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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유자적 등산여행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무념무상
완도 6개 섬 순례여행
노화도(전복체험마을)
염등리 앞 300ha에 달하는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노화도(蘆花島· 갈꽃섬)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또는 윤선도가 이 섬으로 올 때 어린 종을 데리고 왔다 하여 노아도(奴兒島)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완도에서 생산되는 전복의 80% 이상이 노화도에서 생산되며 하루에 두 번 물이 갈라지는 노록도 신비의 바닷길 등 자연 그대로의 멋을 간직하고 있는 섬입니다. 전복체험마을에서 관광객들이 직접 전복을 채취하고 시식할 수도 있고 전복 코스 요리(전복회, 전복구이, 전복죽)도 즐길 수 있습니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
완도 남부 해안에서 소안도-보길도-청산도를 연결하는 삼각 해역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청정해역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곳 완도군의 맑고 투명한 바다와 바닷빛을 닮은 하늘, 간간이 솟아 그 도한 짙은 푸름을 자랑하는 숲들로 치장된 섬들의 봉우리와 해안, 이 모든 자연 풍토 그대로가 하나의 유적이요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뱃길의 끄트머리에 보길도가 있습니다. 보길도는 우거진 동백나무, 상록활엽수 숲과 온화한 기후 조건 등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섬입니다.
험난한 정치생활을 하던 고산 윤선도(1589-1671)는 조선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치욕적인 소식을 듣고는 다시 세상 꼴을 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 그곳의 절경에 매료되어 터를 잡았습니다. 그 섬이 바로 보길도입니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km 떨어져 있습니다. 32.99㎢ 면적에 동서 길이 12km, 남북 길이 8km 되는 제법 큰 섬입니다.
고산 선생은 험난했던 정치인 생활과는 달리 보길도에서는 화려할 정도의 은거생활을 했습니다. 25채의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거느리는 노비만 수백 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고산 선생의 부용동원림은 양산보의 담양 소쇄원, 정영방의 영양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별서(別墅 :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별장)정원’으로 손꼽힙니다. 명승 제34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림 내에 있는 세연정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8만3,532㎡(약 2만5,000평)라는 면적도 압도적입니다. 섬 전체가 윤선도의 유적지나 다름없습니다.
격자봉을 중심으로 말굽 모양의 산줄기가 굽어 흐른 아늑한 곳에 윤선도 원림이 있습니다. 이곳은 신선의 경역입니다. 고산은 이곳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는 듯하다고 부용동(芙蓉洞)이라 칭했습니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세연정(洗然亭)이 있습니다. 사방이 들창으로 열린 정자에 오르면 세연지의 버드나무며 구름다리며 잘 생긴 일곱 바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정자에는 동편에 호광루, 남쪽에 낙기란, 서편에는 동화각과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윤선도는 세연정의 동서 방향에 대(臺)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올라가 악공을 불러 시를 읊고 춤을 췄다고 합니다.
일명 굴뚝다리로 부르는 판석보는 회수담으로 물을 보내기 위해 세연정자의 물을 가두는데 쓰였습니다. 건기에는 옥소대를 오르는 다리로 사용되고 우기 때는 물이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세연정 주변엔 소나무와 배롱나무, 동백나무 들이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바위들 중에 흑야암은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실제 마주하면 힘차게 뛰어오를 기세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낙서재(樂書齋)는 고산 윤선도가 조그마한 세 채의 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 주자학을 연구했던 곳으로, 그가 보길도에 들어와 살고, 죽은 곳입니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윤선도가 고른 보길도 최고의 집터라 합니다. 낙서재 뒤엔 동백나무 수십 그루가 섰습니다.
낙서재 바로 건너 산 중턱 절벽 바위 위에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는 한 칸짜리 집의 조그마한 정자가 있습니다.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았는데, 주변의 산자락이 낙서재터를 둘러 연꽃잎처럼 피어나 있어서 부용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실감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앞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낙원에 온 듯해 세상을 발 아래로 보면서 훨훨 초탈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마주 보고 있는 높은 산이 격자봉, 그 앞에 조그마한 언덕이 조산입니다. 윤선도는 조산과 동천석실 앞의 용두암이라는 바위에 도르래를 연결해 물건을 운송했다고도 합니다.
주변의 석문, 석천, 석폭, 석대도 장관입니다. 동천석실은 유교 성리학에서 신선이 기거하는 곳의 이름입니다. 동백나무와 차나무, 자귀나무 등이 드문드문 섞인 오르막 숲길을 10분쯤 올라가면, 위쪽 높은 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불쑥불쑥 드러나 있고 그 기암괴석 틈으로 동천석실이 나타납니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라는 시조에서 다섯 벗을 노래했는데 물(水), 돌(石), 소나무(松), 대나무(竹), 달(月)이 바로 그 다섯입니다. 동천석실에 올라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뾰족산과 공룡알해변
보길도 서쪽 해안도로 끝까지 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뾰족한 봉우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뾰쪽산(195m)입니다. 보옥리 바닷가에 우뚝 솟은 단일 암봉으로, 보길도가 거북이 형상이라 한다면 정수리에 해당합니다. 지도상에는 보죽산(甫竹山·197.1m)으로 나와 있습니다. 정상까지는 30분 정도 걸립니다. 정상부에는 30~40명 정도가 쉴 수 있는 너럭바위 반석지대가 있고 이곳에서의 전망은 보길도 최고로 꼽힙니다.
보옥리 마을 안쪽을 감싸고 있는 뾰족산 아래 해안을 뽀래기(보옥리) 공룡알 해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청명석이라고 불리는 갯돌이 크고 둥글둥글하여 공룡알 같이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졌습니다. 몽돌은 갯돌로 불립니다. 공룡알처럼 크고 둥글고 매끈합니다. 공룡알해변 인근에 망끝전망대가 있습니다. 아래는 천길낭떠러지입니다.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 위에 섬들이 점점이 떠 있습니다. 왼쪽이 제주도고, 정면이 추자도입니다. 이곳은 보길도 최고의 낙조 전망대이기도 합니다.
송시열 글씐바위
임진왜란 이후 벌어진 조선의 예송논쟁은 1659년 효종과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몇 년 상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시작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몇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잠복돼 있었습니다. 인조반정을 시작으로 효종의 정통성 문제(정치적),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학문적),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체제 문제(이념적)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습니다. 이 예송논쟁의 핵심인물이 바로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남인의 윤선도였습니다.
윤선도는 인조 당시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 지금의 부용동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송시열을 붙잡은 건 풍광이 아닌 풍랑이었습니다. 세도를 달리던 송시열도 말년에 정치적 위기상황이 왔습니다.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호칭 문제로 서인이 축출될 때 세자 책봉 반대상소를 올린 것이 왕의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잠시 보길도에 머물게 되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글을 남기게 됩니다. 이것이 보길도의 '글씐바위'입니다.
예송리 깻돌해변과 상록수림
예송리 바닷가는 활처럼 부드럽게 휘었습니다. 1.4km 해변이 모래 대신 검푸른 조약돌 즉 몽돌로 해안가가 이루어져 있으며, 바다 안에 몽돌이 바로 보일 정도로 바닷물이 깨끗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깻돌’이라 부릅니다. 이곳은 몽돌 말고도 내세울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상록수림입니다. 예송리 상록수림은 약 300년 전에 태풍을 막기 위해 이곳 주민들이 만든 숲으로, 길이가 약 740m, 폭이 30m쯤 되는 반달 모양의 매우 아름다운 숲입니다. 3백 살 넘은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붉가시나무, 생달나무, 감탕나무가 사철 푸릅니다.
강한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은 물론, 물고기가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하여 물고기떼를 유인하는 어부림의 구실도 하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자연을 이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가치도 매우 커서 천연기념물 4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마을 입구 도로가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풍경입니다. 황금색 햇빛이 바다에 비치면 은빛으로 변해 바라보는 이들에게 몽환적인 느낌을 갖게 합니다. 여름철 최고의 휴양지로 알려진 예송리 해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의 하나입니다.
정도리 구계등(九階燈)과 방풍림 숲길
정도리 구계등은 오랜 세월 파도에 부딪혀 형태가 몽돌이 된 자갈들이 9개의 계단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자갈 비탈로, 파도소리와 몽돌이 굴러가는 소리로 옛날부터 유명한 곳입니다. 신라 흥덕왕 3년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구계등의 존재를 왕에게 보고해, 궁중의 관리를 받는 녹원지로 봉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명승 제3호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좌정(坐定)을 하거나 드러누워 눈을 감고 파도소리와 몽돌 굴러가는 소리를 듣는 것을 두고 신선계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합니다. 궁형(弓形) 해안선이 자갈밭을 양쪽에서 감싸는 모양으로 수중절벽의 경관을 이루고 있는데, 해안선 등성이는 400년 전 주민들이 심었다는 방풍림으로 남부지방 특유의 상록수가 우거져 조화를 이룹니다. 몽돌해안가와 조화를 이룬 방풍림 숲길의 산책코스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른 아침의 일출 광경도 장관입니다.
장보고 유적지 청해진
완도는 통일신라 때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해상왕 장보고의 고장입니다. 장좌리 일대에는 장보고공원, 장보고기념관, 완도 청해진(淸海鎭) 유적이 있습니다. 장보고기념관은 장보고의 활약상과 청해진의 흔적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장좌마을에서 연도교를 건너면 청해진 유적(사적 308호)이 있는 장도(將島)입니다. 장도는 해상왕 장보고 대사가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고 중국과 일본, 신라를 잇는 삼각무역을 펼쳤던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 전진기지이자 군사 요충지였던 곳입니다. 청해진 유적에는 약 1200년 전의 흔적이 있습니다.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통나무를 촘촘히 세워 만든 목책입니다. 장도 서쪽 해안을 따라 목책의 흔적이 300m 남짓 이어집니다.
장도에 들어서면 그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으로 우물 하나를 만납니다. 우물을 둘러싼 ‘ㄷ’자 모양의 판축유구는 우믈을 보호하고, 외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물을 지나면 외성문이 여행자를 맞이합니다. 외성문을 통해 보이는 장도의 토성길의 모습이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과도 같습니다. 외성문을 지나고 또 내성문을 지나면 장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놓여 있는 ‘고대’에 올라서게 됩니다. 현재는 중앙에 당집을 중심으로 목책과 빗살무늬 멧돌, 토성 등이 남아있으며, 최근 발굴 결과를 토대로 고대, 중문, 남문, 목교 등이 복원되었습니다.
신지도 명사십리 해변
해수에 포함된 미네랄 등 기능성 성분이 전국에서 가장 풍부한 남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그 규모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매우 빼어난 곳입니다. 모래 우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린다 하여 ‘울모래’ ‘울몰' 또는 ‘명사십리’(鳴沙十里) 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길이는 3.8km로서 십리쯤 됩니다. 신지대교가 개통되면서 차가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됐습니다. 지금 공사 중인 고금도 다리마저 완공된다면 완도 본섬을 들리지 않고도 신지도까지 갈 수 있습니다. 유배지로 애용됐던 외딴섬이 이제는 축복받은 땅이 됐습니다.
고금도 이충무공 유적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이 아로새겨진 섬입니다. 명량해전이 끝나고 본영을 설치한 섬으로,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합세해 기세를 떨친 곳입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83일 동안 머무른 곳이기도 합니다. 고금도(古今島)에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무사(忠武祠)와 83일간 시신을 안치한 월송대(月松臺) 등이 남았습니다. 월송대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충무공의 유해를 잠시 남해 관음포에 안치하였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모셨던 장군의 두 번째 무덤입니다. 기이한 것은 이 무덤엔 4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풀 한 포기 돋아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장군이 ‘죽어서도 바다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풀숲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원치 않아 풀 한 포기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 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즉 장군이 고금도에 본영을 설치할 무렵 충무마을을 산책하게 되었는데 마침 이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바다를 바라보니 달이 6시간 남짓이나 움직이지 않고 이곳을 비추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장군은 이곳을 월송대라 이름 짓고 군사훈련 점검장으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대보름날 이 곳에서 달빛을 받으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처녀총각들이 즐겨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약산도 진달래공원 다도해전망대
장흥군 탐진현, 강진현으로 불리다 1896년 완도군 조약면(조약도)이 되었다가 1914년 고금면으로, 1949년 다시 약산면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릅니다. 고금도에서 약산대교를 건너면 약산도(藥山島)입니다. 생약초가 많아 약산도라 하였고, 예전부터 약초를 먹고 자라는 흑염소 방목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 섬의 으뜸 명소인 삼문산진달래공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다도해 풍광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나옵니다. 생일도, 금일도(평일도), 금당도 등이 바다 위로 점점이 떠 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