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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의 수반이 된 마누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는 1936년 1월 1일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그는 이미 의회를 해산한다는 칙령을 수중에 진기고 있었다. 새로운 총선은 2월 16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는 그 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자유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1월 7일에 선거 일정이 공표되었고, 선거 운동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전에 치렀던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적으로 연합한 쪽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이렇게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연합체를 구성하도록 자극하는 분위기는 중간 지대를 공동화하고 사람들을 좌우로 양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좌파의 혁명적 폭동과 군대와 치안대의 잔인한 진압은 타협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어서 민주주의가 숨쉴 만한 여지가 없었다. 양쪽 모두 종말론적 언어로 상대편을 공격했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정치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적 결과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만일 이번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우리는 곧장 내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뒤질세라 우파도 비슷한 태도로 맞섰다. 우파는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면 폭력 혁명과,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미 약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우파는 기본적으로 자치우익연합과 국민블록(Bloque Nacional) 내 왕정 지지자들과 카를로스파의 연합 세력이었다. 자치우익연합 지도자 호세 마리아 힐 로블레스는 우파 연합체를 ‘전국 반(反)혁명전선’이라고 불렀다. 카탈루냐에서는 ‘질선의 카탈루냐 전선’이 이 연합 세력을 대표했는데, 이 단체에는 ‘카탈루냐 연맹’, ‘카탈루냐 국민행동’, ‘에스파냐 혁신’, ‘카를로스파’, ‘급진공화당’ 등이 참여했다. 그가 내세운 가톨릭 조합주의가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파시스트다운 면모를 띠기도 했던 힐 로블레스는 지지자들이 대중 집회에서 ‘헤페(Jefe, '우두머리’를 뜻하는 스페인어. 무솔리니를 부르는 ‘두체’나 히틀러를 부르는 ‘퓌러’를 모방한 말이다.), 헤페, 헤페‘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지도자로 추켜세우는 것을 용인했다. 힐 로블레스의 선거 광고물 중에는 마드리드 중심가의 한 건물 전면을 뒤덮은 초대형 포스터가 있었다. 시민들에게 배포된 수백만 장의 팸플릿에는 선거에서 만약 좌파가 승리하면 “군중이 무장하고, 은행과 집들이 불타고, 재산과 토지가 분할되고 약탈당할 것이며, 당신의 부인을 남과 공유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파의 선거 운동 비용은 지주, 대기업가, 가톨릭교회로부터 나왔고, 가톨릭교회는 우파에 투표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투표하는 것이라면서 우파 연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국민블록의 주요 인물이었던 호세 칼보 소텔로
1936년 선거 유세 기간 중에 우익 진영과 인민전선은 치열한 선전전을 펼쳤다. 자치우익연합의 대표 힐 로블레스는 '저에게 절대 다수 의석을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위대한 에스파냐를 드리겠습니다'라고 쓰인 초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1931년 4월 공화국이 선포된 이래 교회와 수도원 방화에다 헌법에서 반교권적 법률을 계속 시행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 지도부는 오래전부터 공화 정부에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4년 10월의 반란은 교회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비록 합법적으로 들어선 정부라 하더라도 기꺼이 불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화 정부가 국가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자 교회 재정은 궁핍해졌고, 사제들은 신자들의 헌금에 더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6년경 스페인에는 약 3만 명의 사제가 있었는데,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 수준도 낮았으며,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교회 지도부는 교회가 누리던 특권을 완강하게 지키려 했다. 추기경 비달 이 바라케르(Vidal Y Barraquer)가 교회의 재정 위기를 타개할 방법으로 부유한 교구들이 가난한 교구들을 도와줄 것을 제안했을 때 대부분의 주교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추기경 비달 이 바라케르
1936년 1월 15일 중도 좌파와 좌파의 여러 정당들이 단일 연합체 형태로 선거를 치르기 위해 협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인민전선이었는데, 여기에는 공화좌파, 공화연합,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청년단, 에스파냐 공산당,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생디칼리스트당, 노동자총동맹이 참여했다. 카탈루냐에서는 공화좌파, 카탈루냐 공화행동, 카탈루냐 공화민족당, 카탈루냐 사회주의연합, 라바사이레스 연합(Unio de Rabassaires), 그리고 공산주의 계열의 소집단들이 좌파전선을 이루었다. 바스크 민족주의당 또한 국민블록에 참여하라는 바티칸의 압력을 뿌리치고 인민전선에 합류했으며, 갈리시아에서는 갈리시아당이 자체 내 우파와 결별하지 않은채 인민전선에 합류했다.
인민전선은 선거 전략에 무엇보다도 농업 개혁, 카탈루냐 자치법 재도입, 10월 혁명 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사면 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은행 국유화나 토지 분할은 언급하지 않았다. 우파는 이를 두고 협약에 이 문제들에 관한 비밀 조항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당시 분위기에서 자연스러운 의심이었다. 인민전선의 선거 문구는 사실 온건한 편이었다. 그라나 카바예로파는 이미 토지 국유화, 군대와 치안대 해산, 모든 종교 교단의 해체와 재산 몰수 등을 주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1935년 5월에 발표된 ‘노동연합’의 선거 문구는 ‘대기업, 재정, 운송, 통신의 몰수와 국유화’를 요구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당시 정부에 대항하는 폭력적 반란에 가담하여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도 모두 석방해야 한다는 좌파의 주장은 우파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1934년의 폭동에 연루되어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 모두를 석방하겠다는 좌파 전체의 공개적 결정은 법의 지배, 혹은 입헌 정부를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인민전선 연합의 야누스적 성격은 선거를 치르고 나서 일 주일 뒤에 입증되었다.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인민전선은 ‘보수적 사업체’라고 말한 바로 그날 사회주의 기관지 <엘 소시알리스타>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해낸 것을 스페인에서 이루어낼 것이다. 스페인 사회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의 계획은 같다.”
사회주의자들과 좌파 공화주의자들이 주도한 선거 협약은 아스투리아스 반란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코민테른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럽에서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등장한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비혁명적인 좌익 단체들과도 연합하라고 한 새 정책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이 계획은 두 단계였는데, 처음에는 온건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36년 6월 코민테른의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는 당시 스페인 상황을 고려할 때 ‘에스파냐 공산당과 스페인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민주적 혁명’을 완수하고 파시스트들을 ‘농민 대중과 도시 프티부르조아’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파시즘에 대해 승리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민테른의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코민테른 지도자들은 중간계급을 보호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인민전선의 전략은 단순히 집권에 이르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 점은 7월 23일에 우파 쿠데타에 대한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도 확인되었다. 그 자리에서 디미트로프는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에게 ‘현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런 시도는 치명적 실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공화국 수호의 깃발 아래서 행동하라고 말해야 합니다. …… 동지들, 다시 말해서 저는 지금의 국제 상황에서는 대중을 조직하고 교육하고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기회를 보전할 수 있고,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등 정부가 인민전선에 의존하고 있거나 공산당이 폭넓은 기회를 갖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우리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며 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입지가 강화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겠다는 것은 또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처음부터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여 있음을 의미했다. 7월 17일 아나키스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장군들의 반란을 분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코민테른은 에스파냐 공산당 정치국에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아나키스트들의 정부 전복 기도를 저지할 수 있는 조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그들 뒤에는 파시스트의 손이 숨겨져 있다.”
나중에 프랑스의 코민테른 대표 앙드레 마르티(Andre Marty)가 모스크바에 보고했듯이, 에스파냐 공산당은 거의 전적으로 비토리오 코도비야(Vittorio Codovilla, 그는 ‘메디나’라는 가명을 썼다)가, 카탈루냐 공산당은 에르노 게뢰(Erno Gero, 별명이 ‘가수’ 혹은 ‘페드로’였다)가 이끌고 있었다. 마르티는 후에 에스파냐 공산당 정치국의 활동을 ‘형편없이 초보적’이라고 폄하했다. 호세 디아스(Jose Diaz)가 거의 유일하게 유능한 지도자였으나 간질환을 앓고 있어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앙드레 마르티
비토리오 코도비아
에르노 게뢰. 스페인 내란 중 국제 여단 내 트로츠키 추종자들을 학살하여 바르셀로나의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호세 디아즈
인민전선에서 최대 다수당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었다. 당시 66세였던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당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볼셰비키적인 지도자였다. 카바예로는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좌파와 폭넓은 연합을 의심스러워했고, 스페인 내 또 다른 코민테른 대표인 자크 뒤클로와는 죽이 잘 맞았다. 자크 뒤클로는 라르고 카바예로를 스페인 노동계급의 가장 유능한 지도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카바예로파’의 신문인 <클라리다드>뿐만 아니라 유럽의 공산주의 계열 언론들도 이 늙은 노조 지도자를 ‘스페인의 레닌’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라르고 카바예로는 자신의 수사에 도취되어 새로운 공산주의자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전역을 돌면서 그는 중간계급의 절멸을 주장하는 등 디미트로프의 정책에 배치되는 선동적이고 혁명적인 연설을 쏟아냈다. 그러나 카바예로의 연설이 혁명적 도취의 산물이든 아니면 당시 그가 품고 있던 진심을 드러낸 것이든 간에 이런 좌파의 살벌한 위협에 겁을 집어먹은 우파가 반격을 준비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스파냐 공산당의 영향력은 1921년에 겨우 수십 명의 투사들만으로 창당한 조직으로서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10년 후 왕정이 붕괴될 무렵에는 이미 수천 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1933년 11월의 선거에서 공산당은 17만 표를 얻어 처음으로 의회에 의석을 갖게 되었다. 1936년 전반기에 공산당원은 3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노동조합원 수의 추정치는 입장마다 많이 다르다. 몇몇 역사가들은 노동자총동맹이 150만, 전국노동연합이 180만 명이었다고 보는 데 비해, 다른 역사가들은 전국노동연합은 그보다 훨씬 적었고 노동자총동맹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고 말한다.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는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려면 아나키스트들의 참여가 필요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좌파가 내세우는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투표에는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동지들을 감옥에서 빼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인민전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2월 16일 긴장은 고조되어 있었지만 차분한 분위기에서 투표소들이 문을 열었다. 좌파와 우파, 두 연합 세력은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후에 프랑코 장군의 선전원들은 선거에서 심각한 부정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왕당파 신문 <아베세>까지도 2월 17일자 기사에서 투표가 “파업도, 협박도, 그 어떤 사고도 없이 치러졌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이 찍고 싶은 곳에 투표했다.”라고 썼다.
각 주 선거위원회에서 2월 20일 마침내 선거 결과를 발표했는데, 인민전선이 15만 표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휴를 부추긴 선거법이 1933년의 선거에서는 우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좌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인민전선은 총 투표의 2%도 안되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선거에서 가장 충격적인 현상은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팔랑헤당이 스페인 전역의 총 1천만 명에 육박하는 투표자 가운데 겨우 4만 6천 표, 그러니까 각 주(州) 당 평균 1천 표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결과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라르고 카바예로가 주장한 것보다 훨씬 현실적인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6년 2월의 선거 판세를 보여주는 지도. 붉은 색이 인민전선이 우세한 지역이며 푸른색이 우파, 녹색은 중도파가 각각 우세한 지역이다.
좌파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들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압도적인 지지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우파는 군중들이 사면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러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투표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일부 왕당파들이 힐 로블레스에게 쿠데타를 주도하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힐 로블레스는 총리인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 혁명적인 군중이 거리로 뛰쳐나오기 전에 전시 상태를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힐 로블레스는 패배에 분개하여 자신을 지지하고 선거 운동에 돈을 댔던 부자들에게 위선적인 공격을 퍼부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자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는 등 ‘자살골이나 다름없는 이기주의’를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총참모부 부장 프랑코 장군은 치안대 사령관 포사스(Pozas) 장군에게 밀사를 보내 ‘스페인의 질서와 복지 수호를 위해 단행하려는 결정’에 동참해 달라고 권유했다. 프랑코는 또한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도 사람을 보내 인민전선에 권력을 넘겨주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군대의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치안대와 돌격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포사스 장군
쿠데타가 현실화될지 아직 확신하지 못했던 프랑코는 2월 19일 다시 포르텔라를 찾아갔다. 프랑코는 포르텔라에게 만일 국가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면 뒷날 역사 앞에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포르텔라는 비록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데도 프랑코의 공갈에 굴하지 않았다. 마누엘 아사냐는 포르텔라가 ‘정부 수장’이라기보다는 ‘유령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썼다. 포르텔라는 바로 그날 사임했다. 대통령 알카라 사모라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사냐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고, 아사냐는 자신의 당과 공화연합을 중심으로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아사냐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에 단 1명의 사회주의자도 참여시킬 생각이 없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도 마찬가지로 프리에토가 공화좌파와 사회민주주의 동맹을 맺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새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새 내각이 비교적 온건한 성격이었음에도 우파는 마치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장악하기라도 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군중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승리를 축하하고, 사면령이 발표되기도 전에 죄수들을 석방하려고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다. 교회는 가톨릭 신앙의 적들이 “유대인-프리메이슨이 획책하고 있는 세계적 음모의 지령을 받아 우리를 끝장내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파는 자신들의 적인 좌파가 이미 법의 지배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우파도 자신들이 바라는 스페인의 이념을 지키려면 의회가 아니라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