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묵호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한창 경기 좋을 때인 76년도부터 90년대까지 유흥주점을 했어.
맨 처음 발한동에서 ‘카네기’를 했고, 80녀대에는 농협 건너편에서 ‘동그라미’를 하다가 90년대대에는 음악다방 ‘갈채’를 했지.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1종 허가는 까다롭고 비쌌어. 내가 비싼돈 들여가며 기를 쓰고 한 이유는 경기가 좋았기 때문이야. 묵호를 중심으로 여러 공장이 있었지.
또 묵호항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젊은 친구들이 많았지. 게다가 월급도 많이 받는데다가 한창 팔팔한 시절이다 보니, 끼를 발산할 데를 찾은 거지.
고객은 쌍용, 동양시멘트, 한라시메트 그리고 해군들이었지.
동그라미 할 때는 아가씨가 70명이나 되었어. 이 아가씨들은 스스로 A B C 그룹으로 나누어 A는 손님과 함께 마시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B 는 주로 홀에 나가서 신나게 춤을 추지, C 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니 손님과 함께 총알택시를 타고 강릉의 고급 호텔 클럽으로 가서 2차를 즐겼어.
영업이 잘 되려면 아가씨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밴드의 연주도 필수적이야. 나이트 밴드는 한 달에 한 번씩 교체했지. 손님들은 다양한 연주에 춤을 추기를 원하기 때문에 뻔한 레퍼토리 연주에는 싫증을 내기 때문이야.
싸롱은 주로 6인조 밴드인데 , 자기들 끼리 돌아가면서 바꾸었어.
고고장은 젊은 밴드라야, 신나는 음악을 연주했지.
그런데 꼭 손님들끼리 싸우는 날이 있어.
주로 춤 추다 부딪히거나 발을 밟히거나, 기분 상하는 일이 있으면 괜히 시비를 걸어 싸우지. 이때를 대비해서 꼭 어깨들이 대기 하고 있다가, 중간에 나서서 정리를 했지.”
노인의 그 이야기에 퍼뜩 과거가 생각났다.
1978 년 가을, 발한 삼거리에서 묵호 건달들과 싸우고 이겨서 묵호의 밤거리와 유흥가를 주름 잡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한 곳에 정착해 있는 어린 깡패는 아니었지만,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관리를 했다.
그 시절 내 별명은 ‘물개’ 였다. 묵호 바닷가 아이들보다 수영을 더 잘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지금 묵호진동 동사무소 가는 삼거리 초입의 이발소 자리에 예전엔 ‘양조장’이 있었어. 우리는 부두에서 갈고리로 고기를 찍어 배고프면 양조장 앞으로 왔다갔다 했어. 그러면 일하는 아저씨가 손으로 불러. 그리고 막걸리 한 주전자를 벌컥 마시지.
시큼한 냄새가 났지만 배가 고프니 일단 손으로 퍼먹어. 얼마 지나지 않아 기분이 좋아지고 걷는 것도 건들거리고.
우리 아버지는 꼭 돈 받는 날이면 나를 불러서
발한동 파출소 옆에 있었던 ‘강호소주’ 공장에 심부름을 보내지. 댓병 색이 검고 도수가 35도나 되는 독한 소주였지. 아버지는 그 독한 소주를 잔이 아니라 사발로 벌컥 부어 단숨에 마시고 소금을 안주로 먹었지.
그래서 빨리 돌아가셨지.
간혹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실 때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며 젓가락으로 밥상이 장구가 되고 놋그릇이 징이 되었지.
이런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오징어바리 나갔다가 돌아오면 묵호시장 2층 집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다방이 나오는데 , 상 하나에 아가씨 둘, 손님들이 앉으면 딱 맞아. 술 마시며 취하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하다. 오징어 먹통을 빼고 거기다 오줌을 싸며 뿌리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지.
술집 좁은 계단을 내려오다 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지.”
묵호항 건너편 묵호시장은 대부분 일본식 건물이어서 2층 올라가는 계단이 좁았다. 지금도 묵호시장의 건물은 일본건물처럼 건물 사이가 붙어 있고, 여전히 뼈대는 남아 있다.
“나는 꽃 다운 나이에 부산으로 시집을 갔다가 사정이 있어서 이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어.”
이어서 할머니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내 어깨를 흔들면서, 이년아 구만리 같은 세월 우타 살라고 돌아왔노. 하며 울었어. 나는 어머니에게 젊은 년이 설마 살 길이 없겠어요 하고 대꾸하며 다음 날부터 살길을 찾았어요.
그러다 유일한 친척 오빠인 외사촌 오빠 가게로 갔어요. 오빠 부부는 ‘동해프라자’에서 소갈비 식당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매일 나가서 서빙을 했는데 한라시멘트 직원들이 안되 보였는지, 한라 직원들 회식하러 자주 왔었지요. 그 중 노동조합 간부도 있었는데 가게를 직접 차려 보라고 부추 켰어요.
그래서 구만리 같은 세월 이대로 썩을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엄마 돈, 내 돈 합치고 외사촌 오빠의 보증으로 새마을 금고에서 대출 받아서 묵호역 앞에 ‘짚시카페’를 냈어요.
당시 동양, 한라, 쌍용이 경기가 한창 좋을 때 였어요.
봉급이 매년 15프로 이상 오르고 24 시간 공장을 가동해도 시멘트가 모자라서 공장마다 증설을 했어요.
그러니 현장 직원들은 잔업이 많아서 월급을 받으면 2,3백 만원씩 더 받았어요. 우리집 단골은 간부들이었는데 다들 돈을 물쓰듯이 했어요.”
나는 그때 일본에서 돌아와 시간 강사를 하다가 때려치고 중장비 임대업을 할 때였다.
나의 중장비 10 대는 한달도 빠짐없이 임대가 되었다.
나는 돈을 벌어 동남아 태평양으로 스쿠버 다이빙을 다녔다.
“당시는 양주와 맥주를 섞어서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 유행이었지. 그렇게 시작해서 슬슬 취하면 자리를 떠서 나이트 가서 춤추는 것이 풍속이었지.
나는 백지 상태서 유흥점을 했지만 서서히 현실에 물들기 시작했어. 단골손님과 같이 나이트 가서 춤춰보니 기분을 알 거 같았지.
춤 출 때는 이렇게 사는거지, 세상 별거 있어 하면서 흔들었지.
그렇게 술과 춤에 빠져서도 돈을 엄청 벌었지. 2 년동안 벌어서 엄마 돈과 대출금 전부 갚았지.
그런데 어느 날 대구 사람이 운영하는 ‘파이낸스’에 돈을 몽땅 투자했지.
이자를 은행 보다 서너배 더 준다기에 거금 1억을 집어 넣었어요. 그 돈이면 천곡동 아파트를 두채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처음에는 이자를 꼬박 꼬박 주다가 날린거야.
행적을 감춘거지. 나와 같이 속은 묵호 아줌마들이 울고불고 해봤자 소용있나. 버스는 지나간 뒤였지”
조희팔 사기 사건에 걸려든 것이었다. 조희팔은 나중에 중국으로 도망가서 행적을 감추었다. 뒤이어 주수도의 JU 구릅 다단계 사건이 터저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엄마와 점쟁이가 간곡히 한 말인, ‘니 팔자는 공돈 못 먹고 사니, 그리 처신해라, 했건만 욕심에 눈이 멀어 당한거지. 그래서 다시 단란주점을 차렸어요.
나이트가 한 물가고 룸에서 술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단란주점이 유행이었어요.
그 동안 도와주던 손님들이 다시 찾아와 가게가 잘 되었어요. 매일 음주 가무가 이어졌지만 나는 술 만큼은 멀리 했어요.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 났어요.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 ’우리 이쁜 딸 너는 이담에 심청이 같은 효녀가 되거라 하면서 이름에 孝 자를 넣었거든요.
나는 잊고 있었더는 듯이 12인승 갤로퍼를 사서 엄마 다니시는 경로당으로 가서 어른들 태워서 덕구온천이나 백복령으로 다녔어요.
이혼하고 술집 한다고 뒤에서 욕하던 엄마 친구들이 ‘내 친자식보다 낫네’ 하면서 좋아했어요. 이젠 엄마도 나도 나이가 들어 쉬고 있지만 가끔 경로당 창자서 고기 파티로 즐겁게 해드리지요.”
그리고는 IMF 가 터지고 나는 스쿠바다이빙을 너무 해서 잠수병에 걸려서 집에 누워 있으며 컴퓨터 코딩 공부를 했다.
프로그래머로 홈피를 만들어 주다가, 쇼핑몰 마케터가 되고 직접 인터넷 쇼핑몰을 하면서 대게를 사기 위해 묵호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