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6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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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6.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제베데오의 두 아들은
자기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이것을 보고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청하고 싶은 것이 같았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수난의 잔 곧 고배苦杯를 마시려고 하는데
그들은 샴페인을 터트려 축배祝杯를 마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축배를 마실 때 주님의 좌우에서 그 축배를 마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나서 이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우리는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며 그렇게 많이 배웠는데도
제자들이 그러는 것이 참 한심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결코 남 얘기가 아니지요.
우리는 정말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까?
우리는 진정 주님의 좌우에 있고 싶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길에 같이 있고 싶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처럼 양편에서 매달리고 싶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이런 건데도 진정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까?
진정 주님과 함께 있고는 싶고,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면 욕심입니까?
그런데 어떤 것이 진정 내가 원하고 청하는 것인지 알고 싶으면
평생 내가 청한 기도가 무엇인지 보면 알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게 해달라거나 하는 일이 실패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을까요?
병에 걸리거나 몇 배의 고통을 더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을까요?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고 반대로 기도했을 것이며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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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6.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야고보와 요한의 죽음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천수를 다했다고 성경에 나오
는데, 어떻게 제베대오의 아들들, 곧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의 잔을 마셨겠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서를 읽어 보면, 요한도 순교를 자청하여 끓는 기름통에 던져졌지만 그리스도로부터 관을 받도록 그곳으로부터 운동선수가 되어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곧장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지요. 이처럼 요한에게는 순교의 정신이 있었으며 그가 고백의 잔을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용광로에 던져졌던 세 젊은이도 그들의 박해자가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그 잔을 마셨습니다(다니 3.23 참조).
-히에로니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텍스트, 컨텍스트, 계기
교부들이 전개한 우의적 해석은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대담하고 환상적인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전혀 근거없고 우발적인 것이라고 배척해서는 안된다. 이는 합당하지도 않거니와 무례한 태도다. 성경의 계기적 성격은 저자 - 하느님 - 자신이 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다. 이 신적인 저자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동시에 인간 편에서의 응답을 부추기시며 이 말씀을 주해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이다. 한 소리의 발성은 이 소리에 반향하는 메아리와 늘 상관관계에 있다. 마찬가지로 다성적 변주곡들은 이 변주곡들을 탄생시키고 또 뒷받침해 주는 원래적 테마와 늘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모든 주석적 아르페지오는 적법할 뿐만 아니라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도 합당한 것이다.
물론 이런 변주곡들이 성경의 정신과 교회 교도권과 화음을 이루며 유기적 연속성을 지니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94)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 1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부 고대 그리스도교
제 2기 : 312-60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그레고리오 대교황까지
제4절: 고대교회에서의 수덕과 수도생활
수도생활의 본질:
교회는 처음 몇 세기 동안 이와 같은 협소화의 위험에 대하여 여러 번 저항해야 하였다. 이에 굴복할 유혹은 컸다. 그러나 완전히 열광적이고 철저한 헌신에서 완덕의 길로 나아기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매혹적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이상주의로 가득차 있던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깊은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원시교회에서 우리는 그러한 금욕적인 사람들과 거듭 만난다. 그물은 공동체에 봉사하고 있었고, 모범으로 간주되었으며 박해시대에는 빛나는 별들이었다. 바오로는 코린토 서한에서 이미 그러한 그룹들을 지적하고 있다(1코린 7장). 바오로에게는 하늘나라 때문에 행하는 금욕이, 임박한 세상 종말에 직면하여 중요성을 가지는 특별한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는 “각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시오”(1코린 7,20)라는 말도 분명히 덧불이고 있다.
“복음의 권고”를 모든 사람을 위한 의무적인 법으로 만들려는 데에서 “이단”이 시작되었다, 2세기 그리스도교계의 일반적인 열광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을 ‘단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엔크라트주의”가 여러 번 등장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은 곧 엔크라트파식의 생활을 의미하였다. 그것을 원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자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모든 약자와 죄인들은 제외되어야 하는 “성인의 교회”, “순결자의 교회”, “완전한 자의 교회”라는 이상을 마법처럼 외며 현혹시켰다. 마르치온과 타시아누스, 몬타누스, 테르툴리아노, 도나투스 등 요컨대 모든 이단자들은 이와 같은 요구뜰 내걸고, 완전성과 성성과 깊은 종교성을 그들의 기호로 삼았다. 이러한 표어 아래 모든 이단들은 그후의 역사만이 아닌 오늘까지 가톨릭 교회가 이완되고 배신하고 복음을 변조하였다고 비난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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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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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6.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생 때 성당에 갔다가 후배 여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오빠는 기타 못 쳐요? 저는 기타 치는 남자가 너무 멋져 보여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여학생들도 “나도 그런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였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남학생이 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내내 기타만 쳤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기타 코드도, 힘든 주법도 상관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이 기타 잘 치는 남자가 멋지다고 하니까…. 힘들지 않게 기타를 스스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모든 게 쉬워진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좋아하게 되고, 그 덕에 능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운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니 저 역시 원하는 것이 되고 그만큼 신앙생활도 쉬워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만 보면 큰 걸림돌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이미 두 번에 걸쳐 말씀하셨고, 이번에 세 번째의 마지막 예고로 그만큼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하지요. 아직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의 성과를 욕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영광은 고통과 시련을 받아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이들 역시 그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속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주님 사랑에 집중하며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쉬워지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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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판단한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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