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유명한 ‘고통의 장소’가 그라나다였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스페인 내전으로 희생된 가장 유명한 인사로 꼽히는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죽음을 주제로 한 시와 3부작 희곡이 유명하다)가 살해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식인에 대한 파시스트나 군인들의 태도는 적어도 깊은 불신이었고, 대개 증오, 두려움, 경멸이 모호하게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런 태도는 대학 교수 5명이 살해된 그라나다에서 잘 나타났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반란 직전 시 외곽의 우에르타데산비센테(Huerta de San Vicente)에 있는 자기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때가 마침 여름 휴가철이어서 양측 모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지 여행 일정상 그곳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로르카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자유주의적 성향 때문에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 팔랑헤당 소속 시인 루이스 로살레스(Ruiz Rosales)와 그의 가족이 로르카를 도우려 했지만 그를 구해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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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으로 희생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국민 진영에 의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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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르타데산비센테에 있던 가르시아 로르카의 집
8월 16일 일요일 로르카는 매제이자 그라나다 시장이던 마누엘 페르난데스 몬테시노스(Manuel Fernandez Montesinos)가 살해되고 나서 몇 시간 후에 한때 의회 의원을 지낸 자치우익연합 소속의 라몬 루이스 알론소(Ramon Ruiz Alonso)에게 체포되었다. 알론소는 후에 로르카가 “다른 사람들이 국민 진영에 총으로 입힌 피해보다 더 많은 피해를 펜으로 입혔다.”고 주장했다. 인민행동 서기 루이스 가르시아 알릭스(Ruiz Garcia Alix)와 팔랑헤당 소속 지주 후안 루이스 트레스카스트로(Juan Luis Trescastro)가 로르카를 처형장으로 끌고 갔는데, 로르카에 직접 총을 쏜 사람은 트레스카스트로였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햇다. “우리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죽였다. 나는 그가 동성애자임을 고려하여 그의 항문에다 총알 두 방을 쑤셔 박았다.” 국제 펜클럽 회장 H. G. 웰스(Wells)는 로르카가 죽었다는 소식이 바깥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국민 진영에 로르카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국민 진영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로르카의 죽음은 스페인에서 1975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금지된 주제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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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페르난데스 몬테시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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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 루이스 알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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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르타데산비센테에서 국민군에 의한 처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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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루이스 트레스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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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G. 웰스. 영국의 대표적 과학소설가로 우주전쟁, 투명인간 등의 대표작이 있다.
국민 진영은 자신들이 저지른 잔인한 탄압이 적색 테러에 대한 복수일 뿐이라는 말로 합리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비야, 코르도바, 바다호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또한 6개월 후 말라가에서도 보게 되듯이 국민 진영이 저지른 학살은 공화 진영의 처형보다 수십 배는 아니더라도 몇 배가 넘는 규모였다. 말라가에서는 국민 진영의 처형 작업이 우파 사람들을 살해한 책임이 있었던 의용군이 해안 쪽으로 도망가고 난 다음에 벌어졌다. 이것은 우파가 학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측에 의해 살해된 사람 숫자를 비교해보면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이다.
1944년 8월 말라가 주재 영국 영사는 국민 진영이 직접 작성한 수치를 입수하여 마드리드에 있는 대사에게 보고했는데, 대사는 그것을 자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는 “적색분자들은 자신들이 말라가를 장악하고 있던 1936년 7월 18일부터 1937년 2월 7일까지 1,005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도시가 적색분자들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일 주일 동안 그러니까 2월 8일부터 14일까지 3,500명 정도가 국민 진영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1937년 2월 15일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 말라가에서는 16,952명이 ‘합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사료를 보면 1937년 3월 1일부터 23일 사이에만 700명 이상이 산라파엘(San Rafael) 공동묘지 담벼락 앞에서 총살되었다. 그러나 한 지역 역사가는 말라가에서 국민 진영이 처형한 사람이 영국 영사가 제시한 숫자의 약 3분의 1인 7천 명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정확한 숫자야 어찌됐든 국민 진영 측의 ‘보복’은 분명 단순한 복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특히 우파가 숫적으로 열세인 지역에서 공포 정치를 확립하려는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우세한 지역에서도 ‘살인 기계’는 분명한 메시지로 이용되었다. 바야돌리드에서는 팔랑헤당 소속 ‘새벽순찰대’가 914명을 총살했는데, 그중 다수가 역시 반란 직후 체포된 포로였다. 포로들은 전차 객실 안에 갇혀 있다가 매일 10명씩 끌려 나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바야돌리드에 살았던 화학자 헤수스 알바레스(Jesus Alvarez)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광경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비단 무지한 하층민만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소위 명문가 자제들, 교육받은 지식인, 스스로 경건한 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등등 상당히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매우 규칙적으로 처형 장면을 구경하러 나왔기 때문에 구경을 하면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커피나 추로(스페인 전통 요리)를 파는 노점이 생겨날 정도였다.” 9월 24일 바야돌리드 주지사 사무실은 군사 법정이 형벌의 교훈적 필요를 충족시켰는데도 처형 현장에 많은 군중이 운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최근에 받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 광경을 보러 나오지 말 것을, 특히 절대 아내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후방 지역에서 팔랑헤당은 신속하게 국민 진영 준(準)군사 부대로 변신하여 ‘소탕’ 업무를 떠맡았다. 젊은 도련님(세뇨리토)들은 대개 자기 누이나 여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들끼리 기동대를 조직하여 부모 차를 타고 설치며 돌아다녔다. 팔랑헤당 최고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그 전에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신앙으로 무장한 우리 스페인 팔랑헤당은 군가에 맞추어 전진하며 스페인을 위해 스페인을 정복할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한 바 있었다. 진짜 전투원들은 ‘국가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외부에서 들어온 적색분자 오염 세력을 파괴하는 데 몰두했다. 반면에 카를로스파는 프리메이슨주의, 무신론, 사회주의 같은 현대의 악의 무리를 싹쓸이해서 교회가 당한 것을 복수하겠다는 종교적 광신주의로 불타올랐다. 그들은 또한 전선에서 신체 건강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팔랑헤당보다 훨씬 높았다. 자주 과도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전쟁 포로를 가장 올바르게 대우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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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케테(카를로스파 의용군)들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한 사제로부터 축성(祝聖)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가톨릭 왕정을 지지했던 레테케들은 승리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지닌, 그리고 한 손에는 수류탄을, 다른 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국민 진영의 살인 행위는 9월에 정점에 이르렀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19세기에 나르바에스 장군이 임종시에 그의 적들을 용서했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나는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프랑코가 되풀이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알고 싶어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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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바에즈. 스페인의 장군. 발렌시아 공작이라고도 한다. 이사벨 2세 여왕을 보좌했고 여섯 차례 총리를 지냈다.
지난 10년 동안 스페인에서는 각 지역별로 희생자 수, 인적 사항, 희생 과정 등을 자세하게 조사해 왔다. 현재 25개 주에서 정확한 통계 수치가 나왔고, 4개 주에서는 잠정적 수치를 집계한 상태이다. 스페인 전체에서 반이 약간 넘는 이 지역에서 국민 진영에 희생된 사람은 모두 8만 명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집계에 빠진 희생자와 아직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주들까지 합치면 전쟁 기간과 그 후에 국민 진영에 의해 살해당하고 처형당한 사람은 20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수치는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공화군에게 했던 협박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언젠가 “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우리 편 1명을 죽이면 우리는 적어도 너희들 10명을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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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및 그 군대가 반대파를 처형 혹은 학살하고 암매장 혹은 공개매장한 장소다. 색깔 별로 발굴-이장(적색), 유실(흰색)로 구분했다. 이 지도는 스페인 법무부가 작성한 곳이다. 녹색은 아직까지도 발굴이 안된 곳이다. 전 국토를 피비린내나는 학살장으로 만든 자로서, 인구비례로 따져보면 소련의 대숙청이나 나치 독일에서 있었던 집단학살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첫댓글 여기서도 학살극이 벌어졌군요 로르카 죽인건 안타까움 국민군이 공화파보다 몇배나 더 죽였네요
로르까 저 분은 스페인내전 관련한 예술인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인듯요. 여성분인 줄 알았는데 남성분이셧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