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일 오후 1시에 졸업식을 거행하는데 졸업생은 염직과 8명 도기과 9명 금공과 7명 목공과 7명 응용화학과 3명 토목과 12명인데, 전습소 소장이 증서를 수여한 후 내빈 및 학도를 대하여 전습소의 역사 및 학생의 전도를 설명하고…."(황성신문 1909. 4. 21.)
국내에서 최초의 근대적 기술교육기관인 관립공업전습소 제1회 졸업식 장면이다. 졸업식에는 농상공부대신과 차관뿐 아니라 총리대신과 학부대신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으며 졸업식 후에 내빈들은 전습소 내 작업장을 순람하였다. 학생들은 내빈의 관람을 위하여 그동안 배운 것을 시범하였는데 그 민첩한 바가 가히 장차 공업계에 모범이 될 만하여 관람자 중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0년 전 대한제국은 식산흥업정책의 일환으로 상공학교를 설립하였다. 상공학교는 예산이 편성되지 않아 학생모집도 하지 못한 채 명맥만 유지하다가 1904년 농상공학교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80명의 입학생을 선발했으나 이듬해 18명, 그 다음해는 15명으로 감소하고 졸업생을 배출하지도 못하였다. 과학기술 교육을 위한 한국인 스스로의 노력은 시작되었지만 우여곡절로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통감부가 설치되고 공업고문인 공학박사 히라가(平賀義美)의 안에 따라 농상공학교의 공업분야는 공업전습소로 개편되어, 1907년 4월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과 내외국 고등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개교식이 있었다. 소장에는 군마(群馬)현 공업시험장 소장을 역임한 노다(野田忠藏)가 청빙되었고 일본인 교관들이 부임하였다. 한국인 교관으로는 농상공학교 때부터 근무한 안형중 등 몇 사람이 있었으나 재직기간이 길지 않았다. 1908년 준공된 본관(현 한국방송통신대학 구내 위치)은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건물로서 당시 건축된 목조건물로는 유일하게 현존한다.
공업전습소 본관(현 한국방송통신대학 구내 위치).
일제는 공업전습소를 일본의 동경고등공업학교와 다름없는 한국에서 유일한 고등공업교육기관이라 선전하였지만, 사실은 일본의 직공학교와 같은 단기 실습 위주의 공업전습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근대기술교육에 대한 욕구는 강하였다. 제1회 50명 모집에 지원자가 1200여명이 몰렸고, 2회에는 80명 모집에 2000여명, 4회 때는 55명 선발에 2500여명이 응시해, 지원자는 갈수록 불어났다.
학생들은 국내에서 공업기술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인물들로서 선구자적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공업제품에 관한 기술을 익혀 국부민강(國富民强)을 이뤄 독립을 회복하려는 취지로 '공업연구회'를 창립하고 최초의 전문잡지인 '공업계'를 발간하였다. 황성신문은 이런 열의를 높이 칭송했다.
"학생이 모두 열심히 수업하여 불철주야하는 상황이고, 또한 단합하여 공업연구회를 조직하여 매월 제1·3 금요일 밤에 개회하고 서로 토론하여 지식을 교환하며" "금일 공업전습소의 정도(程度)가 실업계의 새 빛을 비추었으니 오로지 국민동포는 이를 보고 느껴 사고력과 경쟁심을 분발하여 각종공업의 연구와 진취를 이처럼 도모하고 힘써 민산을 풍부케 하며 국력을 부강케 하는 목적에 달할 수 있기를 크게 옹축하노라"(1908.10.18. 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