 부디 건강 잘 챙기라고 당부까지 한다.
모든 문장에 그녀의 울음이 뚝뚝 떨어진다. 미처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그녀의 아픔에 동질감을 느끼는가. 단순히 환자로서의 연민이라기보다 한때 그녀와 함께한 세월과 추억 때문이 아닐까. 속이 뭉그러지도록 살아온 산벚나무처럼 그녀와의 과거를 공유해서이다. 전혀 남의 일 같지 않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소식에 가슴이 아려올 뿐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도 먹구름처럼 보인다.
빈빈 카페 데스크에는 청동으로 빚은 모자상이 있다. 목이 가녀린 아낙이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작품이다. 그 조각품을 매주 마주하지만, 오늘따라 특별한 감정으로 가슴에 와닿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반신에 풍만한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품에 아기를 안고 있으니 성스럽게 보인다. 한쪽 가슴은 아기가 물고 있고, 한쪽은 젖이 흘러내릴 듯 퉁퉁 불어있다.
백일쯤 되어 보이는 아기는 마냥 행복한 표정이다. 어미 품을 독차지한 아기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엄마의 은근한 미소를 내가 가진 언어로는 감히 서술할 방법이 없다. 저게 바로 모성의 참모습이구나 싶어 목에서 뜨거운 덩어리 하나를 꿀꺽 삼킨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면서 아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본다. 반질거리는 머리에서 따뜻한 체온이 이내 내게로 전해지는 듯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이 눈에 밟혀 죽을 수도 없는 것은 그 생명의 근원인 어미이기 때문이리라. 어미와 자식은 탯줄로 이어진 연이 아닌가. 억지로 끊을 수 없는, 몇만 번의 생을 겪고 나온 인연이지 싶다. 그래서 어미라는 존재는 자식 앞에서는 어떤 두려움에도 담대해지는 능력이 있고, 자식 또한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엄마 앞에서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의 문턱에서야 자신을 뒤돌아보는 그녀의 말이 나에게도 화두가 된다. 나 역시 지금껏 너무 아등바등 살았던 것 같다. 자식도 남편도 살림살이도 모두 내가 소유하고 집착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성찰이 뒤따른다. 죽음 앞에선 내려놓고 비우고 떠나야 하는데 그때를 알 수도 없거니와 그게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올봄은 유난히 산에 매료되어 이산 저산을 거의 매일 헤매고 다닌다. 누군가가 기별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차례로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자연의 섭리에 감탄하면서 나를 비춰보기도 한다. 진달래는 잡목 사이에 홀로 피었을 때가 더 귀하고, 야생화도 우듬지 사이에서 얼굴을 드러낼 때가 더더욱 청초하게 보인다. 잡초라고 관심도 주지 않았던 것들이 자기만의 색깔로 꽃을 피운다. 어떤 색채의 물감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오묘한 색이다. 그것들은 내 소유가 아니다 보니 자태도 곱고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나와 연을 맺고 있는 것들도 이처럼 조금 멀찍이 바라볼 때 더 진정한 참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에 이르더라도 저 낙하하는 꽃잎처럼 홀가분하지 않으랴. 그러고 보니 산을 오르는 이유를 찾은 것 같다. 나를 옥죄는 소유와 집착에서 나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다. 저 산벚나무처럼.
아직 이메일 답장도 못 했다. 빨리 쾌차하라는 일상적인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다. 어떤 위로의 말도 지금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산하면서 작은 돌 하나를 또 돌탑에 올린다. 살갑고 바지런하던 그녀가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만이라도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어본다.
산벚꽃 무심히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