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的)"과 "지(地)"의 용법 변천
현대 중국어에서는 "적(的)"은 명사 앞에 놓이고 "지(地)"는 동사 앞에 놓인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런 식으로 "적"과 "지"를 사용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규정한 것이다. 현대 중국어에서 "적(的), 지(地)"를 조사로 사용하는 것은 신문화(新文化)운동시기에 비로소 대량으로 출현했는데 그 의미는 원래 갖고 있던 기본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고대 중국어에서 "적(的)"의 용법은 "과녁"이라는 의미로서 예를 들면 한자성어 중에 "과녁을 보고 활을 쏜다[有的放矢]"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지(地)"의 원래 의미는 토지를 가리킨다. 고문(古文) 중에서는 주로 실사(實詞)로 사용하였으며 조사의 용법이 나타난 경우는 전혀 없었다. 명청(明?) 시기에 이르러 일상용어에서 문언(文言)문이 백화(白化)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적(的)"을 조사로 쓰기 시작했으며 점차적으로 문언문 중의 "지(之)"를 대체했는데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것으로 《삼국지연의》중에 장비가 여포에게 한 "내가 네 말을 빼앗은 것만으로도 화를 내면서 네가 우리 형님의 서주땅을 빼앗고도 아무 말도 없느냐!(我夺你马便恼,你夺我哥哥的徐州便不说了)1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역주 : 이 문장에서 적(的)이 과녁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의"라는 뜻을 가진 조사로 사용되었다. 즉, 《삼국지》가 나올 무렵 이미 적(的)을 조사로 쓰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예를 든 것이다.)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러 호적(胡適) 등이 백화문학을 창도하고 문언문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면서 서면(書面)용어가 단번에 전면적으로 백화문으로 변했으나 매우 많은 글자와 단어를 모두 규정하지는 않았다. 노신(?迅)과 다른 사람들의 일부 문장에서 볼 수 있으나 그 당시 사람들은 종종 "적(的)"을 "저(底)"자로 썼는데 당시에 "저(底)"자는 명사 앞에 놓이는 것은 물론이고 동사 앞에도 놓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듯 상세하게 명사 앞과 동사 앞으로 구분해서 쓰게 되었는가? 관건은 바로 서양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서양어법에서는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를 아주 상세하게 구분한다. "지(地)"를 동사 앞에 놓는 것은 사실 한자의 오래된 내포를 사실상 왜곡한 것이다. 신문화 운동을 주장한 사람들이 중국어를 서양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규정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한자마저도 철저히 폐지해버리고 병음만 사용하고자 생각했다.
이런 신문화운동의 주장자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들을 국학(國學)의 대사(大師)라고 칭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중국어를 사랑한 것이 아니며 단지 서양언어의 어법을 이용하여 중국어를 규범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도 진정으로 고문화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할때 그들은 "목적(目的)"이라고 써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어떤 사람은 "적(的)"은 고대 중국어에서 과녁을 뜻하므로 목적이라고 쓰는 것이 마치 합당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지(地)"의 원뜻은 토지이며 여기에서 연역되어 경지(境地)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며 어떤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실행해 나갈 때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데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언가를 해야 하며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할 때 특히 수련을 통해 어떤 경지나 경계 내지는 층차에 도달하고자 할 경우에는 반드시 착실하고 착실하게 한 걸음씩 밟아나가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목적(目的)은 사실상 마땅히 목지(目地)로 써야만 고대문화의 내포와 부합한다.
글/ 新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