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가 있는 영화 '최종병기 활'의 무대는 병자호란이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임진왜란에서 명나라의 원군으로 사직을 보전하게 된 은혜를 입은 조선은 명나라가 여진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을 치는데 군대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고 1만 3천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내가 번역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그 전투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19년 3월 명군은 양호, 두송, 유정, 이여백 등 당대의 명장들을 사령관으로 하여 20만명(조선군 포함, 다른 기록에는 10만여명)을 동원하고, 4개 방면군으로 편성하여 후금의 허투알라(요령성 신빈현)를 공격한다.
이에 대항하는 후금군은 약 5~6만명으로 숫적으로는 열세였다. 양군이 격돌을 벌인 곳은 요령성 무순 동쪽 사르후(薩爾滸) 일대이다.
전투결과 병력집중과 기동전을 펼친 후금군이 대승을 하였으니, 명나라는 유정 등 314명의 장수와 약 4만 5870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겨우 4만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조선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항복하였다. 이는 형세를 보아 판단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행동이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후금군은 200명의 손실만 입었다고 흠정만주원류고는 기록하고 있다.
사르후 전투에서 망해가는 명의 실정과 청의 막강한 실력을 본 강홍립은 조선 조정에 서신을 보내 청과 화친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반정으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낸 인조와 서인정권은 후금을 적대시하여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된다. 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렸다는 것이니 태생적으로 외교상 운신의 폭이 적은 정권이었다.
사르후에서 명나라 20만 정예군을 쳐부순 청군에게 조선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투로 기록되는 쌍령전투도 이때 일어났다.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경상도 충청도 등에서 동원된 4만명의 군사가 지금의 곤지암 인근 쌍령에서 불과 청군 기병 330명에게 전멸을 당한 것이다.
청군을 멸시하던 인조는 청황제 발아래에서 이마로 꽁꽁언 겨울 땅바닥을 두드려서 피가 흐르는 체로 항복하는 치욕을 보았고, 백성들은 수십만(50~60만이라는 기록도 있음)이 포로로 잡혀가는 대재앙을 당하였다. 지금 남한산성에는 당시 청과 화의를 배척하는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청나라에 잡혀가 처형당한 세 사람(홍익한, 윤집, 오달제)을 추모하는 사당이 있다. 항복으로 임금의 명을 받들고 병사를 살렸으며 조선의 불가피한 입장을 청나라에 설파한 강홍립은 역적으로 몰려서 더러운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릇된 식견과 당략, 헛된 명분으로 군사적 능력도 없으면서 온 나라와 백성을 전쟁으로 몰아가서 도탄에 빠뜨리고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사당을 짓고,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는 그 이름을 외우도록 가르치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역사를 읽노라면, 모름지기 국민의 앞에선 공직자들은 당의 입장과 개인의 영달을 떠나서 나라와 국민의 안녕과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첫댓글 그랬었군요.
다... 노론들이군요. 을사오적 중 세명이 노론.
조선의 해충들... 안타까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