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리랑 – 노래:선우일선(1935년)
작사·작곡가 이준례 (李俊禮) 는 지금까지 확인된 최초의 여성 작곡가다. 그녀의 활동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리운 아리랑>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해 여성이 설 자리가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유일하게 여성이 발표한 히트곡이다.
작품 창작을 그만둔 이준례는 인형 작가로 변신해 어렵게 살았다. 1979년 조경수의 히트곡 <행복이란>의 원작자가 이준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잠시 화제가 되었을 따름이다.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의 음반에 수록된 채규엽의 <낙화>도 이준례 작품이란 설이 있다. 즉 김억의 시에 이준례가 곡을 붙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낙화>는 작사․작곡자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짧은 기간 활동했으나 주옥같은 노래를 남긴 이준례는 재평가되어 한국 대중음악사에 기록되어야 할 인물이다.
1935년 그리운 아리랑 – 노래:선우일선
(1935년 Polydor 19186-B SP음반)
이준례 (李俊禮) 작사.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HbSt1l5u9oQ
이준례(최초의 여성작곡가) 작사.작곡으로 선우일선 가수가 부릅니다. 반주는 포리도루관현악단입니다.
이준례 (李俊禮)
* 1920~ 30년대 음악가로 활동
* 1940~ 60년대 인형작가로 활동
가랑닙 구르는 문허진 산에
무심한 달빗만 고요히 흘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저문날 종소리에 이밤도 우네
그리운 아리랑 1935 선우일선
이준례 (李俊禮) 작사.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zRalVWPPlb0
가신님 발자욱 차즐길 업네
몽롱한 안개에 살아젓고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떠나간 곳이라고 닛지를 마소
엄동이 다가고 춘삼월 되면
강산도 봄이라 꽃이 피련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언제나 우리님은 도라오려나
가랑닙 구르는 문허진 산에
무심한 달빗만 고요히 흘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저문날 종소래에 이밤도 우네
선우일선 鮮于一扇(1918~1990)
권번에서 전통음악 교육을 받은 뒤 1934년에 신민요 가수로 데뷔하여 1940년대 초까지 음반과 무대를 통해 활동했다. 「조선팔경가(일명 대한팔경)」, 「태평연(일명 태평가)」, 「꽃을 잡고」, 「능수버들」 등 많은 인기곡을 발표했고, 온화한 미모로 기생으로서도 인기가 높았다.
생애
1919년 3월 5일, 평안남도 대동군 룡성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어렵게 지내다가 3년제 학교인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여 기생으로 생활한다.
기생 생활 중에 소리를 잘 하는 것으로 알려져 1933년에 포리돌 레코드사의 문예부장이었던 왕평에게 발탁되었으며, 1934년에 [「꽃을 잡고 」안서(김억) 시, 이면상 작곡]로 데뷔하여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주로 '조선팔경가', '압록강 뱃노래' 등의 민요풍의 노래를 불렀으며, 전옥, 이난영 등과 함께 당대의 유명 여가수로 활동하였다. 이후 빅타레코드, 태평레코드에서도 음반을 발표했고, 1940년대에는 아세아가요단 같은 공연단체에서도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의 종전 후에는 이북에 머물렀으며, 이로 인해 남북 분단 이후에는 남한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광복 당시 고향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북분단 이후 북한에서 민요 관련 업무 및 교육인으로 생활하였으며, 평양음악대학의 성악학부 민족성악 교원으로 종사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1990년에 타계했다.
활동사항
데뷔곡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해 1936년 전후 가수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꽃을 잡고」와 대표작 「조선팔경가」는 모두 수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하며, 「태평연」이나 「능수버들」 등도 지금까지 신민요의 고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1935년에 잡지 『삼천리』에서 실시한 가수 인기투표에서는 왕수복에 이어 여자가수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기량이나 작품, 인기도로 보아 이화자와 쌍벽을 이루는 신민요 가수였는데, 선우일선은 1930년대 중반, 이화자는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