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의 죽으심 안에서 그와 우리가 하나됨의 진정한 의미는 한 번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예함의 더 깊이 감춰진 의미를 성령께서 나타내실 수 있도록
우리는 갈보리라는 이곳에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어야 한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영적으로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더 깊은 것들을 기꺼이 체험하고자 간절히 원한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을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자유케하는 진리는 곧 우리에게 밝혀질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관계있는 진리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그 자체가 우리에게 조화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결코 우리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진리이신 그분을 떠나서는 진리를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내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힘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며,
몇 년이 경과한 후에도 “자아”의 더 깊은 깊이를 발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또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냐 자기의 뜻이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 시키는 환경은 숨어있는 “자아”를 갑자기 드러낸다.
그들은 전에 전적으로 주의 것이며 “옛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옛 생명을 일깨우는 “본성의 수레바퀴라 불리는 것을 작동시키는 몇몇 숨겨진 속임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들의 ”자아 생명“의 은밀한 역사를 드러낼 때 그들은 새롭고 더 깊은 십자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더 깊이 동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더 깊은 깊이의 죽음 속에 자신들을 잦아들게 함으로써 더 높은 영적 생명의 차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깊은 차원으로 들어갔다 해도, 갈보리는
아직도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의 전혀 예측 못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 가운데 지정하신 곳이 자신을 맡기는 믿음의 행동에 의하여 단번에 차지하게 될 수도 있고, 신자가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구세주와의 더 깊은 교제 생활을 충당시키는 성장과정도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을 간절히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한다고 말했다(빌 3:10).
이런 모두가 복음의 위대한 역설 가운데 요약되어 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결코 이것은 개성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 반대다.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한 후에도 바울은 바울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서의 저 놀라운 선언 가운데서 그 점을 표현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내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기에 못박혀 죽었다.”
일단 십자가가 “나 중심의 삶”을 제거시켜 내 영혼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면,
개성은 그 모든 영광과 그 힘의 충만한 결실 가운데서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생의 최고봉이 될 때만이 우리는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결단을 존중하셔서 죄 사함까지도 우리의 결단을 따르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속에 상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죽음은 잠재적인 공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고, 개관적으로 완성되고,
성취된 지 오래된 일이다(우리는 그것을 이미 성취된 과거일로 간주한다. 롬 6:11).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우리가 믿음을 행사할 때에만 효과적으로 체험되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자신의 욕심을 실컷 채우며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가
아니면 자기 옛 생명에 대하여는 죽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기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실로 이보다 더 크고 영원한 문제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신을 여지없이 부서뜨리는 편을 택하게 하기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기꺼이 욕을 당하셨고, 죄인과 함께 하셨고, 조롱하는 폭도들 앞에서 그 저주스런 나무 위에 수치스럽게 못 박히셨다.
세상의 지혜가 사람에게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동의를 얻어낼 보다 더 확실하고
불가항력적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고전 1:23,2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심판을 유보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십자가 안에서 죽지 않고 옛 자아가 살아있으면
그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며 결과는 대개 지옥의 형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한 우리는 지적인 입장에서 일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영원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중간 과정”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로서 당신은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고 다시 선택하고 끈임 없이 선택하기를 계속하는 거룩한 신뢰 속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것을 가질 것인가? 보좌와 어린양으로부터 나오는 피, 생명강으로서 흐르는 신적 생명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생명을 거부해야만 한다.
당신의 생명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섬으로써 그것에서 당신을 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매순간마다 하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면 당신은 넉넉히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역할을 해내느라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신은 자신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대로 행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에겐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중대한 진리를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는 십자가가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50%의 구속의 은혜 밖에 누리지 못하였다.
교회는 기꺼이 주님과 함께 죽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자기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분깃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아직도 “육체와 세상과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법만을 모방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십자가에 깊이 참예하는 것을 빼놓고 부흥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의심스런 자들이 되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감히 부흥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자리를 폈는가?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당신은 그 죽음을 당신의 죽음으로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당신 자신과 죄의 몸 사이에 놓아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소위 육적 생명을 당신의 십자가에 못박힘을 기초하여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갈보리 언덕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야 된다. 매순간마다 “자아 생명”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어. 그의 이름으로 나는 자아 생명을 거절하노라.”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당신의 믿음에 증인이 되어 당신을 해방시키고 당신이 자유함을 누리도록 지켜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