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1(목)■
(욥기 6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묵상/욥 6:1-10)
◆ 욥의 충성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하나님께서 버렸다고 생각이 되면 자포자기한다.
술로 마음을 달래고, 세상의 위로를 받고자 타락의 길에 선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거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무너지면 거지가 된다.
그런데 욥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욥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욥의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욥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충성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것은 마치 왕에게 역적으로 오해를 받아서 죽게 된 신하가 왕을 원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왕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하고, 왕의 만세 수를 비는 충성된 모습과 같다. 매우 감동적이다.
"누가 내 소망을 이루어 줄까?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8, 표준새번역)
욥이 비는 소원은 무엇일까?
그 뒷구절로 미루어보면 차라리 주님께서 자기를 죽이셔서 지긋지긋한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부서질지라도 오히려 위로가 되고 자신은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욥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익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가 아니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충성심은 진실한 것임을 드러낸다.
욥은 정말로 하나님께 충성되고 순결한 인간이었던 것이 맞다.
하나님의 평가는 정확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욥처럼 이렇게 충성된 자들이 인류 역사상 과연 몇이나 될까?
◆ 욥의 오해
그런데 욥기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시고 욥은 크게 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도대체 욥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우리는 욥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욥기는 의미가 없어진다. 욥이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욥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단의 게임에 희생된 체스판의 말과 같아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곳으로 욥을 인도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4)
과연 욥을 맞은 화살은 하나님이 쏘신 것인가? 욥이 마신 독은 하나님이 주신 독인가?
아니다. 사탄이 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잠시 은총을 멈추신 것뿐이다.
우리가 매일 무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다.
과거에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건이 났을 때, 다리에서 떨어졌음에도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으며, 많은 사람이 죽는 중에도 그래도 자신은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까라고 말하자 옆에서 내 말을 듣던 대학생 조카가 코웃음 치며 반박했다.
"삼촌, 아예 사고가 안나게 해주시는 것이 감사할 일이지, 그게 무엇이 감사할 일입니까? "
나름대로는 조리 있게 반박하는 말이었다.
나는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면 너는 매일 무사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니?"
인간들은 평소에 무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른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꼭 지켜주셔야만 하는가? 그런 의무를 누가 하나님께 부여했는가? 그런 생각은 인간의 건방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주실지 말지를 마음대로 하실 권리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인이 아니다.
종종 당하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감사치 않는 그런 배은망덕의 모습을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정말 놀랍다. 십자가야 말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드러내신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오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욥이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었다.
오늘날 성도들이 범하는 실수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자기 죄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거나 마귀에게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괴롭히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실리가 있는가? 자신은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심술궂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방짐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살고 그의 사역이 훌륭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그의 평생에 업적은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와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주님은 일하는 마르다 보다 말씀 듣는 마리아를 더 기뻐하셨다.
잘난 체 하는 바리새인보다 가슴을 두드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세리를 더 의롭다고 하셨다.
욥의 충성심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욥의 충성심은 보석과 같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오해했다. 욥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심을 믿습니다."
욥의 충성심은 칭찬할만하지만, 충성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향한 신뢰다.
주님,
주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선하신 나의 목자이심을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