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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주실답사기-영대 유흥준 교수
이장희 추천 0 조회 47 14.09.17 18: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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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원의 문향,주실마을

영양읍으로 달리는 길은 더욱 맑고 맑은 반변천을 거슬 러 올라가는 길이다. 지나다 보면 '오일도 시비'도 있고,'문향 영양'이 라고 쓴 빗돌도 보이며 또 들판 한가운데로는 현2동 삼층석탑이 보인다.
영양읍을 지나 봉화 쪽으로 어느만큼 가다 보면 경상도 산골이 아니라 강원도 산골처럼 경사가 가파르고 산이 가까이 다가서는데 일월면이라 는 멋진 이름이 나와 '아!여기가 일월산이 있는 곳인가 보다'생각하게 되고 또 어느만큼 가다 보면 갑자기 차창 오른쪽으로 산자락 아래 번듯 한 반촌이 나와 답사객을 놀라게 한다. 여기가 시인 조지훈의 고향으로 알려진 주곡,속칭 주실마을로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주실마을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마을에서 인물 많이 나오기로 여기만한 곳이 없을 정도이다. 동자 돌림만 해도 고 조동탁(조지훈시인,고려대교 수),조동걸(국민대 역사학교수),조동일(서울대 국문학교수),조동원(성균관대 역사학교수),조동택(경북대 미생물학교수),조동욱(대구대),조동성(인하대 공학교수)등을 꼽으며,조성환(안동공업대학장),조성하(고려대경제학교수),조석연(평택대 행정학교수),조석경(평택대 컴퓨터공학교수)조석준(경남대 국문학교수),조형석(과기대 산업공학교수)등을 하염없이 손꼽으며,내가 근무하는 영남대학교에만도 정년하셨지만 조봉기(물리학)고 조대봉(교육학),조화석(기계공학)등이 이곳 출신이다.


몇해전 공군참모총장으로 재직중 헬기 사고로 타계한 조근해 대장도 이곳 출신이고,고려병원 원장을 지낸 조운해박사도 여기 출신이니 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물이 어디 하나둘이겠는가.

이 캄캄한 산골,고추밖에 알려진 것이 없는 영양 산골에 이런 문향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영양 주곡의 입향조는 조전이다.본래 한양에 뿌리를 둔 이 집안은 조광조 파동이 일어나는 기묘사화 때부터 이리저리 피해다녔는데 조전이 이곳에 들어온 것이 1630년 무렵이라고 하며 그분의 증손되는 조덕순,조덕린이 모두 대과에 오름으로써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조덕린이영조때 사약을 받아 비운에 세상을 떠나고 역적마을이 된 주곡에서는 출세길이 막혀 자연히 학문에만 힘을 쓰는 문흥이 일어났다. 그래서 조덕린은 가문의 추앙을 받아 옥천 종택에서 불천위로 모신다.


이런 주곡마을이 역사의 흐름속에 용틀임하는 것은 1899년 단발령을 자발적으로 먼저 받아들인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조병희가 독립협회 무렵서울의 개화바람을 보면서 고향의 청년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신문명을 접하게 하고 개화시켰는데 이 개화 청년들의 다음 세대들은 토오쿄오뻬이징,서울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런 개화운동의 센터가 마을의 월록서당이었다.

 

1910년대에 종손의 자부를 재가시켰으니 그 개화바람을 알만한데,마을 한복판에 교회가 앉은 것도 그런 분위기를 말해준다.


이 무렵 조지훈의 증조부 되는 조승기는 의병장을 하였으니 주실에서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것인데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신간회 토오쿄오지회장을 맡아 1928년에는 신간회운동의 일환으로 영양 주곡을 양력과세로 바꾸는 파격적인 단안을 내린다.

그런가 하면 주실은 마을전체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니 이 마을의 전통과 기개와 문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또 1930년대에 주곡에는 '꽃탑회'라는 문화패가 있어서 회지도 만들고 하여 나름대로 활동하였는데 조지훈의 형인 조동진이그중 인물이었고 주실에 처가가 있는 오일도가 여기에 합세했다. 그러나 조동진은 스무살에 세상을 떠나고 오일도는 그의 유작을 모아'세림시집' 을 냈으며 조동진의 시는 결국 아우 조지훈에 의해 계승되었다.
내가 남의 동네 이력을 이렇게 소상히 밝히는 뜻은 아무리 궁벽진 곳이어도 전통과 의지와 열정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시범을 여기서 현실감있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번은 연줄을 대서 영양군의회 부의장이신 조동시 어른의 안내로 주실 마을을 두루 살폈는데 마을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일부러 감주를 담가 40 여명을 대접하는 것을 보고 역시 양반의 상징은 접빈객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주실 마을을 나오면서 아무리 양택이 밝기로서니 이렇게 인재가 많이 나올 수 있는가 싶어 신기해하면서 동네 어른과 인사를 하고 또 동네 얘기를 들으려고 동네 칭찬을 먼저 해올리니 이 어른이 기분 좋으면서도 겸양의 뜻으로 부끄러워하며 하는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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