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사도 바울의 못 박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는 것은 완전한 죽음이다. 자아가 1%도 살아 남아있지 않고 100% 죽는 것이다.
바울이 이 100% 죽음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바울은 대담하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바울은 3년 동안 심오한 명상을 했다(갈 1:16-19). 그는 다메섹의 회심과 같은 중차대한 일을 만났지만
혈육이나 선배 사도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사로잡혀 아무도 없는 아라비아로 갔다.
14년 후에야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나(갈 2:1), 사도들은 어떠한 빛도 그에게 주지 못했다.
그는 사도들보다 우월한 그리스도의 빛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교회와 이방인의 관계,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 신비한 “몸”의 교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 기독교의 보편성 등에 관한 통찰력, 믿음의 신비에 관한 통찰력 등은 누구보다도 깊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선두에 있었다. 선교사로서, 신학자로서, 설교가로서, 조직자로서, 그리고 성도로서 언제나 선두였다.
주님 이후에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진 이는 바로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육체를 따라서는 전혀 예수를 몰랐던 바울이 성령을 따라서는 그를 더 잘 알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삼층천에 사로잡혀 올라가 거기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
바울이 자기의 온 정신을 기울였던 중심 교리는 무엇이었던가? 이신칭의(以信稱義)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연구해보면,
사도 바울의 큰 자랑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와 함께 언제나 연관되는 십자가의 또 다른 국면이 있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이상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놀라워하며 주님의 말씀에 열중하고 있는 바울에게
우리 구주께서 깊이 새겨 주신 중대한 교훈같이 보인다.
이제 더 이상 바리새인이 아니며 사도 중 가장 큰 자가 된 그에게 펼쳐 보였던 것은 갈보리의 깊은 의미였을 것이다.
휘장이 걷히자 바울은 십자가에 숨겨진 비밀을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결코 단순한 모방이 아니어야 하며,
구세주의 죽음과 부활에 영광스럽게 참예하는 것이어야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요,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다.
그에겐 사는 것이 그리스도였다. 그는 자아는 하나도 가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가졌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죄를 짊어지웠을 뿐 아니라, 죄인에게도 역시 지웠다는 것을 알았다.
대 사도는 이처럼 철저하게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머리이신 주님과 모든 신자의 동일성은
죄와 부패한 “육적 생명”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탈출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의중에서 계획되어진 것이었으며,
구원의 특징에서 샘솟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동일시하였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겪는 자신의 고통을 갈보리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자신도 자기 자신을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하시고, 성육신으로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죽으신 자와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하셨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가 언제나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고후 4:11),
그 죽음을 단순히 소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바울은 그것으로부터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 나온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생명 – 하나님의 생명 –을 산출하는 우리 속사람으로부터
생명강이 터져 나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생명”에 대하여 죽을 때이다.
바울의 생각을 요약하면;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 죄란 우리가 대항하고 투쟁함으로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죄가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것이라면 오히려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죄로 물든 우리 육신 속에 자아가 박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수선하고 갈고 닦아도 가망이 없기 때문에 옛 사람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장사지낸 바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아의 죽음이 되시지 않는 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되실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예수님보다 세상사의 중심에 더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장에서나, 성전에서나, 가정에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또한 혼인 잔치에 참석한 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가장 빠르고 가장 깊은 삶의 물결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세상은 그리스도 이후로 많이 윤택해 졌으나 여전히 하나님께 대하여 적의(敵意)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교만을 통하여 역사하는 사탄은 여전히 이 세상의 신이다.
그리스도를 못 박은 정신은 아직도 세상에 만연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파심에 대하여 죽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막힌 담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로 이 담을 헐어서 “둘을 한 새 사람으로”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똑 같다.” 파벌 의식에 깊이 사로잡히는 것은 비기독교적이다.
모든 분열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에 대한 방대한 책임을 가진 세계 시민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분열하는 마음에 대하여 죽었다.
우리는 인간애(humanity)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실 수 없다.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롬 7:4). 그리스도는 우리를 “육적 생명”에서 끌어 올렸고
우리가 참예하고 있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영역에서 우리를 깨끗이 벗어나게 하셨다. 우리는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다.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붙들어 매는법이고, 은혜는 완전히 자유케하는 법이다.
자유, “육적 생명”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이라는 폭군으로부터의 자유,
“자아”라는 무시무시한 괴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 그렇게 자유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