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김 성 문
가야라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왕국은 금관가야이다. 금관가야는 어떻게 건국됐고, 왕들은 어떤 정치를 했는지 궁금하다. 그 당시 유적과 유물이 있는 금관가야 지역을 찾았다.
『삼국유사』에 가야 건국 신화가 실려 있다. 건국 신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신성화한 이야기이다. 서기 42년 3월 김해 지역에 있는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구간들이 가보니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땅에 드리워져 있었다. 줄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금상자가 싸여 있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알이 있었다. 구간 중 아도간(我刀干)의 집에 갔다 두고, 이튿날 가서 보니 여섯 명의 사내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니 키가 9척이나 됐다. 알에서 제일 먼저 나온 사내아이는 수로(首露)로 그달 15일 왕위에 올라 국호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했다. 나중에 금관가야라 불렀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고을로 가서 왕이 됐다.
금관가야는 왕이 열 사람 있었고, 532년까지 491년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시조 수로왕은 건국 2년째 신답평에 도읍을 정하여 성(城)과 궁궐, 관청, 무기 창고, 곡식 창고 등을 짓는데 농한기를 기다려 짓도록 했다. 건국 3년째는 갑자기 석탈해가 나타나 왕위를 빼앗고자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술법으로 겨루기했으나, 수로왕이 능력이 우수해 석탈해는 신라 계림의 땅으로 달아났다. 서기 102년, 신라가 읍즙벌국과 실직곡국 간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자 신라 파사왕은 수로왕이 학식과 지혜가 풍부하다면서 영토 분쟁의 해결을 부탁했다.
부모 공경과 자식 사랑 정신이 강한 제2대 도왕은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여 밀양 삼랑진 천태산에 부암(父庵)을, 어머니의 은혜를 위해서는 김해 무척산에 모암(母庵)을, 진영 봉화산에는 자식을 위해서 자암(子庵)을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제6대 신왕은 신라인인 ‘복수’를 왕후로 맞이했다. 그 후로 신라인을 많이 등용했다. 제8대 장왕은 금관가야 시조왕 내외를 공경하는 정신이 대단했다. 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합혼한 곳에 서기 452년 왕후사를 창건했다.
인간의 생명을 최고로 생각한 제10대 양왕은 서기 532년 신라 23대 법흥왕이 금관가야를 침략하자 서로의 사상자를 내지 않기 위해 경남 밀양 ‘이궁대’에서 신라에 나라를 양위(讓位)했다. 그래서 양왕이라 부른다. 경남 산청 태왕궁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양왕은 죽을 때 “망국의 왕이 흙으로 묻힐 수 없다.”라고 하여 산청 왕산 기슭에 돌무덤으로 남게 됐다.
김해 지역에는 금관가야의 유적지와 유물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유적지로는 수로왕릉과 왕비릉이 있고, 건국 신화 터인 구지봉과 금관가야 초기의 왕궁과 수로왕비의 중궁이 있었던 분성대 등 여러 곳이 있다.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볼 수 있는 유물 출토지는 김해 양동리, 예안리, 대성동, 부산 복천동 등의 고분군이다.
사적지인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토기류, 철제류, 장신구류, 환두대도 등이 많이 출토됐다. 중국계 거울, 북방계 청동 솥, 왜계 철창 등이 있어 외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양동리 고분은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까지 확인되어 금관가야의 묘제 변천에도 최적의 유적지로 평가된다.
다른 사적지인 예안리 고분군도 양동리 고분군과 같이 여러 형식의 무덤이 있다. 무덤에서는 덩이쇠, 투구, 금과 은제 귀걸이, 유리∙호박제 구슬류가 출토됐다. 거의 모든 무덤마다 유물과 약 1,800여 년 전의 사람 뼈가 출토됐다. 고대 사람 뼈 연구와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완벽하게 출토된 인골은 2004년 서울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김종일 교수가 DNA를 분석한 결과 인도 남방계 여성임을 밝혔다. 이에 따라 허왕후는 인도 계통의 여성임을 입증해 주는 단서가 됐다.
대성동 고분군은 낮은 구릉 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위치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사적지인 이곳은 1~5세기 지배 집단의 무덤으로 양동리 무덤 형태와 같이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됐다. 무덤에서는 다량의 토기류, 철제류, 장신구류 등이 출토됐다. 대형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 벽옥(碧玉)제 대롱옥, 비취제 곱은옥 등이다. 출토된 유물은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양동리에 이어 대성동 고분에서도 출토된 청동 솥은 북방계 유물이고, 로만글라스 파편은 실크로드상의 교류가 금관가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복천동 지역까지 세력을 뻗은 금관가야는 복천동에 많은 고분을 남겼다. 3~7세기까지 조영된 고분들이 사적지로 지정됐다. 5세기 중엽의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방무덤이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한다. 신라계 토기가 출토되고 갑옷과 투구류가 많으며 마구류도 더욱 발달했다. 금관가야 문화가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복천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많은 양의 덩이쇠 출토는 가야가 철의 왕국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금관가야는 10명의 왕이 존재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분명하다. 그 당시 문화를 밝힐 수 있는 고분도 많다. 물론 다른 가야도 고분을 통해 실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가야가 임나라고 그들의 교과서에 수록하여 지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 49년, 249년에 신라를 깨뜨리고 가야 지역 7국을 평정했다고 한다. 식민사학자는 120년 후인 369년부터 200년 동안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나 기록이 허위임이 밝혀지고 있다.
금관가야는 가야국 중에서 맏형의 가야국이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찬란한 역사를 가졌다. 가야사도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다. 하루빨리 가야사가 바로 잡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사국 시대로 불릴 날을 꿈꿔본다.
대성동 고분 출토 목걸이, 촬영: 국립김해박물관, 2019.06.01.
첫댓글 왜곡된 가야사가 바로 잡혀
사국시대로 불릴 것입니다.
대단하십니다. 화이팅!! 신병하
관심 가져 주시고
좋은 멘트에 감사합니다.^^
'6가야'에 대해서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자세히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들면 건강관리를
잘해야되는데
운동도 꾸준히 하시는지요?
박보건
읽어 주셔서 댕큐!
운동은 산행과 조깅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작품을 읽고 겨우 금관가야에 대해 조금 눈을 틔운 것 같습니다. 가야사를 모두 엮어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글을 모두 복사해서 밑줄쳐 가며 읽어도 워낙 가야를 모르니 답답했습니다.
조 선생님! 가야에 관심가져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은 비가 오고 있어요.^^
회장님! 직접 답사한 글 실감이
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재곤
국장님! 바쁘실덴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옛 역사로 이야기는 몇차례 강의로 들었지만 이렇게 김해김씨의 뿌리를 머리속 깊이 남게 글을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인
금관가야에 대한 깊은 이해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셔요.^^
금관가야에 대한 글을 읽고 많이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실제로 현장을 답사하여 옛 조상들의 자취를 엿 볼수 있어 좋았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화이팅! 장희진
읽어 주시고 좋은 멘트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