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지름’과 ‘시질목’
-‘삼거리(三距離)’의 예산말
며칠 전 대술에 사는 형이 나를 찾아왔어요. 무슨 일로 왔느냐 물으니 대술면 궐곡리에 광역산업폐기물처리장이 들어서려는데 동네 주민들이 그것을 막으려고 현수막을 만들어 붙이려고 한대요. 그런데 알맞은 문구가 떠오르지 않아 나한테 물어보려고 왔다는군요. 그래서 이것저것 이야기 중에
“근디 그 프랭카드는 맹글어서 오따 붙일 건디유?”
내가 물었어요.
“이, 다만(대술 궐곡2리의 마을 이름) 아래 쇠지름이다 붙이야지.”
‘아, 맞다. 예산말에 <쇠지름>이란 것이 있었지.’ 어려서 수없이 들어왔던 ‘쇠지름’. 그런데 그
뜻이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다시 물었어요.
“근디, 성. <쇠지름>은 어려서니 많이 들었넌디, 그 뜻이 뭐였지?”
“잉? 그거 삼거리 아녀.”
그렇네요. 나는 어려서 이웃 어른들에게 <쇠지름>이란 말을 참 많이 들으며 컸는데, 오래 듣지 못하고 쓰지 않는 동안에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형의 얘기를 들으니 발음은 [쇠지름] 같지만 바르게 따져보니 ‘세지름’이군요. ‘세’는 셋을 나타내는 말이고, ‘지름’은 ‘질러가다, 지름길’을 뜻하는 말이네요.
나는 형하고 헤어지기도 전에 종이를 찾아 바로 메모해 놓았어요. 그리고 이 ‘세지름’을 기억할 만한 사람을 찾아 며칠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쉬 만날 수가 없네요. 예산읍내에서 어르신 몇 분을 만나 여쭤보았는데 이 말을 기억하는 분이 없어요. 그래서 대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여쭤 보았어요.
“엄니, <세지름>이라구 아시쥬?”
“쇠지름? 쇠괴기에 붙은 지름 말여?”
“아니유. 삼거리를 뜻허넌 <세지름> 말이유.”
“이, 시질목 말이구먼. 근디 그걸 세지름이라구 힜나?”
“에구, 가넌 시월이 장사 읎다더니 엄니두 그새 세지름을 까잡쉈구먼.”
그렇지만, 또 하나 건졌네요. ‘시질목’. ‘시(三)+질목(길목)’으로 흔히 삼거리를 일컫는 예산말이지요. 아무튼 어머니에게서 ‘세지름’을 확인하지 못하고, 결국 나는 대술로 달려가서 내가 아는 예산말 전문가 중수할머니와 상미할머니를 찾았어요.
“중수할머니, 상미할머니, 지가 사투리 하나 여쭤보께유. <세지름>이라구 아시쥬?”
“세지름? 세지름이 뭐여?”
“아니, 삼거리를 <세지름>이라구 허잖유. <시질목>이라구두 허구유.”
“이, 세지름. 그거 가다가니 질이 둘루 갈러지넌디 아녀?”
“아니, 근디 그거 물르넌 사람이 오딨댜? 넘덜 다 아넌 걸 왜 물어보능겨?”
그렇네요. 대대로 예산에 살며, 세상이 다 표준말로 덮여가도 내 말(예산말)만으로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세지름, 시질목’이 이렇게 생생한 말이었군요.
문득 두 분을 바라보니, 심한 몸살을 보름 동안이나 앓아누웠다가 겨우 일어나셨다는 중수할머니가 바짝 구부러진 등을 지팡이로 겨우 지탱하고 있어요. 그 옆 상미할머니도 허리 뒤춤에 손을 얹고 굽은 등을 추스르고 있어요. 그 모습이 굽어 스러지는 우리 예산말만 같아서 오래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첫댓글 정겨운사투리 .거기에 이 선생님 설명에 오늘도 웃으며 시작합니다.
이쁘게 봐 주시니 고맙습니당~꾸벅! 근데...글을 재미있게 쓴다는 것이 제일 어려워요. 우스개로 끝나지 않으면서 재미있으려면 겁나게 감동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인디...ㅠ
세지름과 시질목... 우린 그냥 삼거리라고 했는데 그런말도 있나요? 정말 예산말 사랑이 대단하신분이시네요.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삼거리>는 한잣말이지요. 특별하지 않는 한, 한잣말이 있는 곳에는 그에 대응하는 순우리말이 있지요. 충청지방에서 <삼거리>는 [상거리]로 말합니다. [삼거리]보다는 [상거리]가 말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뒤에 오는 어금닛소리 'ㄱ'의 영향을 받아 앞 소리 'ㅁ'이 어금닛소리인 'ㅇ'으로 변한 것이지요. 일종의 자음동화(변자음화)로, 동화가 일어나면 발음이 참 편리해지지요. 충청말에서는 표준말과 달리 동화가 다양하게 일어나서 발음하기가 표준말보다 쉽습니다. 돌아보면 재미있고 정겨운 말들이 참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