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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용서하소서
시편 130:1-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가을이 시작된 첫 주일이다. 절기상 가을은 음력 칠월부터 구월까지인데 바로 어제가 음력 7월 1일이었다. 지난 주 화요일에는 입추(立秋)였다. 무더위 속에서도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절기의 변화에 귀 기울여 보라.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말도 있다.
어느새 광복 73주년이다. 비록 광복은 했지만 해방과 함께 분단이 찾아왔다. 지난 73년 동안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이 적대적으로 살았고, 두 나라가 되었다. 사람의 몸으로 따지면 반신불수다. 분단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여 일상적인 분노와 증오를 가져왔다. 마치 40도 무더위에 분단의식이란 두터운 갑옷을 입고 살았던 삶이었다.
이제 그 무거운 외투를 조금씩 벗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어제 상암동에서 열린 남북노동자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초대를 받았는데 토요일 오후에, 또 지친 무더위에 몇 시간씩 괴로움을 겪을 것이 두려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뭔가 의미를 부여할 일을 찾던 중에 부랴사랴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분단의 외투를 벗는 의미 있는 이벤트였다.
남과 북의 선수들은 승부와 상관없이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관중석은 모두 남쪽 사람이지만 북이든 남이든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경기 내용은 재미있다고 할 수 없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모두가 뿌듯해하였다. 그것은 둘이 되면 더 커지고, 더 강해지고, 더욱 평화로워진다는 우리 민족의 ‘자존감’이었다.
우리나라에 필리핀 사람들이 노동자로 많이 와 있다. 필리핀인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물었다. 그들이 평소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줄 아느냐? 바로 6.25전쟁 필리핀군 참전기념비라고 한다. 이 땅에서 구박받는 그들이 자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곳이란다. 우리가 이 나라를 도운 역사를 기억하면서, 종살이 같은 이 땅에서 느끼는 푸대접을 이겨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시간과 절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하는 일은 참 중요하다. 자신의 삶에도 신앙적 의미를 붙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고백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성경은 그런 전통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광복절 기념주일과 이 날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로 지키는 이유이다.
1)
본문 시편 130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5편 중 하나인데, 다른 노래의 주제들과 전혀 다르다. 대부분이 성전에 올라가는 기쁨을 노래한 것인데, 유독 130편은 참회시이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깊은 곳, 부르짖는 소리, 죄악, 사유(용서)하심, 기다림, 속량’이다.
마지막 간구에서 순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을 구한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8).
기도하는 당사자인 순례자나, 시편 130편으로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량’(贖良), 곧 자비와 용서를 통한 구원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비유하면 종의 신세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일이다.
마틴 루터는 시편 130편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중세시대의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루터가 주장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자유이다. 루터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강조한 사도 바울의 신학을 강조하여 시편 130편에 ‘사도 바울의 시’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래서 시편 130편은 그 어떤 순례자의 노래보다 더욱 감격적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순례하는 기도자는 지금 큰 위기를 맞았다. 그래서 격한 감정으로 간구한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1-2).
지금 기도자는 ‘깊은 곳’에 있다. 그 깊음을 느끼는 곳은 어디이고, 또 깊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런 깊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리학자들은 그 깊음을 사람의 기억 속에서, 혹은 무의식 속에서. 그런 심층심리 차원의 깊은 곳을 찾으려고 한다. 멀쩡한 겉모습이 아니라 그 기억의 상처까지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깊은 곳은 무거운 질병이기도 하고, 죄의 볼모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함이기도 하며, 혹은 나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억압이나 불의가 지배하는 역사의 혼돈 상태를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깊은 곳’은 사람이 겪을 수 없는 괴로운 환경, 위험, 죽음에 직면한 생의 고통을 의미한다.
교부 어거스틴은 참회하던 당시 자신의 죄를 가리켜 ‘어두운 심연’과 같다고 고백하였다. 기도자에게 깊은 곳은 ‘깊은 어둠, 견디기 어려운 죄의식’과 같다.
내가 겪는 ‘깊은 곳’은 다른 사람의 구조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지점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내가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그곳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간구할 수밖에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
진정한 두려움은 하나님마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도 포기한 인간은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그런 표현들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렘 21:7).
하나님이 측은히 여기지 않는 인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인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인간은 얼마나 불행한가? 대책이 없다.
여기에서 기도자가 처한 ‘깊은 곳’은 인간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을 기다리는 간절한 심정이 되는 그런 순간이다. 누구나 가장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깊은 곳’이 있다. 깊은 어둠, 깊은 두려움, 깊은 고민, 깊은 절망, 깊은 문제에 빠질 수 있다. 인생의 어둠은 당사자가 아니면 개입하거나 간섭하기 어렵다. 기도자는 다만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를 바라면서 부르짖고 있다. 그는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할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깊은 밤, 깊은 어둠, 깊은 절망, 사람들은 그 캄캄함에 직면하면, 당황하고 두려워한다. 그 어둠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부재’는 곧 희망의 부재이다. 그래서 더 큰 두려움과 병을 앓게 한다.
2)
이제 기도자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깊은 곳’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용서의 말씀과 함께 그를 살려주실 것을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길은 죄를 헤아려 심판하는 데 있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용서해 주시는데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사유’(赦宥)는 ‘용서할 사, 용서할 유’자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닌, 용서에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성전에 나아가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기도자는 절망 중에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야말로 그를 절망시킨 죄악보다 더 크게 간섭하셔서, 죄인일망정 자신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내실 줄 믿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를 믿는다. 그래서 빈손으로, 맨 발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기도자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다. 아침이면 반드시 동이 터 올 것을 알듯이, 하나님께서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실 것을 믿는다. 성경은 이런 기도자의 간절함을 가리켜 아침에 동트기를 고대하는 파수꾼의 기다림과 비교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파수꾼은 밤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는 그 캄캄한 밤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줄 안다. 파수꾼은 빨리 시간이 흘러 교대하기를 기다린다. 기도자는 그런 파수꾼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있다.
기도자는 지금은 어둠이 깊고 밤이 끝없어 보일지라도 마침내 아침이 동터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파수꾼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린다. 비록 내가 ‘깊은 곳’에서 부르짖지만, 마침내 아침이 밝아올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
지금 나를 돌아보라. 하나님은 지금 깊은 곳, 어둠 가운데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용서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영혼은 아름답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시고, 용서해 주신다. 주님에게만 죄인에 대한 사랑과 은혜가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의 깊음’(창 1:2)에서 빛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혼돈, 공허, 깊은 어둠 속에 있는 나를 은총의 빛으로 다시 창조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혼돈, 공허, 깊은 어두움을 지나 새로운 창조의 신앙을 품기를 원하신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성경은 말한다. ‘깊은 곳’을 두려워 말라. 그것은 구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어둠, 나의 혼돈, 나의 공허를 느끼고 참회하는 사람에게 그 ‘깊은 곳’은 나를 새롭게 창조하는 기회가 된다.
3)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시편 130편은 대표적인 참회시 일곱 편중 하나이다. 초대교회부터 애송하였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으로 용서는 불가능하다. 용서는 하늘에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하늘마음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죄의 용서와 화해를 암송하며 간구한다.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마음을 닮게 하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설명하듯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기꺼이 용서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드리는 예배는 바로 하늘마음을 품을 기회이다. 누구나 주일 아침만큼은, 예배드리는 시간만큼은, 남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고, 너그러워 진다. 예배 드리며 하늘에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
예배는 화해와 용서의 시간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다리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결국 자기도 강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이다.’
시편 130편의 결론은 용서를 통한 속량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자유와 광복과 해방이다.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와 자비뿐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첫 번째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를 향해 ‘두 번째 자비’를 실천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용서의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내 죄와 빚의 무게가 너무나 커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에, 그 무게를 탕감해주셨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이다. 벌써 73주년을 맞았다. 1945년 8.15의 감격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완전한 광복은 분단을 가져왔다. 우리는 평화와 통일은 공짜가 없음을 값비싼 대가를 치루며 배웠다. 적대와 전쟁, 불화와 증오의 기나긴 시간을 통해 그 비싼 값을 치웠다. 이제 화해와 용서의 때가 무르익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끝없이 용서와 화해를 촉구한다. 더 이상 어리석음과 불순종을 반복하여 실패하지 않도록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비극이든 희망이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품고 산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예레미야는 애가에서 슬픔과 함께 희망을 노래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님의 기도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듯이 하루하루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이 함께 하는 역사를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이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주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은 지금 깊은 곳, 어둠 가운데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는 아침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지금이 대낮인지, 어둠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부름을 듣지 못한다. 그러니 내 민족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어둠에 빛을 비추시길 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찾아오셔서 위로와 회복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그런 빛 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