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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묵상글 들 ( 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위에서 오는 지혜를 받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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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위에서 오는 지혜를 받아
오늘 야고보서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저는 저의 얘기를 가지고 오늘 나눔을 시작할까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하느님 은총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 면에서 나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그리고 어렸을 때도 옳지 않은 것을 욕심부리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그러니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 못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저는
그리 어릭석지는 않았고 일이나 관계 면에서 늘 옳고 그름을 잘 분별했습니다.
지혜란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인생이 불행하지 않게 하는 것인데
이 면에서 저는 지혜로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길을 알고 난 뒤
저는 그래서 늘 '나는 행복하다.'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린만큼 저의 지혜가 성숙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미성숙은 불과 5년 전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혜 면에서 저의 미성숙함이란 너무 시비지심이 강한 거였습니다.
옳고 그름을 너무도 잘 가리고 많이 가리는 바람에
자주 사랑을 놓치고 경직되고 칼을 이웃에게 들이대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실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아니, 반은 지혜로웠고 반은 지혜롭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 은총 덕분에
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고,
인격적으로는 점차 겸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은총은 늙어감과 약해져감의 은총입니다.
이 은총들 덕분에 시비지심은 사라졌고,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전과 비교하면
제가 평화롭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고 유순해졌습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란 은총으로 주어지는 지혜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주시는 은총을 다만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은총을 받지 않았으면 그렇게 교만한 제가 겸손해질 수 없었는데
은총을 거절하지 않은 덕분에 제가 겸손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이란 나이 은총입니다.
나이 먹어 약해졌기에 겸손해진 은총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나중에 딴 소리할지 모르지만
나이를 먹고 약해지는 것은 참으로 은총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지혜로워졌으며,
시비지심 대신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해졌다고 한 것은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일 뿐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얼마전에 말씀드렸듯이 나이를 먹을수록 제가 약해졌으며
그래서 미풍에도 흔들리는 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그러므로 은총을 더 받아 위에서 오는 지혜가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음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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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르 9,2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든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망신당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스승을 망신시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스승을 욕보였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망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그는 믿음과 동시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겸손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이는 마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더 더 더 믿으십니다. 그러니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그 믿음으로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주님의 믿음에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의탁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주님의 믿음에 대한 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권능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말씀의 권능을 깨우쳐주심과 동시에,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 9,28)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아이를 고친 것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또한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도 망신당하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믿음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믿음을 바라보는 일이며, 그분의 믿음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분의 믿음에 의탁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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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는 기도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신부님은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실은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는 기도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기도를 소홀히 하였으니 속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실은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 “예, 기도해 드리죠.” 하고 대답하고는 잊어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죄송한 마음으로 그 잊었던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 불안해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건강을 유지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답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면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요한 사도는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5).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온 마음을 기울여 기도에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에도 기웃거리거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성 치쁘리아노). 따라서 기도를 하려거든 믿음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9,28-29).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힘은 바로 기도에서 나오는데 기도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고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파고드는 더러운 영의 세력, 즉 누군가를 향한 시기, 질투, 분노, 미움, 증오, 적개심, 탐욕, 교만 등이 느껴질 때 더욱 기도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을 보면 복음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니라 기복적인 믿음, 또는 신심 위주, 활동 중심의 믿음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고,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며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내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능력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맺음하는 가운데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무던히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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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심으로써 새 땅을 펼치시려던 예수님께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마귀와 그 하수인들이었고, 그들이 퍼뜨리는 사회악이 하나의 현상으로 사람들 속에 퍼져있었습니다. 그 마귀현상은 종종 영적 면역력이 취약한 사람들에게 침투하여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악인들이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선을 대적하고자 했다면, 탐욕이나 이기심으로 영적 면역력이 취약해 진 죄인들은 마귀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당시에도 제법 많이 퍼져 있던 악인들과 죄인들을 염두에 두고 신자들에게 이 마귀의 계략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권고를 해주었습니다. 이 사도적 권고는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하고, 의로움을 견지해야 하며, 거룩함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감으로써 그 의로움을 거룩하게 증거해 보여야 한다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모진 시기심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진 이기심을 품고 있으면, 자만하게 되거나 거짓말을 하게 되어 악에 빠지는 것이 되므로 조심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따라서 둘째, 의롭고자 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향하여 손해를 보더라도 자비를 베풀어서 관대하고 유순하게 대해야 하고, 그래서 그 의로움의 열매를 거룩함으로 맺어야 합니다. 셋째, 악인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같은 의인들에 대해서 희생을 감내하는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물론 유혹이 닥칠 때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마귀 현상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나라들에서 이 마귀 현상은 더 심한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의 권고를 귀담아 들음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영성적인 교훈으로 삼고, 교회적으로는 선교적인 전략의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야고보의 사도적 권고를 간추려서 말씀드립니다. 첫째, 모진 시기심과 이익에 눈먼 이기심을 품지 말 것. 둘째, 의인들 가운데에서 손해와 희생을 감내하여 평화를 유지할 것.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영적 기운을 충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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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진실만을 이야기한다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늘 좋아질까요?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상대는 절대로 오해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너무나도 부족한 존재입니다. 1분 전에는 죽고 못 할 만큼 친하다가도 1분 후에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비는 살벌한 관계로 돌변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복잡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단순화시키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꼭 진실이고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으로 우리는 믿는다’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모두는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 아닐까요? 진실인 것 같지만 거짓이고, 자신이 옳다는 판단으로 남을 단죄하면서 자신의 주위를 나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자신을 낮춰서 이 땅에 오셨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교만할까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후 타볼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런데 타볼산에 계실 때, 한 사람이 벙어리 영이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벙어리 영을 쫓아내달라고 부탁했는데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르 9,19)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음으로 인해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라고 하시자, 곧바로 아이 아버지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가져오는 기적은 기도로써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 능력을 믿고 그 도움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해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고 기도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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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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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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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사제들을 위한 송별모임이 있었습니다. 다들 3시간에서 4시간에 걸쳐서 운전을 하고 모였습니다. 귀국하는 신부님들에게는 아쉬움의 자리였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교구로 돌아가니 감사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새로 오실 신부님들이 비자 문제가 해결되어서 정해진 기간 안에 올 수 있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떠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들어올 때는 비자신청 문제로 몇 달씩 늦어지곤 했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건강’입니다. 이명으로 고생하는 신부님도 있었고, 허리가 아파서 힘들어하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의료체계가 다르고,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기에 원활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보험이 없으면 의료비의 부담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도 어느덧 미국에서 3번째 겨울을 맞이하였습니다. 아직까지 건강에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짧은 경험이지만 해외에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는 ‘친교’입니다. 사제는 사제와 어울릴 때가 좋습니다. 조금 거리가 멀지라도 좋은 일이 있다면 찾아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찾아가는 시간은 지루함이 아니라, 설렘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시간은 아쉬움이 아니라 영적인 충전이었습니다. 판공성사나, 특강을 도와주면서 지내면 시간이 물처럼 흘러갑니다. 근처에 있는 신부님들과 산행도 함께하고, 식사를 하면서 지내면 외로움도 사라집니다. 적어도 제게 친교는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시간 관리’입니다. 흐르는 강물에 떠밀려 가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시간에 떠밀려 사는 것은 건강한 생활이 아닙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건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루 24시간의 달란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시간을 잘 관리하고,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축복과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을 허비하고, 흘려보내는 사람에게 시간은 별 의미 없는 따분함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운동’입니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 좋습니다. 시간이 나면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운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지순례를 가서도, 교구 모임에 가서도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면 좋습니다.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고, 음주시간도 줄어듭니다. 저는 매일 3시간 정도는 시간을 내는 편입니다. 저의 운동은 걷기입니다. 오전에는 묵주기도를 하면서 걷고, 오후에는 강의를 들으면서 걷습니다. 적당한 운동은 삶의 윤활유가 되고, 자신감을 줍니다.
네 번째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쁜 중에서도 늘 따로 시간을 내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대부분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중에서도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기도가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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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다 -
요즘 연일 계속되는 주제는 여정입니다. 어제는 하닮의 여정이었고 오늘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이라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의 관계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인지요.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믿음의 경우 역시 똑같습니다. 믿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라는 것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온갖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뒤따라야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는 구마이적에 관한 일화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자기 아들의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하자 그는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 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이 흡사 오늘 날 세대를 지칭하는 듯 합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 오너라.”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믿음이 없는 세대같습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 부족을 반성하게 됩니다. 벙어리 영인 들린 이의 아버지의 재차 간청이요 이어지는 주님과의 대화가 우리에게는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믿음이 답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위탁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 또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자 제자들을 어째서 자기들이 그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했는가 묻자 예수님의 지체없는 명쾌한 대답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믿음에 이어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믿음의 여정은 동시에 기도의 여정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우리를 주도합니다. 기도해야 믿음의 은총의 선물이요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받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우리에게 참 고마운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 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대로 세상에 몸담고 사는 우리들을 지배하는 시기와 이기심에 근거한 세속적이고 현세적이고 악마적인 세상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내면을 황폐하게 하고 믿음을 약화시키는 세상의 지혜에 대한 답은 기도뿐입니다. 기도가 없을 때 누구나 세상의 지혜에 노예되어 살 수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총명합니까? 그러한 사람을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추구하십시오, 갈망하십시오. 간청하십시오. 세상에 이런 지혜 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말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인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의 자리에 자리잡게 되는 온유, 선, 순수, 평화, 관대, 유순, 자비, 편견과 위선이 없음, 의로움의 열매, 평화 등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의 선물이 참 풍요롭습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내적 부자요 자유인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순전히 기도와 더불어 믿음과 천상 지혜의 선물들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답입니다. 이런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더불어 부요해 지는 믿음이요 저절로 주님의 치유의 기적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기도와 더불어 함께 가는 믿음이요, 믿음과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의 선물이 치유의 구원을 이뤄줍니다.
믿음의 여정이요 기도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의 수행이 믿음의 성장과 성숙에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기도가 아니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더러운 영을 내쫓을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한결같은 기도와 믿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기도의 수행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 깊어지면서 하늘의 지혜를 받아 참으로 영육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고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더러운 영을 내쫓아 주시고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어 당신의 지혜를 선물하시어 온유하고 순수하며, 관대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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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치유 사건은 보통 치유를
청하는 이들의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본보기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며
다소 애매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앞서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이 처음보다 줄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따끔하게 질책하시고 믿음을 독려하십니다.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역설적이면서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고백을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믿음과 불신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신앙인의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이면에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부족한 믿음’ 또는 ‘약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를
더 굳건한 믿음으로 변화시키려는 열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이 아버지는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에
청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애원합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이 아버지의 애원은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본보기가 됩니다.
부족한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십사 겸손하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그러한 겸손한 청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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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어떤 아버지가 마귀 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것 같다. 이때,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마귀를 쫓아내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다(28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29절). 마귀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22절) 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3절) 하시며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24절) 하자 예수님은 아들을 고쳐주셨다.
오늘 복음의 인물들과 사도들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선한 것은 오직 주님의 도움으로 완성되고,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믿음을 흠 없이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십사 청했다. 진정한 믿음 없이는 어떤 선행도 시작하거나 끝낼 수 없다. “우리는 믿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 그리고 “기도 없이는 어떤 신앙도 보존되지 않는다.”라고 히에로니모 성인은 말하였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준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인간에게 실망할 수 있지만, 항상 하느님께, 예수님께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실망했듯이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도 교회에서 일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그들의 약점을 보고 믿음에까지 실망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럴 때도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을 넘어 그리스도 자신을 찾아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 안에 언제나 희망을 품고 그분께 매달릴 때, 그분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신앙의 길을 가면서 의심이 들 때도 있고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게을리하는 때도 있다. 그때마다 오늘 복음의 그 아버지처럼, “주님, 나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믿음이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지만 권능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의 삶이며 구원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늘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미리 끌어당겨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구원의 삶은 자연스럽게 영원한 구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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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 29)
막아설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마음이다.
기도의 마음을
진심으로 나눈다.
간절함과
따뜻함이
한 사람을
믿음의 길로
나가게 한다.
좌절할 때
힘을 주는
믿음의 길은
불가능이 아닌
가능의 길이다.
믿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
믿음의
본질이다.
믿음의 가치는
기도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생활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기도는
거짓없는
주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만남이
기도이다.
기도는 절실한
사랑이다.
그래서 기도는
치유의
참된
열쇠가 된다.
기도의 치유는
입이 열려
따뜻한
자신의
이야기를 주님과
나누는 것이다.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기도이며
사랑이다.
처참히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깨우고
우리의 관계를
깨우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됨의
모습이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기도의
삶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사랑의 실천이
앞으로 나가는
변화와
치유임을
믿는다.
그래서
기도의 마음은
한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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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마르 9,14-17ㄱ).”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마르 9,18ㄷ).”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8-29)”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고(마르 6,7),
제자들은 그 권한으로 ‘많은 마귀’를 쫓아냈는데(마르 6,13),
지금의 이야기를 보면,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율법학자들이 그것을 보면서, 제자들이 받은 권한과
그 권한을 주신 예수님을 의심하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들의 말 때문에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파견되었을 때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잊어버렸거나, 자기들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착각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갑자기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변함이 없더라도,
일의 결과만 보고서 자기들이 한 일이라는 착각에 빠지면,
그것은 사실상 가지고 있던 믿음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이루어진다.” 라는 생각도
위험한 함정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믿음으로 기도를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 차츰 교만해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교만은 주님의 결정권을 무시하는 ‘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거나 들어주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가 원하는 그것만을 달라고 떼를 쓰면 안 되고,
결과를 모두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결과를 얻지 못해도 주님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종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마귀를 쫓아내려면 기도하여라.” 라는 가르침인데,
“기도하면 내가 반드시 마귀를 쫓아내 주겠다.” 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마귀가 두려운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인들에게는 ‘기도’ 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힘만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마귀보다 더 힘이 센 분’이신(루카 11,22)
주님의 힘으로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고,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9,22-24).”
예수님과 아이 아버지의 대화가 좀 묘합니다.
이 대화를 마르코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어떤 나병 환자의 대화’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1장에 나오는 환자는 예수님께서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의 원문은 “나는 원한다.”인데,
그의 병을 고치는 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지금 9장의 이야기에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아이 아버지의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정말로 가지고 계신지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루카 1,37)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믿기만 하면, 믿는 이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아이 아버지의 “저는 믿습니다.” 라는 말의 뜻은, “믿겠습니다.”,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입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말은 “제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믿음’도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을, “저의 믿음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믿는 생활’이기도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다가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곧 ‘믿음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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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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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와 겸손이 사라진 자리에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하시던 가운데 가장 공을 들이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장 큰 스트레스 거리 중에 하나였던 것이 ‘제자 교육’이었습니다.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해도, 구체적인 비유와 사례를 들어가며 차근차근 설명해도
좀처럼 제자들의 귀를 열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만 해도 예수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사이 큰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최측근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다가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큰 소동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악령 들린 한 사람을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제자들이 다른 때는 잘도 고쳤었는데, 오늘따라 아무리 애를 써도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치유와 구마가 식은 죽 먹기였는데, 오늘 갑자기 전혀 약발이 먹히지 않으니 제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군중들이 ‘알고 보니 사이비로군!’ 하면서 제자들을 코너로 몰고 가고 있었고, 율법학자들의 날카로운 공격 앞에 제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상황이 더 확산되기 직전 예수님과 핵심제자단이 사건 현장에 도달해보니 사태가 그 지경에 도달해있었던 것입니다. 큰 곤경 속에 당혹해하고 있던 남아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등장 앞에 그제야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데려오라 하신 다음, 차근차근 구마 예식의 단계를 거치며 아이에게서 악령을 내쫒으십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악령이 활개를 칠 때의 증상을 물어보십니다.
언제부터 악령에 시달렸는지도 물어보십니다. 악령에게는 이름도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악령에게 호령하시며 아이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마침내 아이를 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십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마며 치유며 잘 되었는데 갑자기 시스템이 작동이 안 되니 꽤나 자존심 상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코 복음 9장 28절)
예수님의 대답을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코 복음 9장 29절)
잘 나가던 제자들의 쓰디쓴 실패, 그 배경에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겸손이 부족했습니다. 기도와 겸손이 사라진 자리에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과 교만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목활동, 모든 봉사활동이 바람직하게 전개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온 데 간 데 없고 ‘나’란 존재가 가장 중심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나 내가 최고여야 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은 다들 들러리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인데도 불구하고 맴날 ‘내가 누군지 알아?’하면서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 보시기에 너무나 가소롭고 웃기는
처량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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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과 기도
제가 신학생 때 본당 신부님과 식사를 하는데 신부님께서 교포 사목을 하실 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신자들이 갑자기 달려와서는 마귀 들린 사람이 있다고 신부님께서 좀 오셔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그런 것에 대한 경험도 없고 쫓아낼 자신도 없고 겁도 났지만 사제이기에 얼른 성수와 구마경이 있는 준성사 예식서와 십자가 등을 챙기고 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정말 한 집에 들어가 보니 마귀 들린 사람이 무섭게 변한 얼굴과 목소리, 눈초리로 온갖 욕설을 사람들에게 퍼붓고 있더랍니다.
신부님은 십자가를 들어 보이고 구마경을 읽고 성수를 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귀는 오히려 비웃기만 하고 큰 효과는 없더랍니다.
오히려 신부님을 욕하면서 자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신부님은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해하시다가 어디서 생각이 나셨는지 갑자기 신자들을 마귀 들린 사람 주위에 둥그렇게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묵주를 꺼내라고 하시고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하니 그렇게 떠들던 마귀는 겁을 집어먹은 듯싶었고 2, 3단을 넘어갈 때는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신부님과 신자들은 계속 묵주를 돌렸고 4단이 되자 마귀는 신음소리와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마지막 발악을 하였습니다.
5단이 되자 마귀는 그 사람에게서 떠나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벙어리 들린 영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십니다.
처음엔 예수님의 제자들이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그 영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그 영이 그 아이에게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병도 시간이 지나면서 깊어지고 결국엔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악한 영도 사람 안에 오래 있으면 그만큼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미 악한 영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는데 워낙 영이 그 사람과 한 몸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힘으로는 그 영을 쫓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를 먼저 야단치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 아이의 부모도 아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한 것을 알기에 이렇게 청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하느님께는 너무 늦은 때도 없고 불가능한 일도 없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는 영을 쫓아내십니다.
영이 소리를 지르고 떠나자 아이는 마치 죽은 것처럼 땅에 쓰러졌고 사람들도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하였습니다.
이 의미는 아이의 생명력이 온전히 나쁜 영에 의해 빼앗겨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다시 새로운 생명의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악령의 무기력한 힘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의 힘이 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왜 자신들은 그 영을 쫓아낼 수 없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를 꾸짖으시는 것은 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 약한 믿음의 증거는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절대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으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기도하면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는 하지 않고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영성만을 비판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영성보다도 함께 기도할 때 나오는 힘이 더 클 수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도 지금의 우리들에게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라는 꾸중을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절대 의심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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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7 주간 월요일-묵상과 기도
야고보 사도는 신자들 가운데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으로 착하게 자기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의로운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에게서 그 영을 쫓아내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야" 하시고,,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귀머거리 영아,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명령하고 그 아이를 회복시켜 주였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더러운 영의 추방은 기도가 아니면 그 영을 추방할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총명합니까? 그러한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야고 3,13-18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14-29
실천
야고보 사도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고 온순하며 그리고 자비와 좋은 열매가 있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평화를 찾고 추구해야 합니다. 평화는 선과 진리,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것의 항구함입니다.
선과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비와 사랑과 함께 하지 않으면 또한 그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평화는 나 자신의 개인 것만이 아니라 너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개인의 평안을 평화라고 하지 않고 단지 조직의 평안만을 평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공동의 선과 진리를 평화라고 합니다.
공동의 선의 뿌리는 평화입니다. 거칠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관대하고 온순하며, 자비롭고 좋은 열매가 있습니다. 평안을 공동의 평안으로 이끄십시오. 평안을 평화를 이끄십시오. 선함과 참됨을 통하여 자비와 사랑에 항구하십시오. 평화를 통해서 생명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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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기도에 관한 책도 많습니다. 또한 교부들의 삶과 가르침에도 기도에 관한 내용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기도를 하며 신앙생활을 할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기도는 어떤 형식으로 정해진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도 물론 좋은 기도입니다.
기도 하면 일반적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말 중에 하나가 하느님과 대화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 맞는지 자문을 해본다면 과연 그럴까요? 저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낙제점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방금 언급을 했듯이 그냥 일방적으로 어떤 형식적으로 짜여진 그 기도문으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대화가 아니고 어쩌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쏟아내는 기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기도는 청원기도이기 때문에 그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청원은 대화라고 보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을 올리기 때문이고 또 아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에 익숙해서 그런지 자유기도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번 실험을 해보시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번 자유기도를 하게 한다면 쉽게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기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은 없는지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 하면 어떤 형식과 틀에 매여서 해야만 그게 기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경건한 장소에서 기도손을 한다든지 아니면 기도서를 놓고서 기도를 해야만 그게 기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기도가 맞습니다. 이런 기도도 해야 하는 것은 분명 맞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기도와 함께 또 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아도 삶 그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게 말처럼 된다면 이 기도가 어쩌면 아주 이상적인 기도가 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을까요? 삶 그 자체가 기도가 된다면 말입니다. 그보다도 더 좋은 기도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저는 개종 전부터 생각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게 가능할까요? 부족한 제가 봤을 땐 기도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속에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가르침인 말씀을 생활 속에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기도문처럼 기도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라는 게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한다면 이것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화라는 것은 꼭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도 말이 아닌 몸짓으로도 대화를 한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할 때도 있습니다. 가령 청각장애를 가진 분들의 경우 그런 분들의 대화는 손으로 의사를 주고받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교제를 하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도 물론 세상생활을 하지만 그 속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접목한다면 그것도 하느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라면, 삶이 그 결과를 대변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게 기도가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어떤 형식에 매여서 하는 것만 기도로 생각하는 것에서 좀 탈피해서 이런 것도 어쩌면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 묵상해보게 된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과 함께 영적으로는 엄마의 뱃속에서 태아가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받는 것처럼 기도가 하나의 영적인 탯줄이 될 것이라도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 따로 세상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삶으로 기도하는 기도생활도 아주 중요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늘 같이 호흡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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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야고3,13-17)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14-15)
야고보서 3장 13절에서 야고보는 온유 안에서 드러나는 선행으로 참된 지혜를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야고보서 3장 14~16절은 이와 반대로 시기와 이기심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세상의 악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야고보는 13절 후반절에서 언급된 온유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은 사람을 14절에서 거론하고 있다. 여기서 '모진 시기와 이기심'은 타락한 본성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다.
먼저 '시기'로 번역된 '젤론'(zellon)의 원형 '젤로스'(zellos)는 '열심', '열정'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시기', '질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 단어가 신앙을 유지함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의인의 거룩한 열심히라는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지만(요한2,17; 로마10,2; 2코린9,2; 11,2; 필리3,6; 히브10,27) 여기서는 잘못된 열심 즉 그리스도인을 대항하는 유다인의 열심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열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사도5,17; 13,45; 로마13,13; 갈라5,20등).
그리고 이 단어를 수식하는 '모진' 혹은 '독한'으로 번역될 수 있는 '피크론'(pikron)은 3장 11절에서 '쓴 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하다.
모진 시기는 남에 대한 열등감에서 오는 시기심, 또는 남의 가치를 애써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 되어 비방을 일삼는 태도를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악한 감정을 앞세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시기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기심'으로 번역된 '에리테이안'(eritheian)의 원형 '에리테이아'(eritheia)는 '이기적 야심', '파당심', '강한 당파 근성'이라는 뜻으로서 자신만을 내세우려고 저급한 술책도 불사하는 이기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 악은 또한 '모진 시기'와 같이 갈라티아서 5장 20절에 열거되어 있는 육체의 열매 중의 하나로 거기서는 '파당'의 의미를 갖고 번역되었다.
사실 인간이 모인 모임에서 그 조직체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암적 요인은 이와같은 이기적 야심에서 비롯되는 파당심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지도자적인 중심 인물인 야고보는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시기와 이기심의 추악함을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당시 교회 안에는 모진 시기와 이기심, 즉 이기적 야심이 가득한 사람 중에 자신이 지혜롭다고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진 시기와 이기심 자체가 이미 그들의 지혜가 거짓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은 그 사람의 진리의 가르침과 유배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야고보는 경고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마십시오'로 번역된 금지 부정의 '메'(me)는 '자만하거나'로 번역된 '카타카우카스테'(katakauchasthe)와 '거짓말을 하지'에 해당하는 '프슈데스테'(pseudesthe)를 모두 지배한다.
그런데 '카타카우카스테'에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숨겨진 목적어는 교사가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지혜'(13절)이다.
모진 시기와 이기심이 가득한 자가 자신에게 지혜가 있다고 자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 지혜를 모독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라는 뜻 단순히 교사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다면 그가 가르치는 진리에 역행하여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자신을 믿는 삶은 짐이지만 대속의 주님을 믿는 삶이 희망입니다.
(마르 9,20-29)
20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 빛이신 예수님을 보자 어둠인 벙어리영이 곧바로 반응합니다. 더러운 거짓영입니다. 하느님의 말슴, 계명을 사람의 뜻, 사람의 일로 듣고 말하게 하는 거짓영입니다.
앞 7장과 8장에서 귀먹고 말더듬는 이와 눈먼 이는 처음에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늘 벙어리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발작으로 반응을 합니다. 앞 7장과 8장에서 귀먹고 말더듬는 이는 귀가 열리어 말씀을 진리로 듣고 그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으로 열린후 나타나는 반응임을, 본 9장에서 성경은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올바른 하느님의 뜻으로 보고 들으면 죄 성이 드러나는 그 반응은 용서(치유)를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죄 성이 드러나야 십자가의 대속으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 어려서부터 사람의 욕망을 위한 신앙으로 잘못 가르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22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 하느님의 물, 불, 곧 죄의 대속 그 죄의 덮으심의 말씀(물, 불)은 용서 희망으로 생명을 주지만 땅의 물, 불 선악의 그 사람의 말은 죄의식에 시달리게 하는 죽음입니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 하셨음을 믿는 그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4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 주님에 대한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다 이루어졌다’하신 그 주님의 믿음을 청합니다.
25ㄱ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 제자들을 포함한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들 그 군중입니다.
25ㄴ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 그들 모두를 포함한 구마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도~아멘.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욕망, 그 사람의 뜻을 위한 일로 듣도록 하는 거짓 예언자들(가르침)이 너무 많다 하십니다.(1요한4,14참조) 그래서 다시 들어가지 마라, 다시 유혹에 빠지지 마라 하시는 것입니다.
26 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27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 땅에서 죄의식이라는 그 죽음에서 일어남입니다. 창조의 손이, 또 그를 위해 못 박히실 손이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땅에서 하늘의 존재로 하느님의 지혜, 진리의 말씀(물 불)으로 재창조되는 위로부터 태어남입니다.
(요한3,3) 3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28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 오늘날 제자(교회)인 우리의 모습을 보라 하십니다.
2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6,10) 라고 기도하면 아버지의 뜻인 땅의 구원이~ 땅인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당연히 그 거짓영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프로쉬콤마이는 ‘흘려주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뜻 대속의 십자가를 진리로 올바로 흘려주어야 용서(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뜻을 위한 일로 율의 치유만을 위해 제자들이 기도했기에 그 거짓영이 나가질 않았던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지말라 하셨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는 용서(구원)가 없는 빈말, 헛된 기도인 것입니다.(마태6,7)
그래서 하느님의 뜻인 땅의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일, 그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말씀이~30절에 이어집니다.
진리를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그 내 죄를 위한 용서(치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1코린15,19)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코린7,10) 10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아멘!
2022년 02월 21일 월요일
[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치유 사건은
보통 치유를 청하는 이들의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본보기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며 다소 애매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앞서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이 처음보다 줄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따끔하게 질책하시고 믿음을 독려하십니다.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역설적이면서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고백을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믿음과 불신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신앙인의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이면에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부족한 믿음’ 또는 ‘약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를 더 굳건한 믿음으로 변화시키려는 열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이 아버지는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에 청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애원합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이 아버지의 애원은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본보기가 됩니다.
부족한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십사 겸손하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그러한 겸손한 청에서 비롯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7주 월요일 복음 (마르 9,14-29)
믿음과 사랑을 통한 치유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고쳐주는 것에 실패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19,29)고 하시면서 실패의 원인이 기도하지 않은 데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은 실패 이유를 “믿음이 약한 탓”(17,20)이라고 전하는데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아니고서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까닭은 단지 기도 몇 시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아니시면 고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깊이 일치를 이루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만남인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내 안으로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내 안에 오신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사랑을 드러내고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영에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9,23)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9,24). 이처럼 믿음에 기초한 예수님과의 대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병을 고쳐주시며, 온갖 불의를 물리치시고 해방으로 이끄시는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의 믿음의 부족함을 겸손되이 고백하며 도와달라는 간절한 청원, 그리고 온 존재를 고스란히 맡겨드리는 의탁,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아이 아버지의 대답은 이미 간절한 기도였고, 그 기도는 이미 하늘에 다다랐으며, 구름을 꿰뚫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9,24)라는 아이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를 진실한 신앙고백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시어 그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믿음은 사랑을 부르고, 그 사랑으로 아이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도 사랑도 부족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까닭은 믿음이 약한 탓이고, 기도하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재확인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과연 무슨 일을 할 때나 누군가를 만날 때, 특히 고통과 시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 앞에서 하느님께 대한 강한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어본 적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유와 해방, 몸과 마음의 치유을 바란다면 그만큼 더 강한 믿음과 사랑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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