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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7. 대민(주일낮)
받은 은혜 화답하는 교회(대하32:24-30)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2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27]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29]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2023년도 마지막 주일과 더불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벌써 2024년도 첫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금년도 교회의 표어는 “받은 은혜 화답하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모든 생물체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밖으로 로 나가는 것의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먹는 양보다 밖으로 방출하는 양이 적으면 살이 찝니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않으면 병에 걸립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으면 받은 은혜는 점점 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면 그 은혜는 망각 되지 않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복음을 가지고만 있으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만 있고, 전하지 않으면 더 큰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출애굽 때의 감격을 잊어버려서입니다.
그 놀라운 감격과 기쁨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감히 누가 하는 일이라고 원망의 소리를 내뱉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곧 문제입니다.
감사로부터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을 때에 관용이 있습니다. 내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자연히 용서합니다.
내 마음에 큰 기쁨이 있을 때에 조그만 문제, 조그만 어려움, 작은 부조리나 어려움을 참고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축도로 모든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완성은 예배 때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누릴 때입니다. 예배 때 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예배는 완성 되어집니다. 말씀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할 말씀입니다.
금년의 시작과 더불어 52주일 예배를 다 드릴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1.보답하지 않으면 진노가 임합니다.(24-25)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살려고 한다면 너무나 고달프고 실패 투성이의 인생이 되고 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큰 은혜를 힘입어 태어났고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은혜를 힘입어 좋은 것들을 많이 누릴 수 있었고 이만큼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전혀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참 불행합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도 없고 은혜 갚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줄도 모릅니다. 마음과 인생이 점점 황폐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하나님께 은혜를 기억하지만 살만하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행자지합니다. 사람들이 못쓰게 되는 것은 복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복을 받고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복의 때에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이방인에게서 구원하시는 구원과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백성이 그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등질 때는 다시 이방인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만드시는 준엄한 분이심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죄악 중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면 다시 죄악에 빠지게 되고 더 극심하게 사단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진리를 교훈해 줍니다. “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2:20)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죄와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가를 체험케 하여 다시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보응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의 보응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훈련 시키며 연단하시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불신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 진노와 본질상 다른 것입니다.
즉, 성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성도를 정금 같이 연단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만,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 진노는 그들을 멸망시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 대한 하나님 보응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거나 무시하면 은혜가 사라집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15년간 수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사실 히스기야의 부귀영화와 건강이 모든 것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바벨론의 사신들 앞에서 자기 것 인냥 마음껏 자랑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교만한 마음이 결국은 훗날의 재앙을 부르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청지기의 사명을 잊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며, 능력 있는 왕 인냥 착각 속에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열심히 뽐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던 웃시야에게 하나님은 문둥병을 징벌로 내리셨습니다. 문둥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명사 '차라아트' 는 문자적으로 이미 '징계의 매' 의 뜻을 가지고 있음이 흥미롭습니다.
문둥병은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정신적 고통까지 극심하며 격리 수용되어야 하기도 하는 질병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선정을 베푼 왕의 한번 실수한 일에 대해 이렇게 극심한 형벌을 내리신 하나님의 뜻을 짐작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함을 극히 싫어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보다 그 문제가 해결된 후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면서 감사의 고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복임을 깨달아 항상 교만하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보다 더 죄악이 관영하다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죄악이 관영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대중문화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오직 사람의 힘으로 이 시대를 개척하고 새로운 시대, 곧 파라다이스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죄악을 자행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자신들의 본분을 쉽게 망각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방법을 따라 육신의 안녕을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죄악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그래도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며, 밝은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먹고 배은 망덕하고 타인에게 죄를 짓도록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무서운 벌을 받게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심정에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덕을 세우며 자신과 후손들에게는 복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2.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쳐야 합니다.(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내면에는 근본적으로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죄의 소원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때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지상낙원을 건설코자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쁘게 되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고 난 후에 나타나는 2단계 현상은 허랑방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생명과 무한한 재능과 건강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이 모든 것을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였고 악을 도모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현대인의 모습은 이를 잘 반영합니다. 음란 비디오를 보고 허랑방탕하게 정욕에 놀아납니다. 마약 중독자가 되어 몸을 탕진하고 동성연애자가 되어 AIDS에 걸려 결국은 죽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잘 배우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힘센 사람들이 세상에 큰 유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나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정치와 경제를 휘두르지만 망쳐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잘나고 똑똑하다는 교만함 때문에 쉽게 불의와 결탁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보잘것없지만 겸손하게 의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더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은 분쟁을 만들어 내는 주범(主犯)입니다. 교만한 자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이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이기주의(利己主義)로 이어집니다.
교만이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담이라면 겸손이야말로 막힌 곳을 이어줄 수 있는 다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신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죄악으로 교만한 우리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헐어버리기 위해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철저하게 겸손하심으로 해결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죄에 대하여, 교만에 대하여 철저하게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만과 교만이 만나서는 벽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어떠한 일의 성취가 사람의 능력과 함으로 행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나 성도의 생활 속에서 성취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행하신 일임을 기억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성도 된 우리들이 싸워야 할 가장 큰 죄가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의 활동 근거는 마음, 눈, 행위입니다.(시131:1) 행위로는 교만하지 아니하여도 눈과 마음에 교만이 잠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섬김을 받고자 할 때, 자연히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원하여 은밀히 하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 하나님의 숨겨진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봉사자, 하나님을 사랑하듯 사랑으로 봉사하는 은밀한 봉사자를 찾으십니다.
요셉은 온갖 시련을 겪은 후 마침내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으나, 결코 교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자신이 받은 모든 복이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얻는 모든 복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으로 인해 교만해지거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오히려 복이 변하여 저주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복의 순간에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교만은 속옷과 같아서 입을 때 제일 먼저 입고 벗을 때는 맨 나중에 벗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어떤 죄를 회개하기 전에 교만의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26절에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히스기야가 회개한 사실은 열왕기하20장1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이러한 히스기야의 회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미 3:12)은 연기되었는데 이 같은 그의 태도야말로 그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실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12장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이 교훈은 한 마디로 겸손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겸손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마음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자기의 마음이 교만하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마음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 세계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는 현실” 때문에 믿음 있는 자와 믿음의 외식자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겸손하기 위하여 사치를 멀리하고 미천한 백성처럼 살려고 하는데, 은혜를 받지 못한 성도는 여전히 세상 정욕에 얽매여 이 세대를 본받고 인본주의로 나가려한다면 융화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큰 일을 하였다 하여도 하나님이 하신 것일 뿐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못합니다(고전 15:10), 오로지 쓰임 받은 사실만 감사하고 더 겸손하여지며 낮은 위치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는 것이 바른 처신입니다.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한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3.모든 일에 형통합니다.(27-30)
[27]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29]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물론 잘못에 대한 댓가도 마땅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연필 꼭대기에 지우개가 달린 것은 누구나 실수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 다 다녀봐도 실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수한 다음에 좌절하거나 그것을 자꾸 기억해 봤자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빨리 잊어버리고 더 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가 지난 해 농사 잘 못 지은 것을 거울삼아 금년 농사를 더 잘 짓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해 물건 잘못 사온 것을 선반에 얹어 두고 계속 한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빨리 집어 치우고 앞으로는 바로 사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수는 가끔 큰 성공을 위해 이용해야 합니다. 실수를 오래 간직해 두지 말고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실수나 허물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완악함과 무지함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붙잡을 때 계속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혹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리는 인생의 지혜를 배웁니다.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실수로 인해 자신을 헤치는 사람은 실수를 자신의 전체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실수로 인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은 실수를 자신의 성장 토대로 삼습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어제 실수한 것은 오늘 반복되지 않고 오늘 실수한 것은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는 자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수로 통해 인생을 실패 하여서는 안 됩니다. 실수가 곧 실패는 아닙니다.
모세와 같이 위대한 인물도 실수를 하였고 다윗과 같이 용맹스런 장수도 적 앞에서 스스로 침을 흘려 자신을 바보로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실수를 하였고 바울도 마음에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한다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도 교만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보답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끝까지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했어야 할 텐데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곧 신생국가인 바벨론의 사자가 왔을 때 자기 나라의 모든 비밀을 앞으로 적이 될 나라에게 노출시켜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실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교만 때문이며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때가 승리를 이루고 난 후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히스기야는 몸에 죽을 병이 들었다가 하나님의 복으로 그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후에 이전의 신앙에 바탕을 둔 바른 왕의 모습에서 급격히 이탈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는 악한 정치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자연히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겸손해지면 감사할 줄 압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저절로 충성하게 됩니다. 연쇄적으로 이뤄집니다. 이럴 때 은혜가 더 풍성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비록 히스기야도 실수를 하였지만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므로 선한 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본문 27-30절에 “[27]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29]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이는 대적의 위협과 질병으로 인한 고난,그리고 시험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 안에서 형통했음을 강조해 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부와 영광이 지극하였고 다윗 성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고 히스기야가 모든 일에 형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 형통하여 화답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보답하지 않으면 진노가 임합니다.(24-25)
2.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쳐야 합니다.(26)
3.모든 일에 형통합니다.(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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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 예배에 힘쓰고 겸손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