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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예수께 붙잡힌 자의 복
소 주 제: 산상수훈. 팔복. 사랑
날자 및 분류: 231029낮 설교 창 조 의 말 씀
성 구: 마5:1-12
저 자: 정 헌정 목사 http://cafe.daum.net/changcho
마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해서 천국으로 마무리하신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은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성품 신앙인격을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성품이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성품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가 아니라 이런 성품을 소유한 것이 복이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나오는 복은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마 5:11-12.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거다, 그 이유는 예수도 박해를 받았으니까, 예수 편에 선 사람이라면 당연히 박해를 똑같이 받을 것인데 박해를 받는 예수님의 성품에나 박해를 받는 성도들의 성품은 여기 있는 대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이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아야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이 복이라고 한다,
그러니 만만하지 않다,
우리가 기대하는 복은 즉 세상이 원하는 복은 형통하는 것이다, 남에게 자존심 구기지 않고 꾸지 않고 나눠줄 수 있고 항상 웃을 수 있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성경은 박해를 받아야 된다고 그리고 박해를 받는 성품은 예수의 성품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역설들. 모순들이 우리의 신앙현실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의 성품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복이라는 것 이런 삼중적인 모순과 역설을 이겨내지 못하면 늘 불만이 차게 마련이고 신앙으로 현실을 살아낼 수가 없다,
엡 4:17-19.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이방인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행위를 허망하다고 그런다,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여기에 예수가 없으면 어떤 모습이냐 할 때 허망하고 허망하다는 것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을 해도 어떤 결과가 없는. 가치가 없는 것이며 총명도 없고 무지하다, 모르는 게 최고의 벌이다, 모르면 잘못된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서 아무데도 아닌데 가게 된다,
총체적으로 예수가 없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결국 모든 것이 다 헛될 수밖에 없고 틀린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있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고 떨어져 있으면 끊어져 있으면 땅에 떨어져 말라 썩고 밟히느니라. 이다, 그 다음 행동들은 굳이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끊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니 예수와 연결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묶여 있지 않으며 우리는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며 가치를 공급받을 수 없다, 그러면 자라날 수가 없다, 당연히 충만해 질 수 없다, 하나님과 끊어져 있으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소멸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선택이 있을 수 없고 책임도 없고 가치도 없고 따라서 결과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결실을 하는가. 어떻게 하면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열매를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어야 된다, 줄기는 예수님 자신이다,
엡 4:20-24.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권면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선택과 순종과 책임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 말씀을 오늘의 본문의 팔복에 비추어서 생각을 하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긍휼이 여기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한 것 다 예수의 생명에 붙잡혀 있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분별이 있고 가치를 알고 무엇이 영광인지를 알아야 수치를 알게 되고 하는 것들이 복이다, 그런데 이 복은 이런 걸 갖고 있으면 복이다, 이런 성품 이런 이해를 갖고 있으면 복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복을 주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물론 여기에 해당하는 모든 성품을 갖고 있는 분인데 그 분이 박해를 받아 이 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 분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복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는 이런 성품을 가져서 이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기를 원해서 오셨으나 사람들 손에 잡혀 조롱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예수님이 이것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가 예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예수같이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생명의 감각이 없던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요구와 간절함과 의와 진리에 대하여 영광에 대하여 소원이 생겼다, 이 성품에 대한 소원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도 심령이 가난하기를 원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긍휼이 여기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걸 가지는 것이 복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걸 가지면 다가 아니라 그건 박해를 받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박해를 안 받고 이쪽만 가질 수는 없는가. 단오하게 없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포기하면 둘 다 싫다는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이 복을 포기하면 너는 이쪽 감각 없는 자이고 생명에서 떠난 자이고 무지한 자이고 수치밖에 가질 수 없다,
왜 그러면 이 둘을 동시에 가져야 되는가, 8복은 이걸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너희가 죄인이요 너희가 수치 속에 있으며 사망 속에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비극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가 들어온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빛을 비추기 위하여 이 세상에 들어왔지 혼자 우월함을 과시하려고 들어온 것 아니다,
너희에게 팔복을 허락하는 것은 이 복으로 인하여 무지한 자들과 장님이요 감각이 없는 자들 앞에 저들의 영혼에 너희가 빛과 소금으로 이 내용들을 비추어 저들로 깨우치게 하고 돌아오게 하여 함께 이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주는 복이란다,
그 복은 소유하고 있으면 되는 복이 아니라 비춰야 하고 나눠야 하고 도전해야 되고 그래서 박해를 받아야 되는 일이란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에서 복을 요구할 때는 복을 받으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 책임도 위험도 어려움도 없는 상태로 추구하기 때문에 늘 복이 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증명으로 삼는다,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과 동등 됨의 영광에 자리를 놓고 오는 행위. 사랑이오. 자랑이오. 영광이오. 그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된 증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망이라도 쫓아 들어오시는. 자기가 희생을 당할지언정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시는 신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너희는 내 자식이다, 나를 본받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에 참여하라 너희는 내 영광의 꽃이 되라 이렇게 요구하신다, 그러니까 더 가지고 더 우월하고 아무문제가 없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것으로 기독교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신앙은 언제나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나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을 위하여 내가 내 몫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을 사랑이라 그런다,
그래서 팔복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들은 상대를 위해서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잘난 척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정서란 잘난 척에 끝장이다,
왜냐하면 지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겨야 되니까 필요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으니까,
빼앗아 와야 된다, 그래서 세상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높으신 곳에 계시는 분이기전에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모든 존재의 충만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우리의 신은 우리를 신과 같이 만들어 신과 사랑과 믿음이 가능하게 하겠다는 신이고 사람들이 만든 신들은 겁을 주는 신이다, 이 신들은 폭력적이다, 우리가 만들어서 그렇다, 우리는 그 보상을 받기 위해서 무언가를 내 놔야 된다. 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은 내 말을 따라서 네 인생을 살아봐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내가 언제나 너의 도움이 되겠다, 나에게 물어봐라 그리고 네가 한 일들에 대하여 나랑 같이 의논하자 씨름하자 이게 기독교다, 그래서 구약 내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씨름을 하는가를 봐야 되는데 거길 읽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구약을 보느냐하면 애들은 밤낮 틀려. 애는 지옥가고 애는 상 받고 이렇게 도덕적 이분법으로 보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인생도 여러분이 과거를 돌아보라. 후회가 있고, 불만이 있다, 그게 누구 탓인가, 내 탓이다, 과거를 자기 마음대로 살아놓고 모두 원망을 한다, 그럼 이제 누가 가장 나를 잘 인도할 것인가 하나님이시고 성경이다,ㅏ그러면 스스로 결정하고 순종해야 된다, 그런데 그렇게 못한다,
그런 모든 것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실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은혜가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새로운 힘과 새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를 극복할 수 없고.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보인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한 인내. 용서 회복들을 담고 우리에게 답을 제시한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은 지옥 갔다. 그렇게 말 못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낼 때 이런 스케일로 이런 차원으로 보낸다,
요 3:16-17.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무얼 하시려가를 보셔야 된다, 하나님의 의도 창조주요 심판자의 계획. 요구는 구원이다, 그 근거는 사랑이다, 이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이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라고 좋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도 좋다, 이게 기독교이다,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가 그들의 손에 배신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뺨을 맞고 비난을 받는 것까지 수용하시는 이유는 사랑하시지 때문이다, 그래서 항복의 날까지 기다리신다, 그것이 기독교이다,
팔복은 신자의 성품인데 그 성품을 성품 되게 하는 그 배후에 있는 유일한 조건은 사랑이다, 우리도 우리가 항상 하는 반응을 하지 말고 성경이 하고자 하는 반응과 말을 연습하자,
팔복이 너 자존심 세우지 마라 너 싸우지 마라 너 예의를 지켜라 네가 매달려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우겨라 근거는 내가 너를 사랑하잖아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이건 사랑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증거는 성육신이다, 세상이 자기 일을 하듯이 세상이 주는 것은 사망과 죄이다, 사망은 다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잘못한 걸을 행하면서도 잘못하는 줄 모른다, 세상은 폭력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예수에게서만 내가 죽지만 죽는 것이 부활로 가는 길이고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이 되고 그 하나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 논리 속에 예수님은 우리를 세워놓으셨다, 그리고 너희는 이 길을 가라.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있음을 증거 하라 하신다, 증거는 용서하라 하시고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다,
세상은 폭력으로 이기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다, 사랑과 폭력 누가 이길까
거센 바람과 뜨거운 태양 누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겨낼 수 있을까,
거센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 가장 세찬 바람으로 대응했지만 오히려 나그네는 옷깃을 더욱 여매고 놓지 않았다, 그런데 태양은 뜨거운 태양빛을 비춰주자 나그네는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옷을 하나 둘 벗기 시작했다, 힘만 가지고 누르려고 했던 거센 바람은 내기에서 졌고 태양은 그 내기에서 이겨냈다, 우리들의 삶도 이런 사랑의 빛을 내어 비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는 기적의 순간을 맛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