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떨하다.
인천공항에 거의 접근하고 있다는 비행기내 방송을 듣고 창밖으로 목을 내밀어 살펴보았지만 짙은 구름만 보일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마술사처럼. 저 하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는 사람들도 구름이 잔뜩 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행기 조종사는 매우 신중하고 느린 속도로 관제탑과 통화할 것이다. 눈이 많이 내렸고 지금도 간간이 눈이 내리니 최대한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착륙하라는 신호를 계속 받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방송을 들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비행기는 여전히 저공운항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바퀴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제동장치를 가동하는 소리가 기내에 가득했다.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땅에 끌리듯 하는 느낌이 나의 엉덩이에 다가왔다. '와! 안전하게 착륙했다'라는 안도의 숨. 이럴 때마다 나는 히잡을 쓴 아랍 여성이 코란을 독경하는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꼈으면 저렇게 열심히 기도를 할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코로나로 해방된지 얼마만인가. 새벽 7시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귀국행열을 이루고 있다. 바르샤바에서 오는 손님 뿐마 아니라 다른 여러나라에서 도착한 내외국인들이 입국장을 가득 메웠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을 줄 알았지만 이내 사라지고 만다. 입국절차가 너무 간소하다. 예전 같으면 관계공무원과 마주 보고 얼굴을 대조하고 궁금하면 몇 마디 질문도 받곤 했던 게 사라졌다. 소위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 지문과 얼굴 그리고 여권 인식이 동시에 이루어짐으로서 드디어 고국땅에 안착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다. 절로 '와!'하는 외침이 튀어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출입국장일 것이다. 지난 7월 인천을 출발하여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절차를 밟았던 것과 몹시 대조적인 현상. 정말로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발전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불편한 것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 유독 우리나라만 코로나가 유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의 어느나라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는데 말이다. 단 6개월간의 해외 체류이었을 뿐인데 마스크 사용하는 습관을 잊었다는 것은 인간이 주변의 환경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폴란드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면 이상하게 보기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다. 나의 이런 이상한 행동으로 여러 번 지적을 받았다. "선생님, 마스크를 착용해 주세요!"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하나 사려고 했더니 점장인 듯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어르신, 승차하시기 전에 마스크를 쓰셔야죠." 버스 기사의 입에 붙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마스크를 썼다.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 주변엔 온통 하얬다. 간 밤에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고 한다.
두껍게 쌓인 눈을 보고 있자니 조금 머쓱해졌다. 한국에 오기 1-2 주일 전인가 폴란드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친구들에게 자랑 반 엄살 반 내숭을 떨었던 나의 행동이 조금은 지나쳤다는 반성을 떨칠 수 없다. 한국보다 이곳 폴란드가 더 춥고 더 많은 눈이 내리기 때문에 나는 "추운데서 고생하고 있단 말이야!"라고 외치고 싶었던 나의 속내가 까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더 추웠고 더 많이 눈이 내렸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다시 폴란드로 돌아가면 더 이상 날씨 얘기는 안하겠다고 다짐한다. 계속 영하의 날씨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여러가지 있지만 '만남과 헤어짐'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인식은 情이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이 없다면 만나고 헤어짐이 매우 무미건조할 것이다. 만나서 함께 호흡하며 생활하면서 서로 교환했던 감정의 싹이 트고 키워지면서 서로 잊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던 것이 서로를 그리워 하고 아쉬워 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나와 같이 약 6개월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했던 폴란드인 3명은 나와 헤어지던 날 몹시 서운해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졌다. 꼭 가셔야 하는지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아들 딸 같고 동생이나 조카 같았던 그들에게 나는 일흔 넘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는 동료처럼 보였을 게다. 언제나 나는 그들을 동료로서 존경하고 대우해주었고 그들은 나를 선배동료로서 대우해 주었다.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자기 일처럼 적극 도와 주었고 나는 그들을 친 혈육처럼 대해 주었다. 항상 나는 외교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서투른 언어지만 성심 성의껏 의사소통을 했고 그들의 문화와 습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나를 신뢰하였다. 그들과 한 약속은 틀림없이 지켰다. 나의 설 익은 인문학 소양이지만 그들에게 솔직담백한 인간애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얘기하며 그들과 공통된 삶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정을 두텁게 하였다. 그 두터운 정을 헤어짐으로 달래려 하지만 쉬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곳에 도착한 지 만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부인과 자식 손자를 만나고 회사의 직원들을 상면하며 이런저런 친구들을 만나 기쁨의 해후를 하였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남은 기간도 눈 깜짝할 새 없이 지날 것이다. 만남의 기쁨보다 헤어져야 한다는 서운함이 더 클 것이다. 생도시절의 휴가 기분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웠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한 끼라도 더 잘 먹여 보내려고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지금은 친구와 친척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읽는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야 많겠지만 세월이, 시간이 그냥 놔둘리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만나면서 또 헤어져야 한다. 그러나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슬퍼지 않고 서운하지 않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꿈이 있기에.
오늘은 화요일이다. 내가 글 쓰는 날이다. 일주일간 어영부영 하다보니 "어! 벌써 내 차례가 되었네" 하고 오늘 아침 일어나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자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내일이면 문우회 멤버들을 보는 날이다. 만난다는 희망이 지금 나를 즐겁게 만든다. 굳이 옛 성현들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 다 알 것이다. 내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리라.
(2022.12.27)
첫댓글 짧은 귀국 휴가로 바쁠텐데 빠뜨리고 않고 소소하지만 즐겁고 유쾌한 일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군요. 순간 순간, 시간 시간을 매사 진지하고 소중하게 보내는 월몽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기다림의 내일이 있기에 오늘이 더 행복하기도 하겠지요. 즐거운 시간과 함께 푹 쉬고 귀임하시기 바랍니다~
월몽의 지극한 정성과 성실에는 하늘
도 감동합니다.
나이들어 일이 있는것도 축복입니다
내일봐요♡♡♡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만나는 것이 우리의 일상사인데, 잠시 헤어지는 것인데도 폴란드 사람들도 한국인 이상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군요.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으니 특히 우리 나이는 오늘을 항상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후회없이 살아야지요.그런 마음을 가진 월몽이 주변사람들을 물론 폴란드 사람들까지 감동시키고 있군요. 나도 월몽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뒤따르려고 노력해야지요.
여행하면서 착륙하는데 느끼는 긴장감과 안도감의 순간을 리얼하게 잘 표현해 주셨네요.우리나라도 마스크에서 해방되는 날이 빨리
와야 되겠지요.만남과 헤어짐의 인식을 통해 폴란드 사람들의 진실하고 순수함이 느껴지네요.그들과의 생활에서 외교관으로서 국위선양을 하시는군요.인간적으로 다가섬은 그 어느 누구라도 느낄수 있는 감정이지요.부인,자녀,손주들과의 해후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다정다감하네요.오늘 식사를 하며 들은 그 곳 회장님과의 우정이 참 부럽더군요.10일 후면 다시 폴란드로 가시는 여정이지만 우리
나이에 일을 한다는 자긍심은 대단하실 것 같네요.건강 잘 지키시면서 잘 지내시다 가세요.내년 여름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