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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겸손하게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자가 왕입니다.(마3:13-17)
2024, 6/9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3:13-17절 말씀으로“겸손하게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자가 왕입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지난주 날씨가 상당히 더웠습니다. 현충일에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 갔다 왔는데 마치 초여름처럼 더웠습니다. 그래도 여러 꽃들이 만발한 것을 보면서 힐링이 되었는데, 여러분도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시고 꽃도 보면서 한 템포 늦추어 마음의 여유도 찾고 힐링을 하셨으면 합니다.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자는 형제와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13절)
둘째로, 진정한 신앙인은 다른 형제를 세워주는 사람입니다.(13절)
셋째로, 하나님 나라에서 섬김과 다스림은 하나입니다.(17절)
사랑하는 여러분!!!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상대방 말을 잘 경청하며, 상대의 흠이나 단점들보다는 장점을 찾아 칭찬해주며 긍정적인 사고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대화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또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자기자랑이나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대화를 주로 하는데, 이런 사람의 대화는 보통 부정적이고, 상대를 세워주기 보다는 남의 약점을 대화의 소재로 삼거나 남을 헐뜯는 것이 대부분이라 기 빨린다고 해야 되나요?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이신지요? 우리 신앙인은 전자와 같이 상대를 세워주고, 긍정적인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런 겸손한 태도는 천국까지 이어지는데, 천국에 가면 우리가 왕 노릇은 하지만 천국에서 왕은 세상처럼 힘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닙니다. 사랑이 많고 겸손한 자들이 모이다보니 오히려 양보하고 섬기고 세워주는데, 그래서 천국은 섬김과 다스림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형제들을 섬기고 높여줌으로 왕 체험을 미리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따라가면서 형제를 세우고 높이는 게 왜 참된 겸손이며, 섬김과 다스림이 왜 하나인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자는 형제와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13절)
본문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아멘.
세례요한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사역을 시작했을 때 바로 그곳에 우리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살고 계셨는데, 이제 때가 되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먼저 세례를 받기위해 요한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주님이 얼마나 겸손한 분인지를 알 수 있는데 무얼 보고 그런 평가를 하는 걸까요? 우리 예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 인생 전반을 주관하시고 간섭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위해 그 먼 나사렛에서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베뢰아 지방까지 직접 찾아오셨다는 것이 바로 겸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세례요한도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분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고백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실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요14:9절에서 주님이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요8:56절에서는 4,100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4,100전에 태어난 사람이 2,000년 전에 태어난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2,000년 전에도 계셨고, 4,100전에도 계셨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요1:1절은‘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한낱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위해 왜 그 먼 곳까지 직접 오셨을까요? 세례요한을 불러서 세례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또 좁은 요단강이 아니라 멋지고 푸른 갈릴리호수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아주 특별히 주님만을 위한 세례예식을 별도로 거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세우고, 세상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더 부각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우리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먼 길을 걸어 친히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는 우리주님이 얼마나 겸손한 분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겸손이 무엇일까요? 겸손(謙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을 존중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겸손이 지나치면 자기비하나 굴종, 아부처럼 비칠 수 있는데, 진심으로 겸손하면 절대 그렇게 보여지지 않고 오히려 존경스럽게 보여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겸손보다는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데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돈이 있으면 돈을, 권력이나 명예나 학식이나 집안배경이나 가문을 들먹이며 특권을 누리려하고, 허세를 드러내는데,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 그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얼마나 겸손했으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우주만물의 주인이지만 몸소 세례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았겠습니까?
마11:28-29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우리 주님께서 겸손하신 분인데 그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이 겸손하지 못하여 형제와 이웃을 세우지 못한다면 이건 주님의 제자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제와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 부정적인 말과 형제를 무시하는 언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누가 모를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압니다. 내입으로 떠들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또한 알려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니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벧전5: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럼으로 여러분은 겸손하여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진정한 신앙인은 다른 형제를 세워주는 사람입니다.(13절)
본문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아멘.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해바다 바로 위‘벧아라바’까지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주께서 왜 그 먼 길을 걸어와 세례를 받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례요한을 세워주기 위해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은 당시 약 400년간이나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된 상태에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거침없는 말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던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이런 기이한 언행은 수많은 이스라엘백성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가 누구고, 무슨 자격으로, 누구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아 세례를 베푸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에게 와서 바로 이런 점들을 집중적으로 캐묻기도 했는데,(요1:19-25)
여러분!!! 전능하신 우리 주님께서 일부 백성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증명하여 그를 세워주기 위해서 그곳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하시는 중에 간간히 세례요한이 누구며, 그가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행했는지 말씀하셨는데,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구약의 엘리야선지자라고 말씀하셨고,(마17:12) 또 세례를 베푸는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셨는데,(눅20:3-8) 당신이 직접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임한 것임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인정해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집적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요한의 권위를 만방에 세워주셨고, 당신 또한 얼마나 겸손한 분인지를 온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이고, 이런 모습을 본받아 우리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과정에서 때로는 손해도 불이익도 감수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대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달라야합니다. 아니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는데, 나는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다고 한다면 이건 신앙과는 거리가 먼 행동입니다.
1996년 5월 23일,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철호대위의 귀순 동기는 부대식당에서 일하던 분의 8살 아들이 김일성전용 살구과수원에 들어가 뿌리 근처에 묻어둔 설탕을 파먹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것을 친한 동료에게‘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말했다가 그의 밀고로 14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700명의 동료 선후배들에게 너무도 혹독한 비판을 받고 일상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았는데, 3년 후에 다시 그가 집중비판 대상자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더 이상 못 버티고 귀순합니다.
북한은 1주일에 한 번씩 자아비판 호상비판이란 걸 하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잘못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비판해야하고, 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서 반드시 호상비판을 하는데 이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상호비판과 감시를 통해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믿지 못하게 함으로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게 뭉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런 불신이 얼마나 사람의 심성을 삭막하고 전투적이며 짐승으로 만드는지 모릅니다. 이건 사탄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런 공산사회주의는 사랑과 섬김과 용서를 말하는 기독교와 전혀 맞지 않아 기독교와 공산사회주의와는 공존이 안 됩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장악하는 곳마다 교회를 폐쇄하고, 교인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욱 사랑하고, 세워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섬겨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에서 섬김과 다스림은 하나입니다.(17절)
본문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오늘 이 말씀을 이곳에서 처음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선지자와 종들을 통하여 선포되고 예언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먼저‘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시2:7절의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씀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또‘내 기뻐하는 자’는 사42:1절의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이 말씀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종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이방인에게 정의를 베풀고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말씀드리지만 구약성경은 이 땅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구약의 예언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세상을 구원할 왕으로도 오셨지만, 남을 섬기는 종으로도 오셨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왕으로 오신 것은 신구약 전체에서 많은 언급이 있기에 생략하고, 마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 이렇게 종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왕이신 주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종들이 하는 일인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심으로 동시에 당신이 종이심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왕은 다스리는 사람이고, 종은 섬겨주는 사람으로 둘은 절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을 받는 왕이면서 동시에 남을 섬겨주는 종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둘은 절대 함께할 수 없지만 그러나 천국에서는, 하나님나라에서는 이 둘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왕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고, 반대로 남을 섬기는 자만이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나라는‘다스리는 자’와‘섬기는 자’가 하나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사고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건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는 다스리는 자와 섬기는 자가 분리되어있어서 왕은 남을 다스리고, 종은 평생 남을 섬기는 것만 생각하고 신천지교주 이만희는 그날이 오면 세계각처에서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싸들고 찾아와 자기들을 섬긴다고 괘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나라에서 왕은 곧 종이요, 종은 곧 왕이라는 사실은 기억하고 이 땅에서부터 종이 됨으로 왕이 되는 연습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절대 형제들에게 고개 숙이지 못하고, 섬길 수 없다면 왕이 될 자격도 누릴 권세도 없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므로 왕이면서도 섬김의 도를 다한 주님처럼 우리도 스스로 겸손하여 섬김의 도를 다함으로 왕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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