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아. 2006. “구술 생애사를 통해 본 5.18 의 기억과 역사: 사회 활동가 편.” 5.18 기념 재단, Pp. 253-317에서 발췌.
65년 4학년 때 한일회담비준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제적되었다. 복학을 하려 해도 안 되기에 서울로 와서 6.3주역들과 사귀게 되었다. 65년부터 74년까지 10년 동안 서울 생활을 했고, 74년에 결혼을 했다. 6.3주역들이 국회의원 보좌관과 비서관들을 상당히 많이 하고 있어서 자연 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형이 하던 양복점을 차려 생활비를 벌었다.
1973년에는 또 형이 전자회사를 나주에 만들어서 나도 함께 나주로 이사했다, 그런데 몹쓸 수해가 나서 공장 전체가 물에 잠겨 폭삭 망했다. 기술자격증을 따가지고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75년부터 80년까지는 학생운동과 관계를 끊고 학원강사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다.
79년 10.26이 났고, 80년 초에 서울의 봄이 와서 제적학생들이 복교조치 됐다, 이때 나이 38세였다. 65년에 제적당해 15년 뒤인 80년에 복학된 거다. 학교에 복학생들이 100여명이나 됐다. 이들 복학생들이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총학생회 부활, 학내 비리, 어용교수 퇴출 등이었다. 복학생들이 운동권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런 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학내문제는 박관현이 이끄는 총학생회에 넘겨주고 복학생들은 정치적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5월 13일부터 전국의 각 대학이 모두 참여하는 전국시위가 시작됐다. 광주 학생들도 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주화대성회’를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했고, 5월 16일에는 횃불대회를 열었다. 내가 연단에 올라 “시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연설을 했다. 여기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었다.
“피를 부르는 함성이 터져나오고 있다. 틀림 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 학생들은 앞장서서 피를 흘리고 싸울테니까 시민들은 그때 함께 같이 하자. 노동자 농민들이여, 전두환군부에 맞서서 우리 학생들이 앞장서서 피를 흘릴 것이다. 휴교령이 내릴 때에는 전남대 정문이나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 모여서 우리의 뜻을 관철하자.”
조선일보가 이 연설내용을 기사화해서 나는 이 일로 두들겨 맞았다. 5월 17일 밤, 휴교령이 내려졌다. 약 200명의 학생들이 약속한 대로 전대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봉쇄당하니까, 웅성웅성 하면서 아마 시위를 시작한 모양이더라. 5월 17일, 나는 박현채 교수가 내려와 YWCA에서 강연을 했다.
나는 강연을 듣고 함께 소주 한잔 들 하고 밤 12시경 집에 들어왔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려고 하는데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4-5명이 ‘좀 가자’하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김상윤, 조대 김운기 등 10명 정도가 나처럼 예비검속에 걸려 잡혀갔다. 19일 아침 바깥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월 21일에는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됐다.
수사관이 그리는 밑그림은 김대중 밑에 정동년(김대중에서 500만원 받아 분배), 정동년 밑에 박관현(300만원 , 윤한봉(200만원), 그 다음에 김운기 식의 계보였다. 조대 총책은 김운기, 전대 총책은 윤한봉, 그 위의 총책이 정동년인 것으로 구성된 것이다. 81년 4월 1일, 나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4월 4일, 다시 무기로 감형됐다. 그리고 82년 12월 24일 성탄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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