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속사적 성경묵상 ● (셋째 해_4월 3일)
<사도행전 3장>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예수 이름의 권세”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1-21)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4:4)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회에 성령이 강림한 당일에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설교로써 예수님의 왕권을 선포한 데 이어서,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권세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장에서도 이미 사도들에 의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음이 기록되었는데(2:43), 이처럼 3장에서 앉은뱅이의 치유 사건이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앉은뱅이의 치유는 메시아 시대의 표징의 하나로서(사35:6), 이제 성령이 임한 주님의 교회는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의 대리자로서 ‘메시아적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한 후에도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습관을 좇아 오후 3시에 성전에 기도를 하려고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보고 그를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앉은뱅이의 나이가 40세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4:22)은 이 앉은뱅이가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광야에서 방황하였던 것을 연상시킴으로써 당시 유대 민족의 영적인 상황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앉은뱅이가 성전의 ‘미문(美門)’ 즉 ‘아름다움의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모습은 어딘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즉 유대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그 불구자에게 아무런 구원의 소망을 주지 못함으로써, 유대교는 구원의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그를 온전히 치유하시며 구원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주변에 모여들자 베드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먼저 그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결코 자신들의 권능이나 경건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이 그를 치유하였음을 선포합니다. 즉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였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모세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로서, 지금 하늘에 계시면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 받을 것을 권고했고, 이런 ‘솔로몬 행각 설교’로 집단 회심이 일어나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5,000명이나 되었습니다(4:4).
이 치유 이적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 기적을 보고 자신들에게 모여들어 놀라움과 찬탄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지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영광을 받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오직 예수님과 그 이름에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인본주의적인 교회와 달리 초대교회가 능력이 있었던 이유임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오늘의 기도 ● “자신의 인간적인 영광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범죄들이 없게 하소서!”
https://cafe.daum.net/waterbloodholyspirit/MuKX/103
첫댓글 아멘
인본주의적인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