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12지파(7)
창49:14~15
원래 야곱은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을 머슴살이 했습니다. 그러데 외삼촌에게 속아 첫째 딸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고, 결국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자그마치 14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레아는 4명의 아들을 낳은 후 생산이 멈추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 라헬은 자기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 둘을 받아냈는데 이름을 “단”과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단”이란 내가 언니를 “심판했다”는 뜻이고, “납달리”란 언니와 경쟁에서 “내가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러니 레아가 열 받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레아도 자기 몸종을 남편에게 줘서 역시 아들 둘을 받아냈는데 이름을 “갓”과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갓”은 “행운”이란 뜻이고, “아셀”은 “복되다”는 뜻입니다.
이때쯤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장성하여 철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까 항상 어두운 거예요. 그 이유는 아버지가 도무지 어머니 장막에 오시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어머니의 몸을 살릴 약초를 캐기 위해 온 들을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효자지요.
노력한 보람이 있었던지 어느 날 홥환채라고 하는 약초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심마니들이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 심봤다!”라며 소리치잖아요. 르우벤도 합환채를 캤을 때 “합환채를 캤다! 합환채를 캤다!”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 집으로 뛰어왔던 것 같습니다. 레아가 르우벤이 주는 합환채를 가슴에 품고는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했을까요? “얘야. 네가 어떻게 이런 일을 다 했냐. 장하다. 장하다” 이러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님께서 두부 한모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두부 한모 사고 남는 잔돈은 네가 가지라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당시에 용돈을 만져보는 날은 설날과 추석 때 외에는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용돈이 생긴다는 기쁨에 발걸음이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두부 한모를 산 후 용돈이 생겼습니다. 그 돈으로 뭘 샀을까요? 사탕을 샀을까요? 과자? 구술? 아니었습니다. 파 한 단을 샀습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려고 파 한 단을 산 거예요. 제가 집으로 가서 두부와 파 한 단을 내밀자 어머니는 눈을 둥그렇게 뜨시면서 “아니 네가 어떻게 이런 일을 했냐? 어떻게 이런 일을 했냐?”며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합환채를 캤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였을까요? 그때까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던 라헬이었습니다. 합환채를 캤다는 말에 라헬의 심장은 쿵쾅! 쿵쾅!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건 내가 먹어야 해! 내가 먹어야 해!~”
그리고는 언니 장막으로 뛰어갔습니다. “언니! 언니! 그 합환채를 내게 줘. 그러면 그이를 언니 장막으로 보내줄게! 정말이야!” 레아는 야곱을 자기 장막으로 보내주겠다는 라헬의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남편이 자기 장막에 안 온 지가 너무 오래되었거든요. “OK!” 그리고는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야곱이 레의 장막에 오자마자 레아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합환체를 먹지 않고도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10년 만에 임신한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는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지었습니다. 잇사갈이란 “값을 치르고 얻었다”는 뜻입니다.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고 이 아들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완전히 공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그분의 대속의 피 값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교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복도 함께 받는 줄로 오해하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구원은 공짜지만 복은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은 어떻게 받습니까? 값을 치르고 받습니다. “잇사갈”입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창12:3을 보겠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니 이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런 축복을 받은 사람은 세계 역사에서 아브라함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공짜였습니까? 아닙니다. 대가를 치르고 얻은 복이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얻었습니까? 창12:1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고향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고대시대 때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되면 거의 거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짐보따리와 아내까지 빼앗기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하나님! 제 먹을 것 책임질 거예요? 제 아내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거예요?” 이렇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창12:4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이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묻고 따지는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그다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거예요. 즉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값을 치르고 얻은 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구원은 공짜로 받습니다. 그러나 福은 공짜가 아닙니다. 값을 치르고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