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2월 8일 대한매일신보는 잡보란에 ‘불교당 건축’이라는 짤막한 단신을 싣고 있다. 그 내용은 동대문 밖의 원흥사에서 종무원 소속 불교당을 중부 사동에 건축하기로 내부에 청원하여 인허를 받고 3월에 역사를 시작한다는 소식이다. 전국 사찰이 이에 호응하여 2000여석의 백미 연조(捐助)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회광
그해 4월 이회광 등 승려 수십인이 원흥사에 모여 불교비용 30만환의 수렴에 대해 논의하였다. 박동(현재의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근처)에 있는 동녕위궁을 3000환에 사서 불교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강원도 각 사찰에서 일금 6000환을 모으고 삼남의 각 사찰에서 백미 1000여석을 보탰다. 이렇게 세워진 불교당이 서울 사대문 안에 처음 세워진 각황사이다.
1910년 일제 강점을 앞두고 종로 한복판에 등장한 이 불교 사찰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오랫동안 탄압을 받으며 산중에 은둔했던 불교가 비로소 사회의 표면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개항 이후 일본 불교가 유입되면서 국내의 승려들을 포섭 또는 개종시키기 위한 계략과도 맞물려 있다. 1895년 4월 조선시대 불교 탄압의 상징이었던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를 해제한 것은 갑오경장 직후 일본이 조선 불교도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불교 배척이 완화되면서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가 세워져 전국 사찰을 통할하는 총본산이 되었다. 그리고 1903년 궁내부 소속으로 관리서를 설치하여 전국 사찰을 총괄하게 되면서 불교가 실질적으로 공인된 셈이다.
서대문안에 처음 세워진 불교당 각황사
1906년 2월 봉원사의 승려 이보담과 화계사의 승려 홍월초 등은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설립하고 정토종을 종지로 삼고 전국의 사찰들을 통합하는 한편 명진학교를 세워 승려 교육에 앞장섰다.
1908년 3월에는 전국의 유지 승려들이 원흥사에 모여 새로운 종단을 세우기로 하고 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정했다.
그리고 불교계의 숙원 사업인 4대문안에 사찰을 창건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드디어 1910년 5월 각황사가 세워졌던 것이다.
각황사는 조선불교중앙회소 겸 중앙포교소로 운용하기로 하였으나 원흥사의 원종 종무원도 각황사로 이전함으로써 각황사가 조선불교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은 대종정으로 추대된 뒤에 각황사에서 원종 종무원 설립을 정식으로 신청하였지만 이해 8월 일제 강점으로 끝내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승려의 출입조차 금지됐던 경성의 한복판에 세워진 각황사는 이회광의 친일행각으로 일부 그 의미가 퇴색되기는 하였으나 한국 근대 불교종단의 새로운 건립 주체가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쩨 강점기 대중 포교의 중심이 되었던 각황사는 1938년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를 옮겨지을 때까지 그 역할을 계속하였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