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7.5)일에
성삼문과 김대건 그 죽음의 순간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생각해보며 순교의 참뜻을 알아봅시다.
순교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증거하려다 죽는 경우이므로
한 개인의 소신에 따라 죽는 열사나 충신의 순국과는
그 가치가 무한히 멀고 아득합니다.
순교자의 가슴은
우국충절로 죽는 순국자의 가슴과 근본적으로 다르지요 .
무리한 얘기 같고 조금 죄송한 얘기지만
우리 역사를 놓고 한번 직접 비교해봅시다 .
아마 우리 역사에 성삼문만큼 맑은 충절을 가진 이도 없을 겁니다 .
성삼문은 세조가 녹으로 준 쌀을 한 톨도 손대지 않은 분입니다.
세조가 그토록 위협하고 회유했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았죠.
그 충절 때문에 조선왕조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곳이 새남터입니다.
나는 성삼문 김대건 신부 두 분 다 존경합니다.(중략)
차이점이 있다면 김대건 신부는 신앙때문에 순교하신 분이고,
성삼문은 충절을 지켜서 순국하신 분이 지요
이 두 분의 깊은 내면, 죽음에 임한 그 순간의 깊은 내면을
한번 비교해 보자 이 말입니다.(중략)
성삼문은 한 인간으로서 목숨이 떨어질 때
그 자신이 느꼈던 마지막 내적 심정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요.
그런데 그 형장에서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시 귀가 한 구절 있습니다.
성삼문의 '임사부절명시'라고 하지요.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 보니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 나는 어디서 머물고."
이 절명시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허무 '지요.
저무는 황혼에 생을 마감하면서 느끼는 허무를
감당할 길 없어하는 성삼문을 우리는 분명히 느낍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똑같이 조선에 의해 죽음 당하셨던
김대건 신부의 모습을 봅시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북소리를 들으며 죽음의 마지막 칼날을 받기 직전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일장 훈화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일해 왔다.
이제는 이 목숨을 마치려 한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된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지요.
그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시오.
천주교를 믿으시오. 믿고 봉헌하시오."
그것은 부활 신앙에서 오는 삶과 죽음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때문에 김대건 신부는 지극히 평온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희광이들을 바라보면서
"내 자세가 어떠냐, 어떻게 바로 잡아주면
너희들이 칼질하기가 편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내 자세를 바로 해주게."하고 부탁하자
칼 휘두를 사람이 오히려 떨며 자세를 고쳐 주니까
"됐소. 내 준비는 끝났으니 일 시작하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고 하나는 '새 출발'이지요.
하나는 자기의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개인적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고,
하느님의 계시 진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이라는 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치는 설명만으로 될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 신자의 삶 안에 실제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천주교 교리가 그렇듯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순교의 깊은 참 의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죽음이 생명의 출발이라고 말한 김대건의 그 신앙이
과연 옳은가하고 회의를 가질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옥중 모습을 보면,
그러한 회의조차 불필요한 것임을 분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스물여섯 살밖에 안 된 인생의 햇병아리가 어디 장년이 넘은 신자들 앞에서
"교우들아, 들어라!"한단 말인가요.
그분이 그런 예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명과 긍지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당당함,
그리고 태연함은 황해의 험한 파도속에서,
세상 위험의 극치에서 분명히 나타났었지요.
그런 정도의 신중함과 과단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공부를 마치고 조국 땅에 발을 디뎠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의지할 곳 없는 거지가 되어 헤맨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도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제로서 자기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 기막힌 순간에도 가족을 만나는 기회를 양보했던 것이죠.
그는 죽음에 임해서도 교우들에게
"그대들은 들어라.
이 환난과 고난도 주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이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켜라!"
하고 사제로서의 마지막 임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독하게 어머니마저 만나기를 거절하던 김대건 신부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페레올 주교에게 남긴 편지 속에는
의연한 신앙인이면서 또한 지극한 효성을 가진 아들이었다는
인간의 따뜻한 정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교님, 우리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어린 자식을 이국만리에 보내고 믿음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는 거지가 되었다 하나이다.
그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편안히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나는 간다. 이제 환난도 고통도 박해도 없는
하느님의 그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연이 다 끝나는 임종의 순간에
"다시 만나자."는 그 기막힌 호소를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게 증거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정말로 신앙이 있는사람이라면 역경이 있을 때나 슬픔이 있을 때나
신앙 때문에 기쁨과 평화가 있고,
신앙이 아니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위로를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신앙이 나의 삶에 기쁨이 되고 원동력이 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장엄한 순교소식에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는가.
자식이라도 그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목자가 될 수 있었다."고
페레올 주교가 적어 놓은 일기의 구구절절함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은
프랑스 외방전교회 동료 사제들을 새로운 열의로 불타게 합니다.
-하늘로 가는 나그네에서 발췌. 김길수 강의-
첫댓글
저도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왜...
세잎 클로버 님의 작품에서 많이 함께해서 일겁니다
늘 건강 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