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화 교환이라는 화폐개혁이 단행되면서 돈 그림자도 보기 어렵게 된 조선인들이 집이나 땅 문서를 전당하고 돈을 변통하였다가 파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고종은 내탕금을 내려 일본인에게 집과 땅이 전당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생계가 군간(窘艱:군색하고 고생스러움)함으로 다수한 인민이 그 가권(집문서)을 외국인에 전당 잡혀 기한이 지나면 집을 빼앗기고 도로에 서설(棲屑: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님)하는 참혹한 정상이 연전부터 태황제 폐하께 들렸는지 폐하께서 긍측히 여기사 돈 몇 만환을 광천전당포에 내하하사 가권을 전집하여 군간한 인민으로 하여금 집을 빼앗기고 서설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셨다.” (신보 1908년 9월 23일)
막힌 금융의 숨통을 열기 위해 몇 개의 금융기관이 새로 설립되었지만 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은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맡길 수 있는 것만 있다면 쉽게 돈을 구할 수 있는 일본인 전당포인 질옥(質屋)을 찾았을 수밖에 없었다.
집이나 땅을 전당 잡고 돈을 꾸어주는 일은 조선에서도 역사가 오래되었다. 전당업은 주로 미곡상 등 상인들이 겸업하던 형태였다가 갑오개혁 이후 전업으로 하는 전당포가 등장한다.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인 질옥이 증가하자 조선인 전당포도 경쟁적으로 증가했다. 1910년 조선인 전당포는 전국에 680개이고 경성전당포조합의 조합원은 약 200명이었다.
대부 이자율은 상당히 높았다. 1898년 공포된 전당포 규칙과 세칙은 월 1~5%로 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월 5~10%였고 소액 대부일수록 이자율이 높았다. 전당기한을 넘긴 물건은 점포 앞에 내걸어 방매하였다.
그러나 오래된 전당물이라도 원금의 두 배를 내면 반환해주던 과거의 관행이 있어 전당업자의 전당물 방매가 비난받기도 하였다. 반대로 전당기한을 넘긴 물건을 방매하도록 한 규칙을 전당업자가 지키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신보 1908년 3월 14일, 1908년 11월4일)
신문에는 위조 전당을 조심하라는 내용을 담은 다음과 같은 광고가 드물지 않게 실렸다. “본인의 넷째아들 해승이 어리고 몰지각한 소치로 부형의 도장을 암암리 사용도 하며 혹 위조할 뿐 아니라 부형이 소유한 전답문권을 위조하며 훔쳐 전당 혹은 방매할 계획으로 경향에 출몰하면서 외채도 사용하고자 하니 내외국 인사는 이처럼 무능력한 해승에게 기만당하지 마시오” (황성신문 1909년 11월 21일)
전당포는 조선 정부의 규칙에 따라 허가되고 질옥은 일본 영사가 정한 세칙에 따라 허가되었다.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원화 되어 있던 양자를 통합하여 1912년 3월에 제령으로 전당포취체법을 시행한다고 공포하였다.
같은 달에 조선인 경성전당포조합소와 일본인 경성질옥조합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서민들에 대한 소액금융에서만은 조선인 전당포가 처음부터 이처럼 일본인 질옥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럴싸한 금융기관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리 잡은 전당포를 통해 서민들의 애환 가득한 수많은 일화가 만들어졌다.
[박기주 성신여대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