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조리개
“에미야, 그렇게 말고 좀 더 간격을 두고 심거라. 작년엔 너무 배게 심는 바람에 자꾸 쓰러지는 걸 세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지난여름 대파 모종을 하던 날. 결혼 30년 차 올케의 밭일 돕는 모습이 엄마의 눈에는 여전히 어설프다. 간격에 대해 유난히 엄격하신 엄마다. 텃밭의 이랑을 만들 때는 물론, 자라는 푸성귀조차도 떡잎이 나올 때쯤이면 적당한 간격으로 세워두고 미련 없이 솎아내신다. 그래야만 하나하나 실하게 클 수 있다는 엄마만의 노하우이며 또한 고집이시다. 무슨 일을 할 때 대충이란 말은 엄마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어깨너머로 배운 내 살림 솜씨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종종 듣긴 하지만,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K와 멀어진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그 후 30여 년 동안 우리는 서로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 자부했는데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지극히 차분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이성적 판단이 강한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좋든 싫든 겉으로 심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반대로 K는 다혈질이면서 적극적이고 오지랖도 넓다는 평을 듣는 친구다. 그런 친구와 단 한 번의 다툼이나 마찰이 없이 긴 세월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내 자신도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다.
잘 나가던 K 남편의 사업이 IMF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그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 날 무렵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우리는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져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그리 풍족한 상황이 아니라서 아파트를 담보로 약간의 대출을 받았지만, 어쨌거나 K에 비하면 조금씩 형편이 나아져 가는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K도 내게 큰 기대를 하며 금전에 관한 부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발단은 거기서 시작되지 않았나, 그때는 그렇게만 추측했었다. 나 역시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에 남편 모르게 애써 보았지만, 액수가 크다 보니 끝내 K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후, 돌고 돌아서 내게 날아오던 독이 묻은 화살들. 아무리 내 진심을 전하고 싶어도 이미 K의 마음은 나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다른 그 무엇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과하고 싶어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떠나는 발길을 잡을 수 있는 명분도 없고, 고슴도치로 변해버린 친구를 끌어안고 갈 자신이 내게는 더더욱 없었다.
얼마 전, 알음알음으로 K가 아들 혼사를 앞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형편도 많이 나아져 그 많던 빚도 모두 정리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생각 끝에 K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이즈음의 나이에 이르니 지난 일은 묻어두고 싶기도 했고, 친구 아들 혼사를 핑계로 다른 친구들의 변해가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어쩌면 K도 나와 같은 생각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전해온 대답은 내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너에 대한 숙제를 아직 끝내지 못했어.”
‘그래. 다시 돌아가기엔 서로 너무 멀리 와 있구나.’
내 삶의 절반을 잃어버린 듯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동안 내 삶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이라 여기며 지켜왔던 기준에 대해서도 혼란스럽다. 그렇더라도 이 상황을 두고 굳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선을 긋고 싶지 않다. 오늘 비로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내가 들어주지 못한 그 부탁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평소에 내가 중요시하던 바로 그 간격의 문제였는지. 생각해보면 간격을 두지 않던 K에 비해 언제나 나름의 간격을 유지하던 나였다. 혹시 나의 그런 점이 K를 더 섭섭하게 만든 걸까? 설령 근본적인 원인이 거기서 비롯되었다 해도, 간격에 대한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람 사이에서의 간격은 관계의 시작이다. 간격을 둔다는 것은 건강한 관계의 유지와 동시에 새로운 연결이다. 간격은 생명의 공생을 가능하게 한다. 단지, 상대에 따라 간격의 적절한 조율이 필요할 뿐이다. 그 간격의 거리가 어느 정도일 때 가장 건강한 관계로 지낼 수 있을까? 지금보다 내가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다시 처음부터, 내 마음의 조리개를 점검해야겠다. 적지 않은 날들을 살아왔음에도 하루하루가 여전히 낯설다.
첫댓글 돈 자체보다, 돈을 빌려주지 않은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덤덤하게 거절한 것을 절실했던 상대 입장에선 차갑고 냉소적인 거절로 오해했다든가~
모든 간격에는 용수철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조리개 잘 조절하셔서 우정 회복하시길 소망합니다.
차분하고 짜임새 있는 수필 잘 읽었습니다.
카페에 가입한 후 처음으로 올린 글인데
귀한 말씀까지 감사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절했던 것이 아니고, 저 나름대로 대출을 받아서라도 돕고자했으나 보증인 문제로
어렵게 된 것인데..
진실은 언젠가 드러날거라 믿습니다.
어느 누구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합니다.
돈은 은행과 거래함이 기본이나 그렇지않는 사항으로 우리의 사이에 끼어들죠.
그것을 거절함이 현명하다 생각됩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은 상대방이 컨트롤할 사항이며, 이미 지난 과거이기에 잊으심이 좋을것 같습니다.
잊으려 노력했었고, 잊었다고 여기며 지내왔는데 그게 아니었나봅니다.
@최은수 쉽지않은 과제임 확실하죠.
생각도 물 흐르듯 그냥 놔두라는 말이 언듯 기억 나는군요.
응원합니다~^^
대파를 배게 심으면 상대적으로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이좋게 자라요.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에 대한 숙제를 아직 끝내지 못했어.” 라는 K의 말이 섬뜩하네요.
처음 올린 글 수필의 정석을 갖췄어요. 내가 칭찬 잘 안 하는데 ^^
저만 그랬던 건지,
이렇듯 공개된 공간에 글을 올리는 일이
신인상 공모에 투고하던 때보다도 더욱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내려주신 격려의 말씀에 힘입어 앞으로는 자주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목처럼 나이가 들면서 얼기설기 복잡하게 엉켜진 관계를 정리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솎아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안녕하세요 총무님.
카페에서는 너무 늦게 인사를 드리네요.
앞으로는 자주 뵙겠습니다,
@최은수 간결하고 울림이 있는
최작가님 글 좋아요.
자주 올려주세요.
@강순덕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이젠 익숙한 친정언니 느낌의 윤슬 작가님 말씀에
오늘은 기운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간격 넓으면 광(곶간)이 차고 좁으면 밭이 찬다는 어른의 말씀이 생각 나는군요. 설정은 본인 나름이지요.
설정 밖에서 기웃거리는 관계는 어떠한 방법을 써도 돌아오지 않고 온다해도 다시 떠나게 되더군요.
짜임새 있는 필력이 참 좋습니다. ^^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모름지기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친구 사이는 물론 부부나 부모 자식 간에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 해서, 자기 위치를 망각하거나 관계가 파탄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보곤 합니다.
'나와 엄마 사이에도 나름의 간격이 존재한다'는 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분들이 지금도 더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