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은 신라의 화랑이었던 ‘난랑’을 위해 쓴 비석문인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불·선 3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예를 들어,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교지(敎旨)와 같다. 매사에 무위(無爲)로 대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교지와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이것을 알기 쉽게 요약하면 이렇다. 1. 우리나라 고유의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2. 그것은 풍류도(風流道)이다. 3. 풍류도의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4. 풍류도는 유·불·도(儒·佛〕) 3교(敎)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 5. 풍류도는 모든 중생과 접하여 교화한다.
대(大) 학자이며, 문장가요, 유ㆍ불ㆍ선에 두루 달통했던 도인(道人)이며, 신라 말기 최고 지성인이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이와 같은 증언은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이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사상과 자주·독립이념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현묘지도 풍류도란, 한국인이 먼 옛날부터 자생적으로 계승하여 온 한국 고유(固有)의 전통사상(傳統思想)이며, 이것이 제도화 되어 신라의 화랑도 국선도가 된 것이었다.
《선사(仙史)》란 단군 이래로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까지를 망라한 유명한 선인(仙人)들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선가(仙家)의 사서(史書)이다. 신지(神誌)의 녹도문자로 되어 있는《천부경》을 맨처음 태백산에서 발견한 분도 바로 최치원 선생이었다.
녹도문자로 되어 있는 《천부경》을 바르게 읽기가 매우 어렵고 힘들었지만, 대(大) 학자요 문장가요 도인이었던 최치원 선생은 그것을 해석하여 한문으로 옮겨 적은 뒤, 묘향산에 각(刻)을 해두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을 발견한 분이 바로 계연수(桂延壽, ?~1920) 선생이었다.
계연수 선생은 《천부경》의 발견을 ‘낭가(郞家)의 경사’라고 하였는데, ‘낭가’란 ‘화랑도’를 말함이며, 바로 국선(國仙)의 도(道)인 ‘국선도’이다.
최치원( 857〜? ) 선생은 12살 때(868년, 경문왕8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한 신라의 천재로, 당나라에서 문명(文名)을 드날렸다.
최치원 선생의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 서문에는, 12살의 아들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며 아버지가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나도 자식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니, 잘 가서 공부에 힘쓰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최치원은 선생은 “다른 사람이 백 번 할 때, 나는 천 번 하였다.”고 인고의 노력을 적고 있다.
당(唐) 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최치원 선생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글을 써서 난을 제압하였다.
햇빛이 활짝 퍼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는가! 하늘 그물이 높게 달렸으니, 반드시 흉적을 베리라! -〈토황소격문〉中 -
최치원 선생은 글로써 반란을 토벌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문장력으로 당나라 전체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게다가 명문장으로 난을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었으며, 당나라 황제로부터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렇게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치던 고운 최치원 선생은 조국 신라에 몸을 바치고자 886년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당시의 신라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중앙 귀족들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발이 자행되면서, 국정은 붕괴일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몰락해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최치원 선생은 894년 진성여왕에게〈시무(時務) 10조(條)〉의 정치 개혁안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기득권 귀족 세력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좌초되고 말았다. 이에 최치원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관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계림(鷄林, 신라)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 고려가 일어난 개성)은 청송(靑松)이다."
계림은 시들어가는 나뭇잎이요, 곡령은 푸른 소나무라는 말이니, 최치원 선생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등장하리라는 걸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관직을 떠난 최치원 선생은 산수(山水)를 벗 삼아 구름처럼 바람처럼 이 산 저 산 떠돌며, 수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마오. 산(山)이 좋으니 어찌 산을 나가리요. 뒷날 내 자취를 두고 보시오.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다.
이렇게 ‘입산시(入山詩)'에 적은 것처럼 최치원 선생은 만년에 가야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청학집(靑鶴集)》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노닐던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천의 청향산(淸香山), 지리산의 쌍계(雙溪)인데, 이곳은 모두 산세가 좋고 경계가 아름답다. 만년에는 가야산에서 은거하다가 숲 속에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는데, 선화(仙化)하여 선계(仙界)로 들어갔다고 한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는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곡성(谷城)은 남월(南越)의 이인(異人)이다. 일찍이 집 하인에게 명하여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친구에게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하인이 산에 들어가 보니 단청(丹靑)한 누각이 정려(精麗)한데 용모가 극히 아름다운 도인이 노승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인은 편지를 전하고 도로 나오다가 생각하니, 올 때에는 9월이 채 되지 않았었는데, 동구 밖에 나와 보니 벌써 2월이 되었다. 아는 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은 고운이고, 노승은 현준(玄俊)인데, 현준은 고운의 외종형이라.” 하였다.
주요업적으로는〈계원필경(桂苑筆耕)〉〈시무(時務)10조(條)〉〈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등이 있으며, 말년에는 시해법(尸解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력으로 고려시대에는 최치원 선생을 문창후(文昌侯)로 봉하였으며,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문천자(文天子)로까지 숭상하였다.
이렇게 문인(文人)으로서 뿐만 아니라, 선인(仙人)으로서도 많은 영향력을 후대에 미치고 있으니, 김종직의 시(詩)에는 선생이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선생이 지상선(地上仙)이 되어 조선시대까지 세상에 살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더러, 지금도 지리산에서 공부하는 수도자들 간에는 최치원 선생을 보았다는 사람이 간혹 나오고 있다.
《규원사화》를 지은 북애노인 역시 고운 선생과〈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최고운은 자상하고 똑똑하여 글을 배우는데 있어서도 뭇 사람 중에 뛰어났고, 옛날과 지금의 일에 대해서도 널리 알뿐만 아니라, 글 짓는데도 이름이 뛰어났으니, 그 말이 참으로 옛 성인(聖人)의 교훈의 정화(精華)를 잘 캐냈다고 할만하다.”
최치원 선생이 황소(黃巢)의 난을 제압했던 양저우(揚州)는 최근 ‘최치원 기념관’을 크고 멋지게 완성하였다. 한국 관광객들은 꼭 들리게 될 테니, 그들의 관광수입이 늘어날 것은 당연한 이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