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 >-⑨공주에 간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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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7월 7일,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허영환은 매일처럼 이날도 오전 10시쯤 서울시청 옆 덕수궁 석조전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다.
당시 문화공보부를 출입처로 하면서 그 산하 문화재관리국과 국립중앙박물관도 아울러 취재했던 허영환이 회상하는 30년 전 이 무렵 그의 오전 취재코스 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경복궁 안 문화공보부 본부와 역시 경복궁 안에 있던 문화재관리국을 들른 다음 오전 10시쯤 걸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그날 취재 거리를 챙긴 뒤 낮 12시쯤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로 오곤 했다.
박물관에서는 대체로 김원룡 관장실이나 한병삼 고고과장실이 허영환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김원룡과 한병삼은 허영환의 주요 취재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7월 7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이런 일정을 그대로 따라 문화재관리국에 들른 허영환은 문화재과장 장인기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국장실로 간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은 허련. 나중에 전남지사를 역임한 허련에게 허영환은 '장 과장이 안 보이는데 어디 갔느냐'고 물어 봤다. 이 질문에 허련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환은 덕수궁 석조전 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장실에 들른 그는 여비서에게 '관장님 계시느냐'고 물었다.
여비서는 '관장님은 공주에 내려가셨다'고 대답한다. 순간 허영환은 관장까지 내려갈 정도면 공주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허영환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장인기도 자리를 떴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허련 문화재관리국장을 다시 찾아가 '공주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다그치게 된다. 그제야 허영환은 '송산리 6호분 방수공사가 있는데 그때문일 것'이라는 대답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정보를 캐낼 수 없던 허영환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 계장에게 '공주 송산리 6호분 방수공사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캐물었다. 계장은 깜짝 놀라면서 '별 일 아니다'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공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으나 허영환은 기자의 직감으로 큰 일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는 이원홍 편집국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공주로 내려가 보아야겠다'는 보고를 해서 취재 허가를 받는다.
허영환은 사진기자 1명과 함께 무작정 공주로 향했다. 허영환의 기억에 따르면 이날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그의 기억은 당시 신문보도를 확인해 볼 때 정확하다.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7월 7일 충청지방 일대에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어떻든 폭우를 뚫고 이날 오후 겨우 공주에 도착한 허영환 일행은 물어물어 김원룡이 머물고 있던 한 여관을 찾아내게 된다.
허영환이 여관에 들이닥쳤을 때 그곳에는 김원룡과 당시 동국대 교수 황수영, 문화재과장 장인기 등이 있었다. 이 순간을 허영환은 '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니까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여관은 어디인가? 허영환 자신도 여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조사연구실 김정기 실장이 때마침 7월 5일 일본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엉겹결에 발굴조사 팀장이 된 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 이호관은 '금강여관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금강여관은 무령왕릉이 20세기 한국고고학 최대 최고의 발굴이면서 동시에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어떻든 금강여관에서 김원룡 일행은 무슨 '공작'을 벌이고 있었을까?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발견돼 입구를 겨우 드러낸 한 전축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 난데없이 기자가 나타난 것이다. 전축분 발견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던 김원룡 일행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허영환이 공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전축분이 무령왕릉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떻든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조사단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속된 말로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허영환이 다른 경쟁지 기자들의 견제없이 그 다음날, 그러니까 1971년 7월 8일자 한국일보에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제목의 대형 특종기사를 쓸 수 있었고, 나아가 무령왕릉 관련 보도에서 한국일보가 다른 경쟁지들을 제치고 내내 선두를 유지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모두 허영환 한 개인의 진술이고, 더구나 30년 전의 회상이라 그의 증언이 얼마나 객관적이며 정확한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이 때 일을 제대로 증언해 줄 주요 인사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생존해 있다 해도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고, 허영환 자신도 무령왕릉 발굴 특종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으므로 그의 증언을 채록해 둔다.
김원룡은 1993년에 작고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글 이상의 증언을 들을 수는 없고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던 윤주영이나 당시 문화재관리국장 허련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만 할 뿐이다.
허영환이 기억하는 당시 금강여관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여 두고자 한다. 허영환 일행이 공주로 내려간 바로 그날 저녁, 김원룡 일행이 머물고 있던 금강여관에 도둑이 들어 발굴조사단의 물건을 몽땅 털어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