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의 기도
시편 90:1~12
시편 90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출애굽 영도자 모세의 기도입니다. 성경의 편집으로 볼 때 지난 시간까지의 시편은 바벨론 포로기 만큼 늦게 잡을 수 있는데, 이 시편은 출애굽 당시에 쓰여진 시편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성문서의 저자 중에는 가장 고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 신앙과 불평과 반역으로 인해서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널리고, 재난으로 인해서 황폐케 되며, 그 시대의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고를 받았던 때에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이 가리키는 기사를 민수기 14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 기도문을 쓰게 된 목적은 아마 지루하고도 피곤한 광야생활 가운데서 백성들이 장막 안에서 사용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편은 가장 오래된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서도 느끼시겠지만, 이 시편의 주제는 우리 인간의 무상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은 꼭 구약성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신약성경에서도 같은 사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무상함을 강조하는 사상은 구약성경의 선지자와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석양낙조 황혼이 깃든 인생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달과 별들의 빛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할 때, 고요히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하고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여행하며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는 인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물어 봅니다.
사실 인간 역사래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 하러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은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대답합니다. 사람은 한 평의 공간을 다 채울 수 없고, 시간적으로 말하면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일생이 이렇게 잠깐 지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본문 1-6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계신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과거에도 돌보아 주셨고, 오늘도 돌보아 주시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왜 모세가 기도 첫머리에 이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하나님의 포기 선언을 받은 이상, 그들의 조상에게 이미 보여 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나안은 장막 속에 살던 그들의 조상, 족장들에게 있어서는 순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그 족장들의 거처가 되셨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가서 어떤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때, 그 곳이 비록 장막이라 해도 집에 있는 것처럼 평안했습니다.
애굽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게 속박의 땅이었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핍박과 환난 속에서 민족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 안에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히 지내는 축복을 받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풍파, 환난, 역경, 질고가 많다 하더라도 주 안에 있을 때 평안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후렴 :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4.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우리의 평화는 주 안에서의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주님은 우리의 거처가 되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도 평안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영원히 같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죽어 가는 피조물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위로도 죽으면 없어질 위로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주께서 원하시면 흙으로 된 이 육체를 말씀 한 마디로 티끌이 되게 하십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인간을 지배하시고 인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하실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질병이나 그 밖의 사고로 인간을 죽게 하실 때는 그가 인생을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모두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며 죽이기도 하시고, 무덤으로 내려보내기도 하시고 다시 거기서 올라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도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허무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과 같습니다.” 한 경점이란 3시간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말하는 천 년이란 긴 세월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영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루의 시간도 안됩니다. 과거든 미래든 천 년 동안의 모든 사건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 아니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영원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무상합니까? 5,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인생들은 끊임없이 영원의 대양을 향해서 흘러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물줄기는 끊임이 없습니다. 인생들은 그 물줄기와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낳자마자 죽기 시작합니다. 매일 매일의 생명이 말하자면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홍수 때처럼 갑자기 쓸어가 버리기도 합니다. 홍수는 그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립니다. 노아의 홍수를 기억하시지요? 방주밖에 있는 것은 모두 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죽음이란 바로 끊임없이 닥쳐오는 대홍수인 것입니다.
더구나 인생이란 꿈속의 생과도 같습니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자기들의 무상함을 잘 모릅니다. 무서운 영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처럼, 세월의 흐름이 인간들에게 실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다 지나간 다음에 라야 꿈처럼 인생이 허무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풀의 생명처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사실 수에 칠 것조차도 못될 정도로 허무한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습니다. 풀은 상하기 쉽습니다. 노년이란 약하므로 겨울이 오면 인생은 곧 시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풀이 여름에 자라다가 겨울에만 시드는 것이 아니라 한 여름에도 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때로는 질병이나 재난으로 인해서 때 아니게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그가 비록 70의 생을 누리고 80의 건강을 즐긴다고 할지라도 영원 속에 흘러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본문 9절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빠르다는 뜻이지요.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라는 우리 시조가 있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그대로 표현한 시조입니다. 또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는 시조는 호화롭고 태평하던 오 백년 간의 고려 왕조도 일장춘몽과 같은 것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도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라고 했습니다.
정말 바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코로 호흡하는 것인데, 죽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호흡이 끊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응급 환자에게 산소 호흡을 시키지 않습니까?
사실 인간이란 몹시 흥분하였다가 곧 잊어버리는 꿈과도 같고, 잠깐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 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현대 문명은 의학 부문에도 많은 발전을 가져와서 인간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 보면 햄릿이 그의 친구 호레이셔와 함께 무덤가에 서서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햄릿은 옆에 굴러다니는 해골 하나를 들고 절반은 풍자적으로, 절반은 우울한 심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게 호레이셔, 알렉산더 대왕도 땅 속에서는 이런 모양이 되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럴 테지, 사람이 죽어서 무슨 하찮은 일에 쓰일지 알게 뭐야? 고귀하던 알렉산더 대왕도 그의 시체가 마지막엔 술통마개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어?”
“글쎄요,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요?” “아니, 조금도 지나칠 게 없지. 아주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거기까지 갈 터이고, 실상 그럴 수 있는 일이야. 한 번 들어보게.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네. 그 시체는 땅에 묻혔네. 오래 지내는 동안 그 시체는 한줌의 흙이 되었네. 그런데 알렉산더의 변신인 그 진흙으로 맥주 통 마개를 만들지 못해?”
여러분, 죽으면 왕도 거지도 구별이 없고, 사람이나 짐승의 분간이 없이 모두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음 앞에는 왕후, 장사, 영웅, 호걸의 구별이 없이 병마개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절망적인 존재입니까? 힘쓸 필요도, 일할 조건도 없습니까? 여기 모세는 확신에 넘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여기 우리의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 인생의 안식처가 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 세상을 살아가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갈 곳이 어디입니까?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입니다. 절망입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어도 돌아가 쉴 집이 없는 나그네는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마음껏 즐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갈 곳이 있는 나그네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요14:2)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속에 인생의 참된 만족과 안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거처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지루한 변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미(美)를 알며 청춘 남녀가 사랑을 느끼듯이,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느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느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인생관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계관이 다르고 우주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들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시편 42편을 쓴 시인처럼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담대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10절을 보십시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지혜자가 말했듯이 우리의 일생은 이야기하는 것처럼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우리가 날아갑니다. 한 해가 지나가면 그것도 역시 허공에 사라지는 말과 같습니다. 지나가 버리면 한 마디 말로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애 중에 어떤 해는 기분 좋은 해도 있고 어떤 해는 그렇지 못한 해도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해서 80을 산다고 해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수즉다욕’(壽則多辱)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도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수고와 슬픔밖에는 없습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여기 70, 80이란 말은 그 당시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의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으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70년 살고 강건하면 80년의 수를 누렸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20세 이상으로 계수 하였는데, 그 때에 계수 된 모든 사람들은 그 후 50년이 못되어 다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70, 80이 되기 전에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70 내지 80까지 산 사람도 멸망이 선고되었으므로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수고와 슬픔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가나안의 기쁨을 생각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기도합니다. 본문 12절의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 함을 가르 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한 말씀은 곧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이 얼마나 짧은가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언제 이 세상을 떠날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7장 4절에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 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 할 수 있는 지혜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옛날 한시(漢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 몇 해나 사노? 흔히 말하기를 70이라고 한다. 그러나 70년 중에 늙어, 어려, 병들어 일하지 못할 때 있으니, 이 삼자를 제하면 40년밖에 더 되느냐? 40년이라지만 일하는 낮과 일 못하는 밤을 가르면 20년밖에 더 되느냐? 인생이 70의 수를 누린다고 하여도 일할 수 있는 시간은 20년뿐이니, 이제 그 남은 시간을 선용하여라”
사도 바울은 “시간을 아끼라.” 다시 말해 “잃어지는 시간을 속량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날 수를 세어 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참된 지혜로 진정한 경건의 훈련을 쌓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날 수를 올바르게 계산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하고 힘써 일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당하는 그 날을 우리 일생의 마지막날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한 번만 이 세상을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도중에 친절을 베풀 일이나 누구를 도와 줄 일이 있으면 그것을 연기하지도 않고 등한시하지도 않고 즉시 행합니다. 왜냐 하면 나는 이 길을 다시 통과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의미 깊은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한 번만 지나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하루하루 너무 아까운 날들이 아닙니까? 이처럼 소중한 날들을 어떻게 허송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비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보람되게, 생산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모든 사람에게 덕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내 일생에 있어서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그냥 품고 있을 수 있습니까? 회개하고 화해해서 의미 있는 삶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죽음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밉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죽으면 숙연해집니다. 용서 못할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가장 보람된 일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팔았습니다. 반역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기 전날입니다. 그런데 그가 은 30냥의 돈 때문에 괴로워서 자살하게 될 줄 미리 알았다면 은 30냥을 받았을까요?
마지막날을 생각하면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무를 최선을 다해 감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 이런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마지막날처럼 산다고 해서 계획이나 경영이 없이 살자는 말은 아닙니다.
성 엘몬드와 같이 우리가 일하는 것은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사는 것은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 함을 가르 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나를 알면 주님이 보입니다.
성경본문 : 시편 90: 1-17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91:1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잠8:25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벧후3:8, 시39:5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욥20:8, 욥22:16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욥14:2, 시92:7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78:33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39:4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신32:36
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시31:10
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시44:1, 시77:12, 시92:4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
읽으며 묵상하며 : 나를 알면 주님이 보입니다(90:1-17)
영원한 거처이신 주님(1-2)
이 시는 시편에서 유일한 ‘모세’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의 불볕더위와 짐승들로 인해 위협을 당했고, 불순종하는 백성들로 인해 괴로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라는 사실로 인해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슬픔 가득한 인생 (3-10)
광야 생활 내내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이끌어야했기에 모세는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70년, 더 살아 봤자 80년 정도의 인생을 살지만, 그 세월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혹시 나는 잠깐 왔다 가는 이 세상에 너무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나요?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까?’, ‘어떻게 하면 더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대신 어떤 인생이 진정 가치 있고 의미 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인지 고민해 보기 바랍니다.
회복을 위한 기도(11-17)
모세는 사람이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며,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든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형통할 때나 고통을 당할 때, 언제라도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세요. 애통하는 회개의 간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출처 : 새벽나라
**********************************************************
살며 생각하며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어느 목사님의 QT를 옮겨 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응봉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일까 한 번쯤은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원한다는 결심도 하며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라는 찬양을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원한다고 하면서 대개는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배 출석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선교도 잘 하고, 헌금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겠지요.
물론 선을 행하고 큰 일을 행하는 것도 하나님께 기쁨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147:10-11)
하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힘을 자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능력과 지식과 소유한 무엇인가를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사람,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사모하며 기대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내 맘대로, 생각대로, 힘대로 알아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며 기대는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하는 사람은 자기 의와 능력으로 살기에 하나님이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대하며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고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그 누구도 잘 살 수 없으며 살 수 없습니다.
교만하여서 방향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쫓다가 망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씀해보세요.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고, 속이 쓰려도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해보세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13-20)
이런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저는 오늘도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옮겨 쓴 글
***************************************************************************************************
질문하며 적용하며
1. 하나님께서 친히 거처가 되신다는 약속이 절실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90:1)?
2. 주의 영원성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90:2)?
3. 주 앞에서 인생은 어떤 존재입니까(90:7)?
4.고난의 시간만큼 보상해 달라는 요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90:15)?
5. 우리의 인생이 짧고 허무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나요?
그런 인생에서 당신은 무엇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나요?
6. 당신의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서 신앙에도 기복이 있진 않나요?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고, 편안할 때는 하나님과 멀어져 있진 않나요?
*****************************************************************************************************
확신하며 간구하며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있게 하옵소서
들의 백합화와 까마귀 그 어느 것 하나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심이 없으신 주님께선
그 무엇보다 우리 인생들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의 필요와 자녀의 깊은 마음까지 다 헤아리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날마다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말씀하신 주님
저는 연약하고 믿음이 없어 이 땅에서의 안연한 삶을 위해
먼저 자신의 배 부터 채우기에 급급하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나 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기 보다 언제나 적당한 선을 두며
내게 남은 것을 가지고 늘 하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임을 잊지 말며
더욱 선한 일에 부요하며
하나님의 의를 위해 저의 가진 작은 것으로
늘 최선을 다해 섬기는 하나님을 믿는 자다운,
아버지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
저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저의 작음을 인정하며 더욱 더 크신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겸손함과 담대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옮겨 쓴 기도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