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빅 5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침묵
2. 바다와 독약
3. 스캔들
4. 깊은 강
5. 사무라이
이 5편이다.
번외로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백색인, 황색인>을 꼽고 싶다.
나는 평소 ‘사무라이’를 읽고 싶어, 차마 일본어를 공부할 수는 없지만, 그걸 심각하게 고민하기는 했다.
그만큼 이 소설을 읽고 싶었다.
궁즉통이라고 했던가? 드디어 소설이 나왔다.
뮤진트리라는 듣보잡 출판사이지만, 이런 책을 번역해 출간하다는 걸 보면 대단한 출판사임에 틀림없다.
조속히 <스캔들>을 출간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일본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소설을 출시 족족 읽고 있지만 번역이 시치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못내 아쉬운 심정과 비슷하다거나 그 이상이다.
아무래도 시치리보다는 엔도가 더 심오한 작가이기 때문이리라. 난 이런 분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량은 500쪽으로 다소 많은 편이다. 보통 200쪽 남짓 장편소설을 쓰는 엔도의 스타일 상 매우 긴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읽다보면 금방 읽는다. 나도 2일만에 다 읽었다. 딴 짓을 했음에도...
총 1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벨라스코 신부>의 1인칭 이다. 주인공인 셈이다.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가장 잘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이 벨라스코 신부이므로 그를 선택한 듯 하다.
나머지는 3인칭이다. 즉, 벨라스코 1인칭 외에는 3인칭이라는 말이다. 총 10개의 란트루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령 1,2 란트는 3인칭이고 3부터는 1인칭 소설임에도, 읽다 보면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10란트에 가면 1인칭과 3인칭이 복잡하게 얽힌다. 이러한 서술적 시점의 특징은 엔도가 자주 구사하는 수법 내지 기법이다. 바다와 독약, 침묵 모두 이러한 기법으로 쓰여졌다. 이런 기법은 지금 보면 별 다를 게 없는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모라이크의 <테레즈 데스케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여기서 ‘보여진다’는 ‘보인다’가 어법 상 맞으나, 나는 실감을 자아내기 위하여 보인다로 고집할 예정이다.)
주인공은 <사무라이>로 소설에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 진 사람이 <요조>이다. 요조는 사무라이의 심복으로 천주교에 감화되는 사람이며, 사무라이를 옆에서 돕는다.
벨라스코 신부는 일종의 야심가로서, 일본에서 주교가 되려 하는 목적으로 철저하게 일본인을 이용하려 든다. 거는 바울회 소속으로 베드로회와 반목하고 싸운다. 소설 내내 천주교 내에서의 세력 다툼과 번목이 자연스럽게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는 일본 포교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보통의 사제와 다른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이 타협과 설득, 눈치의 테크닉이다.
일본이라는 특수한 사회에서 천주교의 의미는 신부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이러한 점은 소설 <침묵>에서 로돌리코 신부와 페레이라 신부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으나, 이 소설에서는 대화체라기 보다 서술체로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핵심은 일본인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나 쓰시지만 일본인은 철저하게 도움이 되는 자만 쓴다는 논리다.
아무튼 멕시코와의 무역길을 뚫고, 무역항을 만드는 것을 교황에게 승인받기위하여, 난파된 배에서 조난당한 스페인 선원들과 차출된 사절 4인은 멕시코로 출발하게 된다. 물론 배를 만들고 난 후다.
하지만 주님의 힘은 몸의 병만 낫게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병도 치유합니다.
나는 이 말에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을 이해했다.
결국 주님이 기적을 행했다고 쓰여진 말들은 은유나 상징, 혹은 마음적 요소가 강한 것이다.
가령, 4복음서에 나온 ‘오병이어의 기적’도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거듭났다는 이야기란 말이다.
갈릴리 호수를 걷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기적은 사실은 아니지만 큰 의미에서 진실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인들의 실리적인 생각은 아마도 엔도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제자들을 비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인들은 기적이나 자신들의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업보같은 주제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부활이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하면 그 즉시 납득하지 못하고...
이 말도 결국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의 간극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상인들에게도 거래를 트려면 ‘키리시탄 인 척 하라고 한다’ 이 말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즉, 본심보다는 형식이다. 소설 <침묵>에서도 똑같다. 통역자가 이야기한다. 겉으로만 배교하라고. 여기서 마음없는 굴종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상징성이 있으며, 겉은 속까지 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저 장사를 위해서만 기리시칸에 귀의해도’상관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소설의 주제가 나온다.
산에 오르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동서로도 길이 있고 남북으로도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오르든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길도 그와 같겠지요.
이 말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강한자 약한자, 결단하는자와 주저하는자, 두려운자와 강건한자, 어느 누구도 우선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물어도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이 있다는 걸 이치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엔도의 그리스도교 사상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엔도는 그의 책 <침묵>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분을 말해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엔도가 자주 사용하는 기법도 여기서 자주 등장한다.
저 사람들은 하느님이 있건 없든 아무래도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엔도 소설의 곳곳에서 등장한다. 가령 ‘나는 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장이다.
사람은 두 번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적지근한 그런 것을 바라는가?’라는 성경 구절도 소설에 역시 나오고 있다. 엔도의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엔도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X’로 표현한다. 그의 <엔도슈사쿠의 문학강의>도 그렇고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우리나라에는 번역도 되지 않은 <인간 속의 X>를 썼다.
엔도가 말하는 X란, 인간에게는 의식 밑에 무의식의 세계가 있고, 이 무의식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서 수많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으며, 그 밑에는 ‘혼’ 내지 ‘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마치 변수처럼 ‘X’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사무라이>에서도 그런 말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이런 꿈을 꾼 것은 언젠가 마쓰키가 했던 말이 역시 의식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침묵>에서 이야기 한 고요의 상태, 즉 신의 침묵에 대해서도 곳곳에서 이야기한다.
죽은 자들을 삼킨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고....
엔도는 사무라이가 약하고, 벨라스코는 강하지만 결국 둘은 만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싶어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사무라이 역시 약하지 않다.
그도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강한 마음을 가진 소유자이다.
<침묵>처럼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베드로회의 발렌테 신부와 바울회의 벨라스코 신부의 토론이다. 일본에서의 카톨릭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결국 벨라스코의 승리로 끝나는 듯 하지만, 베드로회의 전략에 의해 패배로 끝난다.
<침묵>에서는 일본인들이 왜곡된 천주를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서는 실리적 입장을 취하는 일본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스페인에서도,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알현하고도 일본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벨라스코 신부에 대해 이렇게 엔도는 표현한다.
하지만 내 앞에는 침묵밖에 없다. 깊은 어둠 속에서 하느님은 잠자코 계신다.
<사무라이> 제396쪽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면 개의 눈이 떠오른다.
나는 이 표현이 예수님의 눈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는 ‘요조’를 말한다. 즉, 사무라이의 심복이면서, 그를 호위하기 위해 일정에 동행했지만, 결국 그가 먼저 하나님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 눈이 바로 개의 눈이다. 요조의 눈이 아닌 예수님의 눈이다.
결국 그 여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사무라이 일행은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일본을 잊지 못해 돌아온 벨라스코 신부 역시 화형으로 최후를 맞는다.
이 소설은 일본 포교를 위해 교황청에 승인을 받으러 나선 벨라스코 신부의 야심과
카톨릭을 받아드릴 수 없는 한 인간의 고뇌,
그리고 당시 국제적 상황에 대해 절묘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엔도는 <엔도슈사쿠의 문학강의>에서 한 초상화를 보고 이 소설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 초상화는 이 소설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무라이> 즉, 하세쿠라의 이야기다.
오타가 2군데 있었지만, 번역은 아주 훌륭하다.
하루 속히 <그리스도의 탄생> 개정판과, <스캔들>이 출간되어
하늘나라에서 엔도가 흐뭇하게 그걸 지켜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