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202. 묵상글 들 ( 주님 봉헌 축일. - 남 탓 하지 말고. 등 )
오늘 축성 생활의 날, 집전하신 신부님이 왜 수도사제로 성소를 받았는지에 대한 강론을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cpbc TV. 매일미사
2022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축성 생활의 날) 매일미사
한장호 베네딕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집전
https://youtu.be/5RmUVK27g80 34:46
신부님의 강론 13:25부터 20:58 (7분 33초) 까지입니다.
====================================================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남 탓 하지 말고.
요즘 수도원 성소자가 점점 줄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젊은이가 수도 생활이나 봉헌과 다른 가치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즘 젊은이들이 점점 보수화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고,
사회 정의보다는 공정을 더 중요시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공정도 나의 이익이나 불이익과 관련된 공정에 민감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전의 젊은이보다 더 행복한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불행하고 불쌍합니다.
젊은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어른인 우리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 시대 곧 신자유주의시대의 그 악마적인 정신이
우리 어른들도 모르게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키우게 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이기주의적으로 남용하게 만들고,
쾌락과 욕망을 정당화함으로써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하는 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게 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재미가 중요하지 의미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것을 수도 생활 곧 봉헌 생활과 하나하나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수도 생활/봉헌 생활은 복음적 권고를 사는 것이고,
복음적 권고를 사는 것은 복음의 행복을 사는 것인데
복음적 권고 중에 가난이 먼저 신자유주의와 충돌합니다.
왜냐면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소유욕을 부추기고 소비를 부추깁니다.
신상품과 계속되는 광고가 우리를 소유하고 소비하라고 쇠뇌합니다.
그래서 왜 가난을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게 하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며 가난을 살 마음을 없앱니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의 근본 신조가 자유 곧 개인의 자유이기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순종은 가난보다도 더 살기 어렵습니다.
자유로이 자유를 봉헌하는 사람만이 순종을 살 수 있는데
자유로이 자유를 봉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결과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욕망을 정당화하고 쾌락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가 정결을
의미있다고 할 리 없고 사랑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사랑마저 자기중심적으로 하게 하고 이기주의적인 사랑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사랑도 받을 사랑만 있지 줄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 생활을 하려고 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와 탓을
신자유주의에 모두 돌리고 저희가 잘못 살아서 이렇게 된 것을
책임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수도 생활을 하기에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지원자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젊은이들이 감동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 잘살았어야 했고
그 삶이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줬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에 오신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실까요?
그러므로 시대를 탓하기보다
감동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저희 자신을 탓하고
주님의 봉헌에 비추어 저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라삐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매온이 찬미합니다. 이 찬미를 흔히 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릅니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주며,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풀어주셨다’, ‘쉬게 하다’, ‘죽게 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주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다른 민족들”에게도 “계시의 빛”이 비추심을 말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일어나고” 곧 구원되고, 그렇지 않는 이들은 “쓰러지고” 곧 멸망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축복이 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림의 기쁨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가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주님께서 모든 민족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가경자 최양업신부님은 “나의 소망은 주님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 사십 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정한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신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께서는(레위 12,1-8), 아브라함 이래 지켜온 관습과(창세 22,1-18) 모세가 정한 대로(탈출 13,2) 첫 아기인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때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가난해서 비둘기 한 쌍만을 예물로 바쳤으나, 사실은 평생동정의 허원도 바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출가하신 후에 당신 대신 어머니를 봉양해 드린 친척 형제들이 있기는 했으나 친동생은 없었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연로하신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겨드려야 했습니다. 신성의 차원에서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로서 동정의 몸이었던 마리아께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고 또한 인성의 차원에서도 구세주께서 태어나시리라고 예언된 바 있었던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므로,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구세주에 걸맞는 품위와 품격으로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평생동정이라는 귀하디 귀한 봉헌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바친 비둘기 한 쌍과 평생동정이라는 봉헌을 본받기 위해 초를 봉헌합니다.
초는 자기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자신을 봉헌하는 뜻으로 초를 봉헌하는 주님 봉헌 축일의 백미는 수도자들의 서원 예절입니다. 수도자들의 삼대 서원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온전히 자기자신을 봉헌하기 위한 복음삼덕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자들의 서원 예절을 보면서 예수님의 삶과 신앙과 진리가 복음삼덕에 녹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고, 이를 믿고 따르려는 교회의 신앙은 공동체를 위한 십자가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없거니와, 공동체가 아닌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에서는 십자가가 생겨날 수도 없고 생겨난다고 해도 피하면 그만입니다. 또한 부활 신앙이 아닌 그 어떤 다른 목표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목표가 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이야말로 이미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부활의 삶인 까닭입니다.
오늘 수도자로서 첫 서원을 발하는 수련 수녀들은 복음삼덕에 따라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서원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라는 구체적인 수도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께 봉헌하게 됩니다. 첫 서원을 발함으로써 여러분은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십자가의 고통도 받겠지만 부활의 기쁨도 아울러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미래에 주어질, 그래서 막연한 부활의 희망으로 힘겹게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현재 부활의 기쁨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가벼운 짐으로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30).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특히 당신을 직접 닮고자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더욱 적중하는 말씀이고, 오늘 복음삼덕의 서원을 하는 수련 수녀들과 이미 서원한 수도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언젠가 주어질지 안 주어질지 모르는 미래의 부활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기서 먼저 주어지는 부활의 기운으로라야 능히 짊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정결의 서원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처럼 평생동정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성적 본능을 포기하고, 배우자 관계가 주는 평생의 위안도 포기하며, 자신을 닮은 자식을 두지 않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신에, 같은 수도 공동체의 회원들을 평생의 형제로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따라서 수도 공동체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시련은 형제애를 발휘함으로써만 이겨낼 수 있을 것이요, 형제애로써가 아니라면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물론 형제애가 충만한 공동체에서라면 수도생활은 이미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의 진복팔단을 가득히 누리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부부생활과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의 삼중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형제애가 충만한 수도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통해서 부활의 희망과 천국의 기쁨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혼인하지 않고도 기쁘게 살아가는 수도생활은 서원한 수도자들의 신앙적 의무입니다.
두 번째로, 청빈의 서원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비둘기 한 쌍을 봉헌 예물로 바친 것처럼 가난한 생활을 자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보통의 유다인 부부들은 일 년된 양이나 염소를 바치곤 했습니다(레위 1,10). 빈손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탈출 23,15; 34,20; 집회 35,6). 인간은 누구나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면서 복지를 누릴 권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제한당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역사 이래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최소한도의 물질만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면서 더 필요한 이들에게 그 복지가 돌아가도록 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청빈의 서원은 단지 검소한 생활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연대해야 할 의무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도 가난하게 사셨으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행한 행동 여하에 따라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모든 재물과 나눔의 노력은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도록 하느님께서 섭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행하는 봉헌과 나눔의 노력으로도 세상의 가난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역사의 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재물로, 우리에게 허용된 인생의 시간에 가능한 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세상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어려움이 덜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큰 범위에서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요청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정치적 애덕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듭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청빈의 서원은 건전한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반드시 요청합니다.
세 번째로 순명의 서원은 요셉과 마리아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전갈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태도에 기인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동정의 몸이었지만 구세주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전갈을 듣고 나서,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주소서”(루카 1,38) 하고 순명하였으며, 요셉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파혼할 결심을 굳혔으나 잠자리에 찾아온 천사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내로 맞아들이라”(마태 1,20)는 말에 순명하고 평생 마리아와 예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부모의 이런 영성은 아들 예수에게도 고스란히 대물림되었고,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써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지니시게 된 후부터는 더욱 철저해져서 하느님과 한 몸처럼 공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만을 전했고, 그분의 힘으로만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그분의 섭리대로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순명의 서원은 예수님의 부모와 그분을 더욱 닮기 위하여, 앞선 두 가지 서원을 담보하고 공동체의 복음적 질서와 부활 신앙을 앞당기는 교회적 질서를 위해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공동체와 부활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명의 대상인 장상은 개인이 아니며 공동체 질서의 권위를 대변하는 존재인 것이며, 공동체 질서는 하느님의 영광과 뜻을 향해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장상은 자신의 취향이나 권한이나 관심에 앞서서 하느님의 뜻은 물론, 공동체의 필요와 사명과 질서를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묻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로 응답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발하는 장상의 의견은 공동체의 의견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꺼이 그에 대해 순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가톨릭 윤리신학에서는 자유의 윤리라고 말합니다. 무릇 모든 자유는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책임이란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기 위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물론 당신 자신도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신 이유도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순명은 복종이 아니며 순명 서원은 자유에의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삼년 동안 사도로 양성하시고 당신 자신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교회는 숱한 시행착오와 깊은 사색과 숙고를 되풀이하여 그분을 따르는 길을 복음삼덕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세에서는 박해를 방불케 할 만큼 커다란 십자가이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하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복음삼덕의 삶은 성직자에게든 평신도에게든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나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아가거나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나, 공동체의 삶이면서 부활의 삶으로 인식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누구의 배우자이거나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모두를 사랑하고자 끌어안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고,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될 수 있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며, 철저하게 장상의 결정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철저하게 하느님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삶은 늘 새로운 시작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으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결혼으로 처녀·총각의 삶이 끝난 것 같지만, 가정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정년퇴임, 은퇴 등으로 사회생활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새로운 삶인 인생 2막의 시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작과 끝은 늘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끝을 보면서 절망과 좌절을 하고, 누구는 시작을 바라보며 희망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망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끝’이라는 체험을 하게 될 때, 새로운 ‘시작’의 희망도 맞물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도 분명 희망이 맞물려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사제 연피정에서 피정 지도를 해주셨던 주교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오면, 눈을 감고 울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 하느님의 선물도 같이 오기에 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봐야 합니다. 눈 감고 울다가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슬피 웁니다. 그러나 울 때가 아니라 선물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봉헌 축일을 오늘 보냅니다. 이날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 예언자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한나 예언자를 만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며 큰 기쁨을 표현했고, 한나 예언자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인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말씀이 실현되었음을 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세의 점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두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선물이 이 땅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계속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어쩌다 기도하고 어쩌다 성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늘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기에 큰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간에 자유의 공간을 인정하고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류해욱).
---------------------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오늘을 축성생활의 날로 정했습니다. 하느님께 가난, 정결, 순명을 서원한 수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교회는 오늘 1년 동안 제단에서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예전에는 초를 많이 사용했지만 전등이 발명되면서 요즘은 가정에서 초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례 때, 미사 때, 기도할 때 우리는 초를 사용합니다. 단지 어둠을 밝히는 용도라면 더 이상 초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톨릭평화신문의 심리여행에 기고하신 수녀님의 ‘촛불 명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묵상하기에는 좋은 글입니다.
“미사나 전례 때에 초를 켜는 이유를 생각합니다. 첫째 이 초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자신을 태워서 세상에 빛을 주신 구원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둘째, 나 자신을 의미합니다. 나를 태워서 주변을 밝게 하라는 사명입니다. 셋째, 이 불꽃처럼 뜨거운 기도가 되어 하느님께로 올라가기 위함입니다. 천천히 타고 있는 심지, 뜨겁지만 묵묵히 자신을 죽이고 몰래몰래 눈물짓는 촛불을 바라보노라면 한평생 자녀들을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살라진 노모의 주름진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종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도 켜기 전에는 초가 아닙니다. 초는 켜서 달아 없어져야 합니다. 삶은 무엇인가? 타인을 위해 살라지는 한 자루의 촛불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남김없이 살라져 없어지면서도 주변을 밝혀주기 위해 불타는 초의 사명,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기 위해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촛불을 통해 내 안에 임재하시는 그분을 느끼며 세상 곳곳에 온기를 전하라고 속삭이고 계신 주님입니다. 지금도 마음의 추위, 영혼의 추위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이 빛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촛불 같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촛불같이 소리 내지 않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어둠을 원망하지 않고 그 어둠을 밝히는 한 자루 촛불이 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오늘도 이른 새벽, 어둠이 맴돌고 있는 대지 위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손이 그립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은 더욱 밝고 따뜻해 질 것입니다.
기도는 성취되고 있는 희망입니다. 낙담한 사람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희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힘을 확신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자신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선과 권능을 희망합니다. 기도는 성취되고 있는 희망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오늘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을 들어 올려 축복한 사람은 언제나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예수님을 축복하면서 시메온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솔직하게 아프다고, 원망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신앙이 있는 곳에, 당신의 몸을 성체의 모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나의 원망과 실망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봉헌은 나의 삶을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봉헌축일을 지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乾(납거성회루시간)” 뜻풀이는 이렇습니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그친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봉헌 삶의 축복 -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특별히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또 주님 봉헌을 기리며 우리의 봉헌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는 날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봉헌의 삶에로 불림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믿는 이들의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바로 봉헌 삶의 축복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하신 그분께 대한 봉헌의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수차례 인용했던 아주 예전에 써놨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라는 자작시입니다. 바로 봉헌의 열망을 표현한 글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 역시 봉헌 열망의 표현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사는 정주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마디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가 바로 봉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봉헌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자발적 삶의 표현이 봉헌입니다. 그러니 참 기쁨은 봉헌의 기쁨이요 참 행복은 봉헌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고귀한 축복의 삶이 봉헌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봉헌 삶의 모범을 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칩니다. 율법에 따라 산비둘기 한 쌍과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도 제물로 바칩니다. 이런 율법 준수의 삶을 통해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봉헌의 삶에 충실한 예수님의 부모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루살렘의 시메온과 한나가 봉헌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둘다 주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살았던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전형입니다.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이었습니다. 이런 봉헌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던 시메온 위에는 늘 성령께서 머물러 계셨다니 그대로 봉헌 삶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고 마침내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고, 오매불망 그리던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봉헌의 삶에 충실하던 시메온이 봉헌되신 주님을 성전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대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라는 말라기 예언의 실현입니다. 성전에서 구원자 아기 예수님을 만나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메온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대로 봉헌 삶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잠자리 들기전 시메온과 함께 끝기도때 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노래하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봉헌의 삶에 충실하던 시메온이 봉헌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봉헌의 삶이 아름다운 노년을 보장합니다. 수도자, 사제는 물론 주님을 믿는 모든 분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단 하나, 각자 주어진 봉헌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시메온에 이어 한나라는 예언자도 봉헌 삶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봉헌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시메온과 한나의 모습이 우리를 마냥 부끄럽게 합니다.
‘한나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한결같이 봉헌의 삶에 충실했던 한나는 정주 영성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만난 한나도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해 전해 줍니다.
참 좋은 모범이 아름다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도 보고 배웁니다. 수도자들의 봉헌 삶의 모범이 신자분들에게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의 부모인 요셉 마리아의 봉헌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부모의 모범과 더불어 하느님의 총애가 늘 함께 했음을 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기 예수님뿐 아니라 봉헌 삶에 충실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이런 봉헌 축복을 깨닫는 다면 찬미와 감사의 응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총애寵愛를 받을 때 이웃 형제들을 두루 사랑할 수 있는 겸애兼愛가 자연스럽게 뒤따름을 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를 입증합니다. 겸애兼愛야 말로 총애寵愛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생명, 봉헌의 향기, 봉헌의 빛,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지혜, 봉헌의 자유, 봉헌의 충만, 봉헌의 총애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의 삶자체가 우리 삶의 모두이자 의미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인간 품위를 지켜주는 봉헌의 삶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한결같이 봉헌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봉헌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의 관례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첫아들로 태어난 그 갓난아기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특별한 존재였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맏아들, 가축의 맏배, 햇곡식 등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것들을 주님께 바치도록 규정하는데
(탈출 13,2; 레위 23,10 참조), 이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가장 좋은 것을 내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봉헌합니다.
성전에 등장하는 나머지 두 인물도 자기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였던 이들입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곧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될 구원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의롭고 독실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나도 마찬가지로 과부로 지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값진 보상을 얻게 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시메온과 한나처럼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약한 수도자들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봉헌된 이들의 숭고한 삶에
깊은 존경과 기도를 드리면서, 아울러 우리 각자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봉헌할 수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주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구원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 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된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봉헌이 일상이며
봉헌이 우리
생활이 되어야합니다.
봉헌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됩니다.
함께 하는
믿음이 진정한
봉헌입니다.
흐트러진 우리 삶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봉헌입니다.
삶의 모든 배경이
되어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봉헌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봉헌 안에
존엄함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를
정화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봉헌으로 당신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헌으로
모인 공동체가 바로
수도 공동체입니다.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봉헌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속에 있는
우리를 봉헌이
주님께로 데려갑니다.
가야할 길을
아름답게 하는
봉헌이 있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은 모든
일상임을 믿습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첫아들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2).”
‘짐승의 맏배’의 경우에는 실제로 죽여서 제물로 바쳤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실제로 바친 것이 아니라, ‘은 다섯 세켈’을 바쳤습니다(민수 18,15-17).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은,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그러나 아들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탈출 13,14-16)”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 몫으로 돈을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친 것처럼(1사무 1,28),
예수님을 직접 하느님께 봉헌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봉헌을 겉으로만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일로 보이지만,
‘믿음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갓난아기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질문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라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시고 메시아가 되신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그때 ‘시작’되어서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부활과 승천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이야기’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6-27)”
여기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신 것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합니다.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서 파는 평범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나의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바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헌금’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원래 이 말은, ‘불우이웃 돕기 성금’에 관한 말인데,
봉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형편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이 바치는 것,
그리고 부담스러워하면서 억지로 바치는 것은 올바른 봉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착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봉헌의 모범’으로 자주 언급되는 ‘가난한 과부’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께서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라고 그 과부를 칭찬하셨는데,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바친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모두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말로 예수님 말씀을 풀이하면, 부자들은 풍족하게 살면서도
얼마씩만을 억지로 낸 사람들이고, 그 가난한 과부는 궁핍하게 살면서도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기쁨으로’ 바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봉헌에 관해서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어떤 물질적인 것을 많이 바치기를 우리에게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제물과 헌금을 많이 바치는 것은,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것과 같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봉헌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1요한 4,20).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이웃을 섬기는 일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과 이웃에게 사랑 실천을 하는 것은
함께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꺼이 모두를 되돌리는 아름다운 봉헌♣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오늘은 성모님과 성 요셉이 40일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율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봉헌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의 숨결을 거저 부어주시는 주님께서 봉헌되신 이 거룩한 날 나의 봉헌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봉헌은 예수님의 봉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손에 의해 봉헌되셨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며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세례나 수도축성, 사제 축성을 통하여 삶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한 봉헌된 사람답게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봉헌의 목적과 방향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며, 내 이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선(善)입니다. 봉헌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입니다. 많은 기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며 자신의 업적인양 자랑하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봉헌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하느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서 실행하는 것이 봉헌을 사는 이들다운 삶의 방식입니다.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 3,3)는 말씀처럼 늘 대가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의롭게 봉헌해야 합니다. 필요하고 다급할 때만 주님을 찾고 이용하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 전부를 내놓으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봉헌 또한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기꺼이 되돌려야 하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에 그것을 남김없이 되돌릴 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봉헌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시메온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인데(2,34), 그분과 함께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밑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의 봉헌은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전인격적이며 항구하게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맡긴다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사랑과 선을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배타적으로 유보하는 것입니다. 봉헌이란 그렇게 내 삶을 생명이요 의미이신 그분께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봉헌이란 하느님을 얻기 위한 과정이요 그분과 일치하기 위한 필연적인 길입니다.
봉헌의 삶을 사는 자세는 충실하고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던”(2,25) 시메온과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2,37) 한나와 같은 자세야말로 봉헌을 사는 이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지극정성으로 봉헌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축일에 불의와 고통, 차별과 비참함이 넘치는 세상 한복판에서, 기꺼이 자신 전부를 사랑으로 되돌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봉헌의 삶을 더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살아내도록 다짐해야겠습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수도자 충만한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설날 아침 미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세상에!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사가 그렇듯이 기쁨과 환희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잠깐의 눈요기가 끝나고 길고 긴 수고의 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떡국 한 그릇 후루룩 초스피드로 흡입하고 나서는 곧바로 전투 복장을 하고 제설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세상 좋아져서 강력한 송풍기를 등에 메고 하루 온 종일 이곳저곳 눈을 치우고 또 치웠습니다.
새해 첫날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저 순백의 눈처럼 다들 깨끗하고 순수해졌으면, 구리지 않고 솔직담백해졌으면, 잔머리 굴리지 않고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오늘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한국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말씀대로 수도자들은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 만큼 잘 존재(Well-Being)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계시며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바로 축성생활자들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축성생활자들은 모든 일에 앞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잘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수도생활, 과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수도생활에 대해 나는/세상 사람들은/주님께서는 정녕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도자들의 현존에 대해 정녕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는가? 수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수도자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반대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야? 수도자가 저래도 되는거야?’라며 충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4~50년전, 한해 입회자가 4~50명씩 되던, 그래서 침실이 부족하던 수도 성소의 호황기 시절을 그리워며,‘라떼는 말이야!’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오손도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면서, 수도원 담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잘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수도 규칙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가난한 이웃을 향한 개방과 환대, 나눔과 헌신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큰 도전 앞에 서 있는 축성 생활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회복시키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들 한분 한분의 내면에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각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적 현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입니다.
어쩌면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수도자 한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신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
2220202 주님 봉헌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봉헌된 이들, 특별히 수도자들의 봉헌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자녀를 봉헌하는 전통’입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전통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자녀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고, 또 12~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며 완전히 주님 것으로 내어드립니다.
우리도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그리고 견진성사가 있기에 이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부모의 정신과 우리 신앙인의 정신은 자녀를 봉헌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봉헌하면서 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칩니다.
이 제물은 가난한 가정이 자녀 대신 바치는 것인데, 이 제물들은 다 죽임을 당해 주님께 불살라집니다.
이 제물이 불살라질 때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주님께 봉헌된다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권리를 ‘나의 것’으로 절대 여길 수 없게 됩니다.
조선 시대, 효종 임금의 친척 중 ‘덕원령’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國手)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습니다.
덕원이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마치 심심하던 차라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첫 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 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습니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습니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아이, 이 사람아.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렸지만, 그 사람은 정색하며 고집하였습니다.
“나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와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습니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덕원령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상대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하고 제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에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바둑을 잘 두는 것이 ‘지식’이라 하면, 그 바둑을 지면서까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지략이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이 성장은 분명 아드님의 봉헌과 관계가 있습니다.
봉헌은 성장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만드는 고치를 봅시다.
그 고치의 크기는 그 안에서 자라는 나비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그 고치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고치 크기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부모에 의해 정해집니다.
부모가 심할 경우 그 경계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는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어도 실제로 상처받은 아이로 남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를 봅시다.
히틀러는 아버지로부터 강요와 체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경계선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를 히틀러는 감히 누가 자신을 건들려고 하면 굉장한 화를 낼 것입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계는 무시할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계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은 자기 속으로 더 들어가고 남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관계 불능의 상태로 성장합니다.
그 경계를 엄청나게 존중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과잉보호입니다.
문제는 그 크기가 너무 좁고 두꺼워 숨 막혀 죽는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엄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딸’이란 내용이 있었습니다.
배우 출신 재무 설계사 여현수 부부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혼자 샤워를 하겠다고 하자, 예의 주시하다가 결국 도와줍니다.
머리를 말리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자려고 할 때 자다가 오줌을 쌀까 봐 아이도 불안하고 엄마도 불안합니다.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기도하고 자고, 엄마는 결국 아이가 잠들기 전에 올라가 화장실에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범위를 엄마가 막아버리는 행위입니다.
자라면 마마보이, 마마걸이 됩니다.
아이는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존감 낮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더 성장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아들을 살찌우고 성장시킬 수 있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고치의 크기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크기로 커집니다.
tvN ‘고스트 닥터’에서 정지훈은 실력은 좋지만 남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인 천재 의사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사고가 나서 코마 상태로 빠지고 영혼이 병원을 마구 돌아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버릇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보게 되며 서로 성장해가는 내용입니다.
유령이 된다는 말은 지금의 껍데기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니 자신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했던 일들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변해온 모습까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줄 알게 되고 점점 착한 의사가 되어갑니다.
성장은 이렇게 이뤄집니다.
부모가 아이를 자기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그 틀을 깨고 더 넓고 큰 고치 안에서 성장하게 해야합니다.
그러려면 탄생과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 포함하는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녀가 믿게 하려면 부모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둑에 져서 맡겨놓은 말처럼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건들지 말고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는데, 우리는 왜 할 수 없겠습니까?
봉헌은 바로 아이의 경계를 죽은 뒤까지 확장하는 것임을 알고 나의 세계에 아이를 가두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는 하느님께 진정으로 봉헌되지 않아서입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축성생활의 날)-묵상과 기도
"참빛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빛을 창조하시고 온 누리를 비추시니
신자들의 마음을 밝혀 주시고
성전에서 저희가 바치는 이 초의 광채로
마침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우리들도 초 행렬과 함께 공동체와 자신을 봉헌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합니다. 한국 교회는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의 날’로 바꾸었습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말라 3,1-4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2,22-40
실천
주님 봉헌 축일에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었듯이 우리, 가족,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을 봉헌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봉헌 될 때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비추심으로 아기 예수님이 주님임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쳐 증언하였습니다. 시메온은 자신이 눈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다. 이는 당신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마련하신 것,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 이스라엘에는 영광입니다.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인 이 아기는 이스라엘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 일어나게 하며, 반대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은 이것으로 칼에 꿰찔리고, 많은 이들의 마음의 사랑과 평화가, 죄와 허물이 드러나게 된다. 하였습니다.
시메온의 고백은 교회의 고백이며, 교회가 고백하고 걸어가야 할 길을 말해 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인,그리스도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으며 그분이 계시의 빛이고 모든 백성들의 영광임을 고백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일으키고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며 그들의 반대 아픔과 고통이 있음을 말합니다.
주님 당신의 봉헌 축일에 당신이 봉헌됨과 함께 저희도 봉헌합니다. 당신의 길에 저희를 봉헌하며 그 길을 따라갑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
220202 주님 봉헌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봉헌 축일 독서(말라3,1-4)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1ㄷ,ㄹ)
하느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주님이 홀연히 그의 성전에 올 것을 예고하신다.
여기서 '주님'과 '계약의 사자'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과 '계약의 사자'가 동의어로 됨으로써, 계약의 사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주 하느님은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이 성립된다.
이같은 사실은 요한 복음 1장 1절과 필리피서간 2장 6절에서도 유사하게 제시되지만, 삼위일체의 진리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사자'에 해당하는 '우말르아크 합베리트' (umallak habberith;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로 표현된 것은 그가 성부 하느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자, 곧 하느님의 계약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의 계약이란 옛 시나이산 계약(옛 계약; 구약; 舊約)과 대비되는 '새 계약'(the new covenant)이다.
이 새 계약(신약; 新約)에 대해서는 과거 이사야 예언자(이사55,3; 61,8), 예레미야 예언자(예레31,31-34), 에제키엘 예언자(에제16,62; 37,26)등에 의해 이미 예언된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 자신이 흘리신 피가 바로 새 계약을 이루시는 피임을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선언하셨다(마태26,28).
그런 점에서 말라기 예언서 1장 1절ㄷ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죄한 피를 흘려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를 새 계약으로 일치시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예언한 것임에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너희가 찾던'에 해당하는 '앗템 메바크쉼'(athem mebaqshim)은 히브리어에서 사용을 안해도 의미가 통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와 '구하다', '추구하다', '찾다' 등의 의미를 지닌 '빠케쉬'(bakesh) 동사의 강조 분사형이 사용되어, 직역하면 '바로 너희들이 간절히 구하고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너희가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앗템 하페침'(athem hapetsim)은 '바로 너희가 몹시 기뻐하는'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사실 동의적 대구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였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메시야를 갈망한 것은 메시야가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영광을 누리는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 하느님께서 계약의 사자, 곧 메시야가 '홀연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메시야가 오실 때 그들이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피트옴'(pithom)은 '갑자가', '놀랍게', '예기치 않은 때에'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메시야가 누구도 알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온다는 의미,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메시야가 오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장차 메시야의 재림 때의 상황과도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그 계약의 사자가 '자기 성전'에 오실 것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당하는 '헤칼로'(hekallo)는 '그의 성전'(his temple)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의 궁전'(his palace)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머무는 처소인 '궁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성전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탄생하신 지 여드레 만에 성전을 방문한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지 40일 만에 성전에서 봉헌되었고(루카2,22-39), 마지막 수난 주간이 시작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던(마태21,12-17) 사건을 예고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헀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메시야가 오시는 성전을 '그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자리, 곧 메시야께서 당신 스스로 자원하여 이루실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세우실 당신의 몸인 교회, 당신의 인류구원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 한 가운데 영신적 임금으로 좌정하셔서 통치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3)
'깨끗하게 하고'에 해당하는 '웨티하르'(yethihar)의 원형 '타헤르'(thaher)는 어원상 육체적, 도덕적으로 불결하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를 나타낸다 (창세35,2; 레위12,7; 민수8,21; 에례33.8).
이 단어는 구약에서 78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정결례 의식을 주로 다루는 레위기에서 무려 35회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제사와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백성들로 세우기 위해서 그 선택한 백성들을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 즉 성화(聖化)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말라기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힘주어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마치 금과 은을 정련하듯이 그들을 정련하신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정련하여'(단련,연단)에 해당하는 '웨직자크'(yeziqaq)의 원형 '자카크'(zaqaq)는 광석을 정련할 때에 불순물을 용해시켜 버리고 순수한 금속만을 추출해 얻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욥28,1).
여기서 이 단어는 메시아께서 레위 자손으로 표현된 신약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거룩한 고난, 시련과 환난 등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불로 그들의 죄악을 사를 때에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들의 인격의 모난 부분을 깎아 내고 연마할 때 아픔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정금같은 순수한 면모를 갖춘 참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신앙의 인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욥23,10; 야고 1,4)
특별히 오늘 2월 2일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이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고 있기에,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봉사자들의 거룩한 정결, 봉헌된 정결, 성결(聖潔)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여 중요한 단어들을 묵상해 보았다.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죄인들의 피난처, 도피성인 십자가의 그리스도
독서 (히브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 악마가 어떻게 죽음의 권능을 같게 되었을까?
(창세2,17)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이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반드시 죽어야 했고, 그들이 죄를 짓도록 속였던 뱀에게 ‘너는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죄인)를 먹어라’ 하셨기 때문이다.(창세3,14참조) 그래서 하느님께서 죽어야할 그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 하셨기에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 죄인들의 죄를 받아 대신 죽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이시다.
(로마5,18-21) 18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예수)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이 성령의 보호와 이끄심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그 예수님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루카2,24)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 한쌍(짝), 두 마리(분열-무리), 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둘로 분열시켰던, 그리고 그 법으로 갈라졌던 이들을 모두 하나로 완성하시는 중재의 예수님이시다. 곧 십자가로 분열(둘)을 하나로 완성시켰다. 그래서 율법으로 알고(로마3,28. 7,10) 그 죄(빚문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셨음을(골로2,14), 그리고 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려 부활하셨음을 알아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로마4,25참조)
(갈라4,4) 4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갈라3,19) 19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약속을 받은 그 후손(예수)이 오실 때까지, 사람들의 범법 때문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끝(텔로스, 멀리있는 목표), 율법(토라,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키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갈망했던 시메온(시몬)에게 성령이 함께하셨다. 성령은 기다리는 이들에게 가신다(지혜6,13)
다시 복음으로~
(루카2,25-30)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다시 독서로 가자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 대사제는 죄인들의 죄를 속죄, 죄를 대속하시는 피난처, 도피성이다.
(민수35,25-28) 25 공동체는 그 살인자를 피의 보복자의 손에서 구하여, 그가 피신해 있던 도피 성읍으로 돌려보낸다. 그는 거룩한 기름을 부어 세운 대사제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아야 한다. 26 그러나 만일 살인자가 피신해 있던 도피 성읍의 경계 *밖으로 나가면, 27 피의 보복자가 도피 성읍의 경계 밖에서 그 살인자를 발견하고 그를 살해하여도, 피의 보복자에게는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28 살인자는 *대사제가 죽을 때까지 반드시 도피 성읍에서 살아야 한다. 대사제가 *죽은 다음에야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다.
= 우리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그분의 죽음으로 얻는 용서, 자유, 해방이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고난과 유혹이다.
(루가9,22)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 우리의 피난처를 위한 고난이다.
(루가4,1-3.6)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 재물, 욕망의 유혹과 세상 권세와 영과의 유혹이다.
(루가4,9-10)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 신앙의 기적적인 유혹이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성으로 유혹을 받으셨음을 놓치면 안된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유혹을 말씀으로, 곧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다 이겨내시고 승리를 우리에게 전가(傳家, 물려줌)시켜 주셨다.
(1코린15,57)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1요한5,4)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히브4,15)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똑똑히 기억 합시다)
☨천주의 성령님! 저희 마음이 기다리며 갈망하게 하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도피성이신 대사제와 하나가되게 하여 주소서 의탁합니다.~~아멘!!!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복음 (루카2,22~40)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23~24)
루카 복음 2장 23절은 탈출기 13장 2절, 12절, 15절에 나타나는 내용인데, 복합적으로 인용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이 맏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규정 및 관습의 시작은 출애굽 때 마지막 재앙이었던 이집트의 맏아들 재앙때 부터였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맏배 및 맏아들을 죽일 때 히브리인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상인방에 바름으로써 재앙을 면했고, 그 결과 히브리인들의 모든 처음 난 맏배 및 맏아들은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져야 했다.
그 가운데 동물의 처음 난 맏배는 다 희생 제물로 주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사람의 맏아들은 다른 것으로 대속하면 되었다(탈출13,13.15).
이것이 후에는 사람의 맏아들 대신에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민수3,41), 레위 지파는 개인적인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로지 주 하느님만을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여야 했다.
또한 인구 조사시 레위인의 숫자는 22,000명이었고, 다른 모든 지파의 맏아들의 숫자는 22,273명이어서 레위인으로 대속하지 못한 273명에 대해서는 5세겔의 성전세로 대신 속죄하게 하였다(민수3,43.46.47).
그러나 그 후 5세겔의 대속 값은 모든 맏아들에게 적용되었고, 이스라엘 맏아들들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된 자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의 구원을 베푸신 주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께 대한 봉헌과 헌신과 섬김을 다짐하는 율법적 관례로 이어져 내려왔다.
'아기를~주님께 바쳤다'(22)
이 구절은 한글 새 성경에서는 루카 복음 2장 22절과 23절을 중첩되게 번역했으나, 원문은 22절의 맨 끝에 나온다.
'아기를 바치고'에 해당하는 '파라스테사이'(parastesai; to present him)의 원형 '파리스테미'(paristemi)는 '곁에 두다'(to place beside),'보이다'(to show), '성별하여 드리다'(to consecrate)의 뜻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 바치는 것'은 맏아들을 하느님께 드리고, 대신 속죄를 위해 대속 값을 치르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민수3,13; 18,15.16).
그러니까 무죄하신 예수님 개인으로는 속죄 값을 바칠 필요가 없었지만, 그 부모의 입장에서는 모든 맏아들에게 규정된 그 속죄 값의 규정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속죄 값은 예수님께서 장차 중재자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사무엘의 경우처럼(1사무1,11.22.28)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짐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까지 나아감을 뜻하고 있다.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이것들은 출산 후 산모가 지켜야 할 정결례에 바쳐야 할 제물이다(레위12,6~8).
나자렛 성 가정은 가난하기 때문에 일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29)
루카 복음 2장 29절부터 32절까지는 일반적으로 '시메온의 고별 노래'라고 불린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데스포타'(despota; Sovereign Lord)는 기본형 '데스포테스'(despotes)의 호격이다.
'데스포테스'(despotes)는 '주인', '소유주'라는 뜻인데, 동일한 의미로 성경에서 749회나 사용된 '퀴리오스'(kyrios)와 달리 10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데스포테스'(despotes)는 자신이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분'에 대해서 사용하는 상대방을 매우 높이는 강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사도4,24; 묵시6,10).
시메온은 하느님을 '데스포테스'(despotes)라고 표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당신 종', 즉 '톤 둘론 수'(ton doulon sou; your servant)라고 분명히 말하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라고 번역된 '뉜'(nyn; now)이 문장의 처음에 와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류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시메온 개인에게도 구원자를 기다리는 영적인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해방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뒤이어 나오는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아폴뤼에이스'(apolyeis; depart; dismiss)는 '자유롭게 하다'를 의미하는 '아폴뤼오'(apolyo)의 2인칭 단수이다.
이 단어는 완곡어법으로 쓰여 '죽을 수 있도록 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아무런 미련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시메온이 매우 늙었으며, 지금까지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명과 희망으로 살아왔으나, 이제 그 사명과 희망이 완전히 성취되고 끝났음을 표현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평화로이'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 '레마'(rema; word)는 루카 복음 2장 26절에 나오는 '성령의 알려주심'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메온은 '레마'(rema) 앞에 '토'(to)라는 정관사를 붙였을 뿐 아니라, 뒤에 2인칭 단수 소유격 대명사 '수'(sou)를 덧붙여서 '성령의 알려주심'을 '성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시메온은 자신이 바라던 바가 성취됨으로 인해 참 평화를 얻었다.
이 평화는 시메온 개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서도 구원자의 오심의 결과요 선물이 되었다.
이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네'(eirene; peace)는 하느님의 아들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셔서 주시는 평화인데, 이 평화는 죄와 불순종으로 하느님과 원수가 된 인간과 하느님과의 화해에서 오는 구원이며(로마5,1.10), 반목과 질시로 벽을 쌓고 살아가는 인간들 관계 속에서의 평화일 뿐만 아니라(로마12,19), 염려와 근심, 격심한 감정의 혼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평화이다(로마8,6).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원문의 서두에 나오는 '호티'(hoti; for)는 본문에서 이유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앞에서 말한 자신의 평화로이 떠나감의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시메온이 '구원'을 본 주체는 '나', 즉 '에고'(ego)라고 하지 않고, '제 눈이' 즉 '호이 옵탈모이 무'(hoi ophthalmoi mou; my eyes)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았음을 더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여기서 '구원'이라고 번역된 '소테리온'(soterion; salvation)은 형용사인데, 명사처럼 쓰여 '구원의 수단' 혹은 '구원 그 자체'를 의미한다(시편50,23; 이사56,1).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구체적인 영적을 말하기도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 자체이심을 보여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했던 시메온은 사도 요한이 표현했던 그 기쁨을 맛보았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요한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