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형처럼
손녀들이 인형 놀이하며 놀고 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인형의 세계는 다양해서 토끼나 곰돌이 인형, 콩순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 무리 속에는 러시아 인형인 ‘마트료시카’도 있다. 목각으로 된 표면에 각양각색의 문양을 입혔는데 뚜껑을 열 때마다 점점 작아진 크기로 똑같은 모양이 등장하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오래전에 러시아로 여행을 갔을 때 딸에게 사다 준 선물이다. 그 인형을 볼 때마다 오래 전의 러시아 풍경이 떠오른다.
이십오 년 전에 예술인들이 모여서 러시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저명한 작가 한 분이 주선했는데, 러시아를 목적지로 정하니 소설가, 화가, 시인, 음악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였다. 특별한 여행이어서 나도 동참하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하자 쉽게 승낙해 주었다. 그 당시에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여행은 항상 가족과 함께 다녔는데, 다른 일행과 떠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12일간의 짧지 않은 일정인데, 맏이인 딸이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아들도 학년이 바뀔 때여서 가능했다.
선입관 때문일까. 모스크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공항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곳을 벗어나 ‘붉은 광장’에 들어서니 조명을 받은 크렘린 궁전과 바실리 성당이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일행은 밤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도착했다. 한없이 길게 늘어선 기차 칸 옆에 독특한 복장을 한 승무원이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밤기차를 타고 떠나는 미지의 ‘나타샤’가 된 느낌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침대칸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려는 것이다. 그들이 준 종이봉투 안의 빵과 간식거리를 들고서.
그곳에서 젊은 러시아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다. 그를 초빙한 인솔자 말에 의하면, 러시아와 한국의 문화예술에 해박한 지식인이라 했다. 그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한국인보다 우리말을 잘 구사하며 수많은 미술품을 설명해줬다.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왕의 별장인 여름 궁전, 겨울 궁전 등을 안내해주었다. 지금도 하얀 설경 속에 빛나는 궁전 정원을 떠올리면, 젊었던 시절의 그곳에 서 있는 느낌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을 둘러보며 그들이 집필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일행은 근교에 있는 『닥터 지바고』 의 작가, ‘보리스 파스퇴르나크’의 집도 방문했다. 하얀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속의 목재 집이 정겹고 이국적이었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모든 러시아인을 무력한 인형의 삶으로 뒤바꿨다. 작가는 전쟁과 혁명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경, 아름다움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 시대가 남긴 흔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인형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시대에 지식인의 전형인 ‘유리 지바고’는 비슷한 삶을 산 작가 자신의 분신이었다.
거리에서 본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인형처럼 예쁘고 아름다웠다. 중년여성은 대조적인 모습에 놀랐는데, 추운 지역에서 지방을 많이 섭취한 탓이리라. 그들이 쓴 밍크 털로 된 모자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의 예술적 기반과 수준이 탁월해서 밤에는 주로 발레공연이나 서커스를 관람했다. 어릴 때부터 다져진 그들의 실력은 가히 놀랍다. 발레는 우리가 잘 아는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한다니 더욱 반가웠다. 숨죽이며 감상한 인형들의 깜찍하고 현란한 발레 솜씨는 잊을 수 없다.
호텔에서 집에 전화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국제전화 절차가 복잡해서 생략했다. 대신 딸에게 줄 선물로 ‘마트료시카’ 인형을 구입하였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인형을 고르며 자신도 모르게 인형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오랜만에 돌아온 엄마를 대하는 딸의 표정이 석연치않아 보였다. 연락조차 없이 지낸 엄마를 원망했으리라. 복잡하다는 핑계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엄마가 선물한 인형으로 그 서운함을 대신할 수 있었을까.
러시아 여행은 가족에게서 벗어난 나만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자작나무가 빛나는 하얀 숲속의 풍광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아이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여행은 생략하고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함께 여행을 떠난 예술가들의 영향 때문일까. 용기와 열정을 동반하며 내 안에 잠든 인형을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발레 공연에서 주인공이 선물로 받은 호두까기 인형이 잠든 인형을 깨워서 활동한 것처럼. 러시아 여행은 내게 활력소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전쟁을 치르며 무력한 인형들만 존재하는 듯해서 안타깝다.
손녀들이 여러 단계를 거쳐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마트료시카’의 새끼손톱만큼 작은 막내를 발견하며 즐거워한다. 딸에게 선물한 인형을 대물림했으니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꿈꾸는 아이는 인형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삶을 스스로 가꿀 것이다. 호두까기 인형이 왕자님으로 변신해서 과자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새롭고 신비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첫댓글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오래전의 러시아를 여행하셨군요.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동토의 나라 러시아, 한두 번 모스코바에 스톱오버를 한적이 있지만, 블리디보스톡에서 상트페테스브르크까지의 시베리아 철도 여행을 버킷리스트의 하나로 올려놓고 있어요. 꼭 한 번 할 거구요.
평소에 여행을 하면서 메모를 많이 해 두시는가 봅니다. 그리고 그걸 마트료시카 안에 꼭 넣어두듯 잘 간직해 오신 것 같구요. 꽤 오래 전 여행한 곳에 대해 마치 방금 여행한 듯한 느낌의 신선한 기행문을 써서 올려 주셨네요. 러시아 여행 잘 했습니다~
나는 안보를 연구하다보니 러시아 역
사와 혁명등은 중요해서 2019년 북
유럽 여행시 러시아에 대한 사전연구
와 여행중 러시아를 심도있게 관찰했
지요.
러시아에 대한 나의 결론은 러시아
는 관광으로는 최고지만 미래에
희망은 없는 나라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다녀온 많은 일정이 중복되는 나의 러시아 여행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행만 다녀오면 이렇게 시야가 확장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쉽게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되네요.나도 오래 전에 다녀온 백두산의 감격을 되살려 기행문을 작성한 적이 있는데 지송님도 과거 복원력이 대단하시네요. 설국으로 변한 지금 시절과도 썩 어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는 인수인계로 너무 바빠 오늘에서야 보았습니다.저의 인생길에도 여행복이 많아 러시아를 두번이나 가는 행운을 누렸지요.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국장과정 과정장을 할 때,그리이스,독일,러시아를 갔었고,두번째는 아내와 함께 북유럽 여행을 할 때 러시아를
갔는데 공항에서 호텔에 이르는 사이에 LG와 삼성의 광고판을 보면서 엄청난 자긍심을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또한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길에 본 자작나무숲은 너무나 아름다워 감탄하였던 기억이 새롭네요.
감성이 넘치는 글,감사해요.지송님! 오늘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