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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묵상글 들 ( 연중 제7주일. - 우리의 벗인 원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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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의 벗인 원수
연중 제7주일은 사랑이 주제인데 하느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저는 오늘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원수 사랑을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지 보고자 합니다.
제 생각에 원수와 내가 1대1로만 있으면 사랑이 불가능하고 시작도 못할 것입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만한 사람 아무도 없고 내 앞에 오직 원수만 있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고 상처와 불행을 과거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로 인한 상처와 불행은 현재 진행형이 될 것이고 배가되어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을 위해서는 시선을 일단 원수에게서 떼게 해야 하고
원수로 인한 상처와 불행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원수에게서 시선을 돌리게 할 존재가 아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에게서 시선을 떼게 하는 방법으로는 여행을 떠나고,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등의 방법이 있겠지만,
그건 잠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은 되지 못하기에 시선을 돌린 뒤
우리가 달려갔을 때 나를 치유해주고, 채워주고, 바꿔줄 그런 존재가 필요합니다.
어렸을 때 엄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누군가한테 얻어맞으면 아이는 울며 엄마한테 달려가지요.
그러면 엄마는 우리 애기 누가 때렸냐며 역성을 들어주고,
아픈 데를 '호'하고 불어주고, 우는 아이를 안아 줌으로 서러움을 풀어줍니다.
원수로 인해 상처를 받고 불행한 우리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가 하느님이고,
우리는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하느님께 달려가 안겨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이의 상처에 '호' 불어주듯
천지 창조 때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어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셨듯 하느님은
성령과 성령의 사랑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사랑을 지니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시각이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뀌어
나의 원수였던 자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그래서 그 불가능할 것 같던 원수 사랑이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열왕기에서 다윗은 부하들이 원수라고 부르는 사울을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라고 하며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어떤 자인지 그런 관점에서 사울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은 우리의 시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 곧 Passion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게 하고 그래서
수난을 안긴 것 때문에 전엔 원수였던 자를 이제 벗으로 여기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본받고자 했고
그래서 오상까지 받은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주님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시고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원수는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 차원으로 성장하게 하는 벗들입니다.
우리에게 원수가 없다면 원수를 위해 당신을 바치신
주님 사랑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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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원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인 사랑을 지니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을 때라야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며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이들을 위해서 주님께 축복을 청하고 기도할 수 있는 넓은 자비의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진 하느님 사랑의 씨앗을 어떻게 자라나게 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서를 통하여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주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며 모든 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게 됩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요구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이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느낌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심을 가지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침묵과 기도안에서 가능합니다. 침묵과 기도가 우리의 모든 활동의 기초가 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동안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순수하고 확고부동한 평화의 마음이기에 자기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자비롭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처럼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난 한가지 행동이 다른 일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하느님께 더 많은 영광을 드리고 교회에 더 많이 봉사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얻기 전에는 원수를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늘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이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 마음을 충만하고 풍요롭게 하며 아름답고 순수하게하고 강하게 하며 감미로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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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오늘은 연중 제 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찾아 헤매는 사울왕을 원수 갚을 기회가 생겼음에도 살려줍니다. 모든 결정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오직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화답송>은 주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이심을 노래하며,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흙에서 나서 썩어 흙으로 돌아갈 첫 인간과 하늘에서 나서 하늘로 돌아갈 새로운 생명을 구별하여 그들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1코린 15,49)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백성을 가리켜 “자비의 그릇”(로마 9,23)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2015년에 제2차 바티간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모토를 “아버지처럼 자비로워라”(misericordes sicut Pater)로 정하시고, 칙서인 [자비의 얼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1항)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시며, 또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본질이며 활동이심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음의 말을 빌려 말해줍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납니다.”(6항)
또한, 교종께서도 이 [칙서]에서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요,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으로 말씀하시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커다란 희망과 심각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교회의 첫째 직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인 그 자비를 찬양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소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좀도 적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로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자비를 비는 기도”를 바치면서 마칩니다.
저는 당신의 살아있는 모상이 되기 위해 온전히 당신의 자비로 변하고 싶습니다. 주님,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인 무한하신 자비가 제 마음과 영혼을 통해 제 이웃들에게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눈이 자비롭게 바라보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겉모습으로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시고, 이웃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제 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의 어려움을 듣게 하시고,이웃의 고통과 한탄에 제 귀가 무뎌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험담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용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손이 자비로워져서 선행을 많이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들에게 좋은 일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제가 떠맡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 두 발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지치거나 피로해 하지 않고 항상 달려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의 진정한 휴식은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해 주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제 마음의 문을 닫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제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도 신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 자신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성심 안에서 머무를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주님, 당신이 자비가 제 안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당신은 전능하시니 저를 당신으로 변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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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미워도 다시 한 번」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은 대단합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닙니다. ‘사랑은 흥정하지 않습니다. 거래하지 않고 변덕스럽지도 않습니다.’ ‘댓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조건이 따라붙지 않으며 기대치도 따라붙지 않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요한).
‘사랑하면 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모든 것이 선하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행할 수 있고 사랑하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시며 먼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스테파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주님,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사도7,60).
스테파노는 주님이 사신 그 사랑을 죽기까지 살았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간, 부모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등 상처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하고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아드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랑, 내어놓는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그립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창을 이용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두 번이나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사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 그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감싸주고 다윗이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울이 동굴 안에서 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겉옷 자락을 자른 후에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24,7) 다윗은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 사연을 안 사울은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 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준 것이다.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1사무24,19-21)
그래놓고 다시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명을 데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진지 한가운데에서 자고, 그의 주변에는 군사들이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역으로 사울이 죽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지만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머리 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은 자기의 시기 질투,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다윗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셨으니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입기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으십시오.”(로마12,17)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3)“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3,9)
제가 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버지니아의 한 성당에 성령기도회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이 저에게 와서는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남편이 위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가족들이 매일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던 중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준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저의 성당에 오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특사이십니다.” 저의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아주 간절히 말씀하셔서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미사를 봉헌한 다음 성체를 모시고 그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기도상을 잘 마련해 놓고 기도하셨는데 십자가 밑에는 “주 하느님, 저를 어루만져 주소서.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소서. 저를 붙들어 주시어 성한 몸이 되게 하여 주소서. 저는 주님 한 분 만을 기다립니다.”라는 글을 써 붙여놓았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남편은 그야말로 개차반으로 살았습니다. 술과 더불어 함부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병이 들었습니다. 결국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그런 남편이 미운 것이 아니라 측은해 보이고 불쌍해 보였습니다. 원수같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그 왜 진작 더 큰 사랑을 주지 못했을까? 사랑으로 품었으면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집을 찾아들어온 것이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못 다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그야말로 탕자가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 때문에 가정으로 향했고 가정은 그 모든 것을 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택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았기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살아난 것입니다.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베풀고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3일째 되는 날 감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특사가 기도하였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성한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상처를 고쳐준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부간, 부자간 화해와 용서를 이루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으니 그것이 성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인생여정 안에 마지막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것이 구원인데 말입니다.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증오, 시기질투의 마음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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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본론이 전개됩니다. 미움 받을 짓을 한다든지, 저주하거나 학대하는 등 사랑을 모르는 자들까지도 이 나라에 초대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사랑의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사울 임금의 부하인 다윗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살려준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생각하기에 사울 임금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의 제2독서는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사오 바오로가 부활 신앙에 대해 설명해 주는 내용입니다. 아직 하느님 신앙이 약하고 매사에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그리스인들에게 창조 신앙과 아울러 부활 신앙을 설명하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말씀의 초점은 하느님 신앙이 없거나 취약한 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과제에 모아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무슨 말로 축복할까요? 우리를 학대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도 사랑을 가르쳐주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숱한 기적과 도움을 행하시고 나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동임을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비유의 소재들은 청중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거나 사물이었습니다. 저는 축구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축구는 지구촌 전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 종목입니다. 열 명이 공격과 수비를 나누어 맡고 골문을 지키는 선수가 있어서 한 팀에 모두 11명이 경기를 합니다. 축구공을 상대편 골문에 넣으면 득점을 하고 많이 득점한 팀이 이기는 규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축구는 발로 공을 차서 옮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온 몸을 써서 움직여야 하고 또 혼자서가 아니라 팀 전체가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머리도 써야 합니다. 관중이 보기에 재미있는 경기는 박진감이 넘치고 공격적인 경기입니다. 그 반대로 수비 위주로만 경기를 하면 아주 재미없는 경기가 됩니다. 하지만 늘 수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조직적인 전술로 공격을 다양하게 해야 하지요.
3.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수비적 사랑이 기본인데 이는 악에 물들지 않고 사랑을 모르는 자들을 닮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공격적 사랑은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그것도 지능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악인들의 감독은 마귀이기 때문이고, 마귀는 사람보다도 더 교활하고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팀 감독도 성령으로 삼고 그 이끄심에 따라야 합니다. 모든 악은, 미움이나 저주나 학대도 자기 파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그가 비록 악인이라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본 속성을 잘 알고 사랑의 축구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멀리하면서도 악인을 끌어당길 수 있는 작전이 기본이 됩니다.
4. 본시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바빌론 문명권의 칼데아 우르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왔습니다. 그 후, 그 자손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이집트 땅으로 더부살이를 하러 가게 되고 그곳에서 인구도 늘어났지만 이를 두려워한 이집트 파라오로부터 종살이를 혹독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이들을 해방시키셨지만, 가나안 땅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러 이민족들의 우상 숭배 풍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많이 물들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으로 지명받은 사울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그분의 백성으로 이끌려는 생각보다는 주변 민족들과의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더 강했기에 끝내 하느님의 눈에 벗어나 궁지에 몰렸습니다. 전쟁에서는 패배했고 민심은 떠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 상권 26장의 상황의 배경이 그러합니다.
5. 다윗은 이런 사울의 부하로 전공을 많이 세워 높은 계급의 장군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만 사울처럼 우상 숭배에 물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다윗의 인기를 시기한 사울이 그를 죽이려 들었지만, 그는 그 미움을 닮지 않고 사랑으로 되갚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로가 그를 다음 임금이 되도록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놀라운 개인기를 선보인 셈입니다.
6. 그 다음 제2독서에 나오는 코린토의 상황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 지중해 세계는 정치군사적으로는 로마제국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경제문화적으로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는 인구도 적었고 농사도 빈약했기 때문에 생산물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에는 인구도 많았고 농사 지을 땅도 넓어서 물산이 풍부했습니다. 그 풍부한 물산을 수탈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모았다가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동력선이 없어서 사람의 힘만으로 돛단배를 움직여 바다를 항해했으므로, 로마로 가기 전에 두 군데에서는 반드시 쉬어야 했는데, 그 중의 한 항구가 코린토였습니다.
7. 그래서 그리스의 수도였던 아네테보다 코린토가 경제적으로는 더 번창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죄악도 크고 많았습니다. 이런 코린토에서 사도 바오로는 잘 나가는 엘리트들보다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서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일단 코린토의 죄악으로부터는 벗어나게 했지만, 그리스식 사유방식에는 부활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요점이라도 알려주어야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해서도 이왕이면 논리적으로 부활 신앙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수행한 공격적인 선교방식이었고, 오늘 제2독서의 내용이 그 메시지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하느님 신앙에는 매우 불리한 여건 속에서 살면서 아주 이질적인 사유방식에 젖어서 따지기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어렵지만 대단히 훌륭한 사랑의 전략을 구사한 셈입니다.
8.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느님 신앙의 역사가 오래되었는데도 잘못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하느님과 사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을 두고도 시기하고 저주하는 자들까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사악한 음모를 꾸몄던 악인들은 사두가이들이었습니다. 그분께서도 그들이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임무를 악용하여 종교세와 성전세로 착복하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뒤집어엎은 정화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주도로 사형에 처해지시기는 했는데, 하느님을 모르고 짓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방식은 그들처럼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었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직접 드릴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9. 그 다음 악인들이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평신도 지식인들이었고 중산층 부자들이었는데, 자신들의 명성을 예수님께서 가로채 간다고 여겨서 미워했습니다. 이들은 사두가이들과 힘을 합쳐서 로마 총독의 손을 빌려서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공생활 내내 부딛쳤던 자들도 이들인데, 그때마다 설득하고자 하셨고 맞서셨지만 대놓고 불이익을 주신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신 방식은 그들의 율법 대신에 하느님 사랑의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10. 또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풀어주지 않고 비겁하게 십자가형이라는 판결을 내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배후를 조종한 자들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침묵을 하셨을 뿐 그에 대항하지 않으셨고, 묵묵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를 믿는 이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진리가 온 세상에 퍼지게 일하셨습니다. 이상이 예수님께서, 사랑을 모르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방식입니다.
11.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의를 일삼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아예 대놓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도 이런 사정은 더 심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모든 차원에서 사랑의 전략과 전술을 잘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개인기도 잘 익혀야 하지요. 무엇보다 함께 힘을 합칠 동료와 도와줄 사람들을 잘 찾아야 합니다. 신앙의 토착화와, 민족의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복음화는 그렇게 이룩되어야 할 선교 과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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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키엣 대주교님.
진실된 용서로 내 마음속의 미움을 걷어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과 용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를 나인 듯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사랑은 사랑을 전하고 또 다른 사랑을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의 좋고 나쁨을 규정짓지 않으셨고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정한 규정에 따라 상대방을 쉽게 심판하고 단정짓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아하고 사랑하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싫어하고 배척합니다. 나를 해치는 사람에겐 원수를 갚으려하고 그가 잘못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사랑은 피하고 사랑하기 쉬운 사람만을 사랑합니다. 나의 인간관계의 중심이 내가 아닌 남인 듯 언제나 피해자는 남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제발 좋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내가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또한 내가 규정지은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전에 먼저 비난하고 단정짓고 마음 속에 선을 그어버립니다.
입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은 시작됩니다. 나를 해한 사람, 나를 비난하고 멸시한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내 마음속에 충만할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타인의 잘못에 트집이나 비난도 하지 마십시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결백하고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그 어떤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아끼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 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코린토 1서 8,1-3)
용서가 어려운 것은 말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된 용서만이 나와 상대방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인 용서가 아니라 마음 깊이 용서함으로써 악연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적인 용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용서가 상대방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울림을 주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용서가 아닌 진실된 용서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이 아닌 내 마음속에 단단히 박혀있는 원한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과 증오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나 자신부터 먼저 증오와 원한을 버리십시오. 사랑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부터 먼저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은 촛불과 같아서 높이 올라갈수록 더 잘 타오릅니다. 이러한 사랑은 폐와 피에 스며드는 공기처럼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서로 멀어지는 세상, 서로 비난하고 자신만을 아끼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굳건하고 소리 없는 혁명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신비로움으로 영혼이 채워졌을 때 미움이 사라지고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인자하시고 겸손하신 사랑의 예수님, 저희의 마음을 고쳐주시어 주님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왜 배신이라고 생각했는지 돌아보십시오.
2. 나를 해한 사람을 용서해주었습니까? 그 후 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지금 그를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합니까?
3. 주님의 완전한 용서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지금 가장 불편한 사람, 싫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인해 나의 마음, 나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속의 불편한 마음들을 하나씩 꺼내 위로하고 떠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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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첫눈에 반한다.”
맞는 말일까요? 이런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그 시작을 미화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로닝겐대학교의 플로리안촉 교수는 많은 연인이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는 현상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연인들은 실제로는 서로 첫눈에 반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마음에 온기를 더해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그렇게 멋지거나 예뻐 보이지 않았음에도, 이내 현재의 좋은 감정을 기억의 빈틈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만남만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런 만남도 만들지 못합니다. 대신 서로 오랫동안 마음을 나눌 수 있는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진짜 운명적인 만남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계속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적 마음으로 사랑을 멈추게 되면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만이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계속 사랑하면서 우리는 운명적인 만남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운명적인 만남도 주님께서 계속 사랑해주시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계속된 사랑을 특히 완벽한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구약시대의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의 동족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인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는 원수들은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 생각했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곧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령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과 원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어느 누구만 사랑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증오와 분노를 없애는 방편은 사랑뿐입니다. 증오와 분노는 또 다른 증오와 분노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제거할 기회를 얻었지만,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기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연관된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래서 원수 같다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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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무엇이 당신의 영혼을 노래하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낸시 설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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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통령 후보에게 기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후보는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런 징후가 보인다면 선제타격으로 무력화 시키겠습니다.’ 법을 전공하신 분이라 그것이 법적으로 합당한 것인지는 미리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한 동안 이 문제가 사회적인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답변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민족을 공멸의 길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2003년입니다. 20년 전의 일입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 무기가 있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 군인도 많이 사망했습니다. 물론 이라크는 초토화 되었고, 지금도 이라크는 당시 미국 침공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적으로도 선제타격은 비난받을 여지가 많습니다. 선제타격은 미국처럼 거리가 멀고,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가 있어야 그나마 효력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선제타격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입니다. 국지전을 넘어서 전면전으로 발전하여, 모두가 공멸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와 공정은 옳고 그름을 놓아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어릴 적의 기억입니다. 친한 친구 석훈이와 사소한 말다툼으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석훈이는 저의 목을 조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열세인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목과 급소를 조였습니다. 지친 우리는 서로 조이던 손을 풀었습니다. 눈물도 멈추고 예전처럼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습니다. 그 후로는 다툴 일이 있었어도 서로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너무 아픈 추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였던 저와 친구도 싸움은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미 72년 전에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전쟁 기간 국군 사망자는 13만7천899명에 달합니다. 부상자는 45만742명, 포로는 8천343명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북한군 사망자는 군사정전위원회 편람 기준으로 52만 명에 달하며 실종자·포로는 12만 명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남한 지역 민간인 사망자는 24만4천663명에 달합니다. 전쟁 기간 남한 지역의 가축 피해는 소 19만8천889마리, 돼지 35만9천590마리, 닭 208만3천580마리에 달했으며 주택 피해도 61만2천636채나 됐습니다. 다시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면 엄청난 피해는 물론이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물려 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아픔은 우리 시대에서 끝을 내야 합니다.
저는 기자의 질문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의 공존과 발전을 위한 대책이 있습니까?’ 만약에 같은 기자의 질문을 받았을지라도 후보의 답변이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의 공격 징후가 발생하지 않도록 남과 북의 관계개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발생하지 않은 일을 가정해서 힘을 낭비하기 보다는 민족의 발전과 미래를 위한 방안을 후보들이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민족이 가야할 방향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가야할 방향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죽이려고 왔던 사울을 용서합니다. 사울이 하느님께 기름부름 받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선제타격하지 않았지만 하느님께 기름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다윗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결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는 십자가를 넘어 부활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이 긴장과 갈등, 대결과 분쟁을 넘어서 이해와 협력,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나라, 문화강국,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분쟁과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군사분계선은 생태계와 환경이 보존된 국제적인 관광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후보들의 정책과 미래비전에 큰 시금석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이런 삶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삶을 뛰어넘어 영으로 거듭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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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 갈망, 찬미, 사랑 -
“기도하고 일하라”, 베네딕도 수도회 모토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여 만나는 분들에게 참 많이도 휴대폰에 붙여줬던 “하늘과 산” 그림의 요셉 수도원 로고 스티카입니다.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땅보고, 기도하고 일하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위로 아래로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목운동의 영성”이라 유우머를 던지며 많이도 예로 들었던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 연결하는 다리 역할의 사람입니다. 이번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에서 새삼 깨달은 진리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존재 증명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결코 인간 신비는 해명될 수 없습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하느님 신비를 반영합니다. 사람을 통해 만나는 예수님이자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모르고 산다는 것만큼 어처구니 없는 일도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누구나 평생 하느님 공부는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나도 모르기에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사람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물론 사람 모두의 삶의 여정은 하닮의 여정, 하느님 닮아가기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까?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하닮의 여정에 오를 수 있습니다. 참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도 하닮의 여정에서만 가능합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아 참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닮의 여정을 위해 세 사항의 실천을 간곡히 권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끊임없이 갈망하십시오.
갈망해서 사람입니다. 갈망할 때 계시되는 하느님 꿈과 희망, 비전입니다.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원동력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그리움이 있어 비로소 영성생활의 시작입니다.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랑이라 수도자를 정의하는데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 모두가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 영성체후 기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사람 마음 깊이에 심어주신 갈망의 불입니다. 제 평생 소원이란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면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당신의 신망애가, 당신의 진선미가 되고 싶다.”로 시작되는 긴 기도문도 이런 갈망의 표현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다음 시편입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니다.”(시편63,2)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3,2-3)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람’이 바로 사람의 정의임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둘째, 하느님을 끊임없이 찬미하십시오.
하느님 갈망의 표현이, 그리움의 표현이 찬미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찬미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갈망의 표현이 찬미요, 하느님 찬미와 더불어 하느님 사랑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이 하느님 찬미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시편103,1-2)
“주님은 너그러우시도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시편103,8.10)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 시편 기도가 우리 모두 너그럽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은 부단히 우리의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며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시편전례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모습도 지니게 됩니다.”
제2독서 코린토 1서의 바오로의 고백처럼, 흙으로 된 그 사람, 아담의 모습을 지닌 우리들이지만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통한 은총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셋째, 이웃을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닮아갈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선사받습니다. 그러니 갈망과 찬미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과 함께 가는 하느님 사랑이며 더욱 날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구체적 사랑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느낌입니다. 이런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이 악의 세력을 무력화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마음이 그대로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이처럼 하느님다운 사랑으로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추상적 명사의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동사의 실천적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평생 주어진 과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우리는 이런 하느님다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문듣 “하은”이란 이름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줄인 참 좋은 “하은”이란 이름입니다. 바로 제2독서 다윗의 사울을 살려 준 자비로운 사랑의 다윗에게 하은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다윗의 자비로운 원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으로 위험했던 유혹에서 벗어나 사울을 살려 줌으로 하느님께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을 것이며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기대와 신망을 저버리지 않은 다윗이 참 고맙고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은 신뢰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이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하느님의 자랑입니다. 하느님의 여러분에 대한 기대와 신뢰, 사랑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세상 누구의 신뢰와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만으로 행복한 감동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평생 주어진 필수 과제가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자 ‘하느님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답은 단 하나 사랑뿐이요 예수님이 이의 결정적 롤모델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망하십시오.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끊임없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 모두를 사랑하십시오.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동사의 실천적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랑을 붇돋아 주시어 날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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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듣고 있으면, 이 계명들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 주고, 학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원수’(怨讐)란 자기나 자기 집안에 어떤 중대한 해를 끼쳐
깊은 원한이 생긴 사람을 뜻할 텐데,
이런 자를 우리가 어떻게 용서까지는 해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정말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비상식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근거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니신 자비와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곧 하느님께서 그러하시기에 그분의 자녀이기를 바라는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 자체로 정의한 요한 서간의 저자도
이 점을 명확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서 본디 그러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비와 사랑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는 그분의 속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계명들은 사실 ‘하느님’의 행동에서
그 주체가 ‘우리’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께 원수와 다름없는 이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당신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인자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오늘 계명은 당신 자녀들이 당신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호소인 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신앙인들은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고 또 닮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를 닮으려는 자녀의 노력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겨자씨만큼 작은 우리의 사랑을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는 나무만큼 성장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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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축복을 가질 수 있는 혁명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없이 다만 이웃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이 사랑의 선언도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이 사랑의 예가 다윗에게서 나타난다. 다윗은 그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1사무 26,2)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 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1사무 26,23). 이것이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울이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예시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삶을 다윗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6,27-38: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의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목(27-30절)은 가장 강하고 선동적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적개심을 능동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한다(28절). 이때 그리스도인은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오로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랑만이 비비 꼬여있는 폭력의 형태를 부숴 버릴 수 있고 인간관계에 깊이 박혀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다.
LA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한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던 사건이었다. 한 신자는 흑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흑인들이 들어오면 그냥 훔쳐 가는 일이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 생각한 끝에 그때부터 그들에게 “너를 믿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얼마가 지나자 그들은 주인 앞에 와서 돈을 치르면서,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졌을 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때 흑인들은 한인들의 상가를 불을 지르면서 피해를 줬다. 그러나 그 상점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거기에 오던 흑인들이 모두 지붕 위로 올라가서 “이 가게를 불 지르려면 우리도 함께 타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가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면서, 인격적인 관계는 이 위험을 피하게 해 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두 번째 대목(32-36절)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하느님 사랑이 순수한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바로 창조적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상호교환에 불과하고 상업적인 행위이고 계산이 들어있는 사랑의 유사품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없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과 그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 하시듯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35절).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재생시켜 감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35절)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랑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실천한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대목(37-38절)이 말해주고 있다. 자녀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로부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이 무조건적 사랑의 원인도 되시고 모델이시며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온 힘을 다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문화를 이루라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의 코린토 서간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고 그 모습을 이루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하느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적개심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사랑하기 시작하여 다윗과 같이 다른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줄 수 있는 삶을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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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 38)
사랑은
기쁘면서도
무척이나
힘이 든다.
사랑의 거울을
깨끗하게
다시 닦는다.
상대방과
나 자신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우리의 사랑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시다.
미움과 사랑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우리의
일상(日常)으로
내려앉는다.
사랑하지 않는
우리자신을
아프게 만나며
인정하게 된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사랑을
반성하는
주일이다.
내가 먼저
주어야
할 것은 분명
사랑이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에게서
참사랑을
배운다.
심판하지 않는
사랑이며
단죄하지 않는
사랑이다.
주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는
사랑의
주고받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라신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다.
모순덩어리인
우리들에게
사랑은
주는 것이라
다시금
가르쳐주신다.
이와같이
사랑의 근원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사랑을 나누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알 턱이 없다.
올바른 사랑은
아름답다.
우리는 서로
적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거기에
최선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
인간해방은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을
주고 받는
은총 넘치는
주일이다.
주고 받고
나누고
되돌아오는
놀라운
사랑의 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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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 예수님의 계명들에 자주 나오는 ‘사랑’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선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덕’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하느님의 선’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해 주어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선’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인도하는 방법이 ‘선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두 ‘선’을 실현하는 ‘선한 방법’들입니다.
증오심, 저주, 앙갚음 같은 ‘악’으로는 ‘선’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무턱대고 잘해 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것도 ‘사랑’입니다(마태 18,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는데(요한 13,1),
제자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루카 9,55).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혼나기까지 했습니다(마태 16,2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혼내신 일들도 모두 사랑입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좀 과격한 방법으로
쫓아내신 일도(마태 21,12) 그들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미워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고 꾸짖으신 일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29-31).”
이 말씀은, “앙갚음을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선’으로만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루카 6,32-34).”
이 말씀은, “울타리를 만들지 말고, 편 가르기도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편 가르기를 하고,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또 이 가르침은,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원수’는 원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모든 사람’이 다 ‘이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을 주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이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 같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 때문에 고민하기 전에 먼저,
나도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죄인인데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처럼 ‘그 누군가’도 많은 것을 잘못하고 있는 나를 용서하고,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있을 수도 있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습니다.)
자기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어려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이 말씀은, “신앙인에게는 남을 심판하고 단죄할 권한이 없다.
용서하고 사랑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과 단죄는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과 ‘단죄’는 ‘공적인 사법제도의 운영’이 아니라,
‘사적인 앙갚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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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1사무 26,2.7-9.12-13.22-23)는 다윗이 사울을 두 번째 살려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엔 게디 광야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참았고(1사무 24,1-23). 지프 광야에서도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또 참았습니다. 왕권에 대한 주님의 뜻이 사울에게서 떠났다는 것을(1사무 28,17) 알았지만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 이를 죽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하느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친다는 명분으로 가져오지 말았어야 할 가장 좋은 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많이 가져왔고(1사무 15,10-31), 질투의 대상이었던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명목으로 놉의 사제들을 죽였기 때문에(1사무 22,6-19) 하느님의 미움을 샀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던 것입니다. 사울이 사촌인 아브네르(1사무 14,50)와 삼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데리고 지프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왔으나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셨기 때문에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을 가져와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다윗의 부하 아비사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권유하지만, 다윗은 창과 물병을 사울에게 되돌려줍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보복이란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주시는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에 다윗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루카 6,27-38)은 박해자들을 위해 선행, 축복, 기도,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아주 좁은 의미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 “동족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미움”, 이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원수들과, 너희를 미워하며 쫓아다니던 자들 위에 이 모든 저주를 내리실 것이다.”(신명 30,7)라는 율법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바빌론 유배를 겪은 뒤에는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와 가나안 땅 정착 때의 상황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잠언 25,17)라는 원칙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평지설교: 6,17-26)을 원한다면 원수들에게 선행, 축복, 기도,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만 지극히 높으신 분(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들이란 당신의 제자들을 미워하며 내쫓고, 모욕하면서 중상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방어하거나 저항할 힘도 없고, 생존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가난한 제자들에게 폭력을 쓰는 사람들, 인간의 기본권을 말살하려는 사람들, 무조건 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자기들을 미워하는 이들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선행으로 맞서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이들에게 축복하며, 학대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어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기도는 원수를 용서하면서 사랑할 수 있도록 기다리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원수를 이처럼 헌신적이며 투철하게 사랑해야 하는데,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사랑하고(황금률: 레위 19,18),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서 그만큼 자비로워지라고 합나다(레위 11,44-45; 마태 5,48; 요한 13,34).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 같이 살라면 아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만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우리 품에 담아주시는 곳, 우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우리도 되받게 해주실 하느님 나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현해야 할 이상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유다인들의 법정에서조차 재판관은 피고의 겉옷을 빼앗을 권한이 없었습니다. 밤낮의 온도차가 많은 곳이라서 밤을 지내기 위해 정작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중요한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 덜 중요한 것까지 내어줌으로써 박해를 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폭행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 구차하지만 달라면 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런 시대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의 완성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약인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을 삶의 원칙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지, 내가 남에게서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영원한 이상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싫다면 남도 싫어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실천한다면, 비록 쉽지는 않지만, 폭력도, 인권말살도, 강요도 없을 것입니다.
유다인의 전통에서 정의의 개념만 중요했었지, 원수에 대한 사랑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가는 이를 돌보아준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5-37)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이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근거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상황은 예수님 시대와 많이 다르지만, 원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늘 있어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보복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남에게 원하는 만큼 해주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이 삶의 지혜라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은 받아들이기 정말 힘듭니다. 차라리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고, 마음도 편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제2독서(1코린 15,45-49)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부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부활하시어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1코린 15,20)를 바오로는 “마지막 아담”으로 부르면서 우리도 그분처럼 부활할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육체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생명을 주는 영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셨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죽은 뒤에는 영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갈(창세 2,7) 인간이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하늘에 속한 분께서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이미 예수님의 부활의 과정 속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에페 2,5-6).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았기(창세 1,27) 때문에 모든 역사의 목표인 하느님의 새 창조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를 닮는다면, 죽어서도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보복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사람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늘 함께하시며, 그것은 바로 원수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단순한 이론이나 윤리적 이상향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닮기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삶의 원칙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죽은 것처럼 살지 않기 위한 것이며, 부활의 삶,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며,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이 미움을, 생명이 죽음을 이겼다는 표징이며, 종말에는 자비가 증오심을 이긴다는 승리의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이 아니라 자비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자비를 익혀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자비로운 행위이고, 또 하나는 자비로운 말이고, 마지막 하나는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선행과 자비를 베풀고, 기도를 통해 축복해주는 것을 자신을 다스리는 삶의 원칙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결코 우리를 게으르게 놔두지 않고,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자비를 베풀 때는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좋은 약이기도 합니다. 자비는 자기가 독선적일 수 있고 틀릴 수도 있음을, 상대가 때로는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는 오늘 화답송(시편 103,1-8)이 잘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받은 자비 때문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미움과 갈등 때문에 비록 힘들고, 때로는 멀리 도망치고 싶지만 한 주간 또 사랑으로 버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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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씀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성화(聖化) 성소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단절된 세계로 들어가고, 금욕과 절제를 통해 육신의 욕구를 끊어버리며,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통해, 성화된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성(聖)과 속(俗), 초자연과 자연, 세상과 교회를 가름으로써, 소통의 단절을 초래해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고, 그 거룩함을 실제 삶에서 발견하고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존재로 지음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거룩함으로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화성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계시며 행동하시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거룩함은 매우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인간과 세상만물의 창조(창세 1-2장), 파라오의 종살이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탈출 3,7-15),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구원하시며 희망을 주심(이사 43), 정의(아모스), 애절하고(아가서) 한결같은 사랑(호세 11,8-9) 등.
하느님께서는 있음 그 자체로 거룩하시며, 그분의 행위 또한 거룩하십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거룩함은, 하느님의 자비, 정의, 창조, 해방 등 하느님의 본질을,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익과 효율의 추구, 성공을 위한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와 행동방식이 지배하는, 세상의 이치와는 달라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내면의 거짓 평화나, 나 홀로 느끼는 거짓 영적 충만감이 아닙니다. 따라서 세상과 교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별천지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으며, 정치이념의 틀에 갇혀 계시지 않고,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하십니다.
이처럼 참 거룩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맺으시고,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이방인을 배려하고(레위 19,10),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소유를 착취하지 않는 것(19,13)을 포함합니다. 한마디로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19,18), 사회적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성화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함 안으로 들어가며, ‘하느님의 성전다운’(1코린 3,17)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어리석고 약한 것, 비천하고 천대받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지혜로워지고(3,18) 거룩해질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거룩함을 반사하는 하느님의 사람답게, 소유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려야겠습니다(마태 5,38-42).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악인과 불의한 사람도 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5,48) 힘쓰는 성화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성 아우구스티누스)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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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사랑만이 영원하며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지난 세월 돌아볼 때마다 후회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때 딱 3초만 참았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그때 아무 소리 말고 뒤돌아 나와 버렸더라면...하는 생각 참 자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는 다툼의 발단은 너무도 사소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부터 미움이 시작됩니다. 미움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복수심을 낳습니다. 복수심은 결국 행동으로 옮겨져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은 사람은 또다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잠재된 강한 복수심, 용서하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예 바보처럼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상대방의 무례함 앞에 아예 응대조차 하지 말 것을, 복수심이나 증오심을 원천 봉쇄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마음 한번 돌리면 거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라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의외로 천국 체험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음에도 불구하고, 딱 3분만 참을 때 바로 거기서 천국은 시작됩니다.
우리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을 조금만 자제할 때 거기서부터 천국은 시작됩니다.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마음 한번 돌려 진정하는 것이 천국에 드는 길이며, 구원받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은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기본 원칙 중에 하나가 동태복수법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해준 그대로 나도 똑같이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베푼 은혜에 대해서는 확실히 보답하고, 내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논리는 우리 논리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저주하고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마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던 인내의 예수님이셨습니다.
때로 한번 참는 것, 크게 용서하는 것이 비굴한 처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 발자국 물러서는 일은 결국 덕을 쌓는 길입니다. 자아를 깨치는 길입니다. 자기 해방을 실현하는 길입니다.
결국 예수님 일생의 궁극적 결론은 사랑입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 원수마저 포용하는 큰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강렬한 사랑,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어가는 강물 같은 사랑을 얻기 위해 힘쓰십시오.
결국 사랑만이 영원하며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이웃 앞에 침묵한다면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이웃 앞에 말을 한다면 사랑으로 말하십시오. 이웃 잘못을 고쳐준다면 사랑으로 고쳐 주십시오. 이웃을 용서한다면 사랑으로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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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하고 싶다면: 그리스도 없이는 용서도 사랑도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분명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만으로는 우리 힘으로 용서와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잘 압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지 못함을 우리는 매번 주님의 기도에서 되새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을 심판하지 않나요? 알면서도 남을 심판합니다.
안다고 절대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법은 그 법을 제정한 주체가 언제든 그 법을 어길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야 지켜집니다.
인간의 원죄 성향이 그토록 큽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사제들이 당시 율법을 다 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사랑과 자비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옆에 계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선 나의 거울이 되어주셔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라는 거울로 내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 ‘밀양’(2007)에서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도 자신도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보지 못한다면 용서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에서 이것이 잘 표현됩니다.
재수생 동생은 대학생 형과 매우 사이가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재수생 동생은 어떤 사고 이후로 계속 기억이 지워지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형은 친형이 아니라 그 동생에게 부모님이 살해되어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입니다.
성장하여 원수를 찾았지만, 원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연기자들을 부모님으로 만들고 자신은 형 역할을 하며
동생이 살던 집을 수리하여 기억을 찾아주려 했던 것입니다.
동생은 형을 사랑했지만, 형이 조금씩 보이는 이상한 행동에 위협을 느낍니다.
심지어 부모도 이상합니다.
자꾸 자신을 아들이라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불안함 속에 집을 탈출합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경찰서입니다.
경찰서에서 자기 가족이 자기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경찰은 이 사람이 조금 이상한 것을 알고는 나이를 묻습니다.
그는 재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4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거울 좀 똑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거울을 들여다본 그는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버렸던 살인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거울이 되어 그 사람이 지은 죄나, 내가 지은 죄가 오십보백보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자신의 눈의 티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원수도 용서합니다.
예수님은 음탕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도 화를 내며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만 동행만이 내가 감춰두었던 내 눈의 들보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워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의지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믿음은 내 안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 덕분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고정원 씨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외아들을 잃었지만,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기 양자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본인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며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울고 있을 때 한 신자의 선교로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성체를 영하며 누구도 할 수 없는 용서의 길을 갈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유영철의 다른 피해자 가족들은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느냐며 고정원 씨보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고정원 씨는 자기 4대 독자 아들을 죽였으니, 이제 유영철보고 자기 아들이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옆에서 동행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내 안에 계신다고 믿어야 용서에서 멀고 먼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경지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위해 사형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도 주님을 믿어 나와 함께 천국에 살도록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도 자신처럼 나비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자신처럼 나비가 되도록 목숨을 다해 그들에게 믿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으려 했고, 또 의지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분과 하나임을 믿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랑에 이르려면 이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 태양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에 핵전쟁이 벌어져 온 하늘이 분진으로 검게 닫힌 상태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태양이 도달하지 않아 땅은 황폐해지고 먹을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벽돌 사이로 잡초가 하나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태양이 다시 비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잡초 안에는 태양의 빛과 열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잡초를 보면 태양이 보입니다.
이는 먼저 내 안에 태양을 바라고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보입니다.
태양을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잡초만 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은 이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이 태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음을 알아서 모든 생물 안에서 태양을 발견하듯, 하느님의 성자와 성령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기에 당연히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삼위일체 모습을 지닌 인간을 볼 때는 어떠할까요? 그 사람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서도 사랑하는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수준도 아닙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갓 10살이 넘은 나이에 자신을 수십 차례나 찔러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하겠느냐는 고해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계심을 믿을수록, 그 친밀한 정도에 따라 용서와 사랑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우리 사랑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만 증가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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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7 주일-묵상과 기도
사무엘기에서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땅에 막겠다는 부하의 요구를 그분을 헤치지 마라.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을 받지 않겠느냐?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주님은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었으나 주님의 기름부음받은 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첫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 첫인간은 땅에서 나왔으나,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다. 우리는 흙의 사람 모습을 지녔지만,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분께서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지프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다.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꽂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다윗은 맞은쪽으로 건너가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응답하였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1사무26,2.7-9.12-13.22-23
형제 여러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1코린 15,45-4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27-38
실천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악한 자들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면 의당 자기의 잘못과 죄값을 받으면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죄인들이 갖는 마음을 갖지 마라. 죄인들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수를 넘어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남이 그들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해주고 바라지 말고 꾸어주고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들이 주면 받을 것이고 주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품에 담아주실 것이며,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되받을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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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가 상충하는 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원수가 있으면 원수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그와는 반대로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물론 본질적으로 정의라는 말씀을 언급은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하느님 말씀 그 자체는 정의를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묵상거리가 많이 있지만 특히 저는 한 부분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35절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저는 여기서 '그리고' 순접 접속사의 범위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해서 혹시나 해서 영어성경을 보니 앞과 끊어진 게 아니고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는 것과 이어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상 의미는 맞지만 저는 여기서 조금 다르게 묵상하고자 합니다. 앞 말씀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는 의미의 '그러면'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부사입니다. 흔히 아는 인과관계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원인이 되는 내용을 전제로 했을 때 새로운 사실을 주장할 때 두 가지의 경우로 사용됩니다. '그리고'의 의미를 병렬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부사이지만 문법적인 내용만을 가지면 어디서 어디까지 의미를 끊어서 병렬로 연결한 것인지는 전적으로 오늘 복음의 내용만으로는 명확히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인간의 언어가 가진 논리로만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점을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봐라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리고' 접속부사를 앞 문장 전체를 연결하는 접속부사로 생각했을 때 의미 있는 묵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고 나서 받을 상이 큰 상을 것을 받기도 하고 하느님의 자녀도 된다는 의미보다는 이렇게 했을 때 받을 상도 크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런 연후에는 최종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된다고 하신 의미로 만약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게 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복음 전체 내용이 순조롭게 논리적으로 좀 더 자연스러운 설명이 될 듯합니다. 말로 표현하면 내용이 쉬운데 글로 표현을 하려다보니 조금 표현이 어렵긴 어렵습니다.
최종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냥 단순히 세례만 받았다고 된다면 굳이 이런 말씀은 하실 필요가 없고 또 존재의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례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녀로서의 역할을 해야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으로만 놓고 본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럼 불가능하다는 것일까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불가능한 내용이라면 저희에게 요청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불가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설정한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가능할 리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설정한 것을 해제해야만 이 한계를 넘어설 수가 있을 겁니다. 해제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어렵지만 하나씩 하나씩 점진적으로 그게 실천이 되도록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 열매는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께서 그런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힘들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자에게 제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은총을 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분명 그럴 분이실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같은 범인이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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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연중 제7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생명의 말씀
우리는 참 가톨릭적인 사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황금률이라 합니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들이 전하는 종교적인 가르침일 뿐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입니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와 더불어 사회 문화적 가치 그리고 윤리를 긍정하는 모든 이에게 행위의 근원
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함께 사는 삶을 이해하는 평범한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며 간직하려는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보편성을 지닌 황금률은 시간, 장소, 문화, 민족의 한계가 없습니다.
기간 한정, 지역 한정, 인물 한정 없이 소중한 가르침으로 지켜져 왔습니다만, 그 실현은 녹록지 않습니다.
그 현실적 가르침이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서 공자와 자공의 이야기로 전해 옵니다.
자공이 말합니다. “남이 나에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나도 남에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승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야,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안도감이 몰려옵니다.
이 글을 발견하고 또 다른 보편성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황금률에 담긴 보편적인 가치를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모두가 보편적으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그 보편성에 안도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 마땅한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에 부끄러운 마음을 나만 갖고 사는 것이 아니었어.
가르침의 현실을 나만 못 사는 것이 아니었어.’ 현실이…. 그렇습니다.
좋은 가르침이고, 당연한 말씀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내가 바라는 그대로 해 주고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내가 바라는 대로 남이 해 주어야 하고 남들이 나에게 착한 일을 해 주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황금률의 반작용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보편적인 황금률뿐 아니라 종교적 윤리를 대하는 마음도 비슷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내 뺨을 때리면 나도 때립니다.
내 것을 가져가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탕 하나 더 주고, 뺨을 때리면 지갑도 내주며,
내 것을 가져가면 덤으로 더 주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유치부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다시금 우리의 보편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아주 보편적인 모습으로 그 보편성을 살지 못합니다.
나만 그런 거 아닙니다. 알고 보니 옆 사람도 그렇습니다. 건너편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아주아주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교인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오늘 복음 말씀을 건네시는 겁니다.
잘하고 있으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해보라고, 잘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래도 해 보라고, 잘 좀 해 보라고.
그렇습니다. 잘 안 되는 거 아는데도 해보려 애쓰는 것이 보편적인(catholic) 신앙인의 보편적인 일상입니다.
김한수 토마스 신부 | 종로성당 주임
연중 제7주일 복음(루카6,27~38)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29)
루카복음 6장 27절과 28절에는 2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 '휘민'(hymin)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명령의 대상을 '너희'라고 하는 데 반해, 루카복음 6장 29절부터 31절까지는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 '세'(se) 즉 '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2인칭 복수에서 단수로 전환한 것은 이 말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개인을 보다 깊게 성찰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리고 '뺨'에 해당하는 '시아고나'(siagona; cheek)는 정확히 사람 얼굴의 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턱' 또는 '턱뼈'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5장 39절에서는 '오른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 근동에서 손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오른뺨을 때렸다는 것은 정면에서 손등으로 쳤을 경우나 뒤에서 손바닥으로 쳤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다 풍습으로 볼 때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두 배나 모욕을 주는 것이다. 또한 등 뒤에서 때렸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의의 공격을 받은 것이 된다.
그러나 본문은 이때에 오히려 '다른 뺨'도 돌려대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제로 왼편 뺨까지 때리도록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라도 직접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고통과 모욕을 견디라는 교훈이다.
원수들의 경멸적인 폭행을 당하더라도, 같이 대적하여 맞서기보다는 사랑의 원리로 무저항, 무보복의 행동을 보이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에 직접 대응하여 복수가 악순환되는 것을 막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관용과 무저항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는 말이다.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라'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5장 40절은 루카 복음 6장 29절의 후반절과는 달리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사가는 속옷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을 수 없다는 율법의 규정을 잘 알고 있는 유다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탈출22,25~26).
속옷은 겉옷보다 가격이 싸고, 보잘것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반면에 겉옷은 가격도 비싸고,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티나에서 밤에 덮고 자야 하는 필수품이므로, 전당잡힐 수조차 없는 품목이었다(탈출22,26; 신명2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에게 더 비싸고, 없으면 당장 추위에 떨어야 하는 겉옷까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양도하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재산상의 분쟁이나 강도를 당한 상황에서 속옷조차 취하려는 상대에 대하여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을 베풀라는 뜻이다.
반면에 루카복음은 중요한 것을 달라는 이에게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주라는 뜻으로 겉옷을 먼저 언급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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