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이 없다. 기억은 있지만 추억은 없다. 많은 시간 동안 수업을 받았지만 수업에 관한 추억은 없다. 추억이 없는 경험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내 학창시절의 삶을 유예하고 미래를 준비했던 것이다. 현재의 시간을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공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반 아이들에게 지금의 시간을 인내하고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하자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학교는 현재의 삶을 유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즉 학습은 미래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삶과 앎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사최수프를 계속하고 있다."-<오늘의 교육 2018.1-2월호 115쪽>
장지혁(광주 한울초) 선생님의 수업공개 교사의 이야기 끝부분이다. 어제 오늘 여기까지 읽었다. 더 읽으면 리뷰를 쓰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 일단 책을 덮었다. 나는 왜 꼭 리뷰를 쓰려는 것일까? 다른 글도 그렇지만 특히 리뷰를 쓰는 일은 버겁다. 남의 글이나 심리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이 나로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왜 쓰지 못해서 안달일까? 일단 내 마음 속에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안 쓰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장지혁 선생님의 수업공개 교사 이야기를 더 읽어보자.
"군 시절, 전에는 관심이 없었던 교육 관련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중에 이혁규 님이 쓴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도 있었다.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에 내 수업은 도입, 전개, 정리 단계를 밟아서 지리문 몇 개를 던지고 끝냈던 터라 더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웠다. 과거가 반성이 되기도 했고 수업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역 후, 수업에 빠지기 시작했고 수업을 돌아보는 '수업 복기'도 꾸준히 하고 있다."
장지혁 교사는 '수업 복기'라는 것을 한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수업 복기라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 그도 나처럼 마음 속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안 하면 우울해지지는 않았을까? 실 없이 해보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장지혁 선생님은 '수업 복기'를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긴 하다. 장지혁 교사의 수업을 참관한 이혁규 교수의 다음 글을 읽으면서 해본 생각이다.
"장 교사는 자신의 수업 실천을 돌아보고 부지런히 자신의 블러그에 올리고 있다. 사최수프를 비롯해서 장 교사의 수업이 해마다 개선되는 이유는 이런 꼼꼼한 수업 복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의 많은 교사들이 수업 설계와 실행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수업이 끝난 후에 이를 꼼꼼하게 돌아보지는 않는다. 수업을 돌아보는 것이 수업 실천에서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교사의 블로그를 읽다가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는 글, 내 마음대로 적어야겠다."라고 쓴 글을 발견하고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많은 교사들이 장 교사의 블러그를 참고하고 좋은 자극을 받기를 희망한다." -103쪽
그 앞에 이런 글도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바로 좋은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 방법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런 방법적 지식이 한국의 실천 교육학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그 점에서 사최수프는 정교한 방법적 지식이 수업 실천의 완성도를 어떻게 높이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한국의 교육계는 이런 실천의 공동 지식을 만들고 이를 소통 가능한 언어로 표상하는 활동을 더 많이 수행해야 한다." -102쪽
사최수프는 '사상 최대 프로젝트'의 줄임말이다. 이혁규 교수가 참관한 장지혁 선생의 수업 이름이다. 1년 동안 진행하는 이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을 것인지 이 교수는 고민한다. 결국은 방법을 찾았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오늘의 교육>을 통해서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런 방법적 지식이 한국의 실천 교육학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이 대목에서 내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오늘의 교육>에 이혁규의 수업비평이 연재되는 것이 나는 퍽 다행스럽다. 혹자는 이런 수업비평이나 수업개선이 우리 교육의 근본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주장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이 현실의 학교 수업과정에서 고민되고 실천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수사로만 그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편집위원회 좌담에서 언급된 '정직한 절망에 직면하기"라는 수사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너무 근본만 성찰하다보면 어느 시대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정직한 절망에 직면할 용기를 갖자는 말은 지금 이 시대에, 특히 우리 교육계에는 너무도 소중하고 필요한 요청이다. 내가 <오늘의 교육>을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가끔은 단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정독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럽기는 하다. 그럼에도 마음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까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오늘의 교육>에서 학교(교사)의 일상이 소외되고 있다는 일말의 유려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는 하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오늘의 교육>을 평가한 주수원 님의 <교육과 사회의 중매자로서 <오늘의 교육>에 거는 기대'를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읽었다.
<오늘의 교육의 놀라운 성취는 이야기가 교사 노동자를 넘어서 교사 사회인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 교사 집단 역시 교육을 교실 안의 좁은 공간으로 끊임없이 환원시키려고 한다. 그처럼 강한 구심력 속에서 <오늘의 교육>은 이 사회를 향한 원심력을 발휘한다. 교육을 교사와 학교에서만 가두지 않고 학교 바깥으로 탈주시킨다. -28쪽
주수원님의 눈에 비친 <오늘의 교육>의 장점이 나에게는 단점으로 다가온 셈이다. 그러니 내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다. <오늘의 교육>이 "그처럼 강한 구심력 속에서 이 사회를 향한 원심력을 발휘한' 것이라면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나 또한 그런 <오늘의 교육>의 강한 원심력 속에서 구심력을 고민한 셈이다. 이런 나의 고민은 이혁규 교수의 "이런 방법적 지식이 한국의 실천 교육학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뼈아픈 지적과 무관하지 않다. 교육의 문제는 결코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학교(교사)를 떠나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의 교육> 이번 호를 읽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뻔 했을 장지혁 선생님의 이 말씀 속에서 나는 교육의 근본을 생각해본다.
"학교는 현재의 삶을 유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첫댓글 수업 비평 연재가 이 글을 마지막으로 끝나서 아쉽네요
그렇군요. 저도 많이 아쉽네요. 다른 기획으로 학교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