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정의로운 결과를 얻어낸 박 대통령의 용기와 비전을 높이 평가한다. 미국은 합의 이행을 적극 지원할 것이다. 위안부 관련 합의 타결은 북한 핵실험이라는 도전에 대한 한-미-일의 공동 대응능력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이는 지난 1월 7일,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전화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정의로운 결과', 우선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물론 이는 위안부 합의 타결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번 합의가 과연 정의로운 결과인가? 작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합의 내용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분명한 사과를 표명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특이점이라면 일본으로부터 10억엔을 받고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 철거를 추진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런 합의를 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고 못 박은 점은 외교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특이하고 기이하다. 이번 합의는 박대통령이 평소에 줄곧 위안부 문제 해결의 기준으로 제시한,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국민이 납득하고 국제 사회가 인정할 만한 상식적 수준의 합의는 무엇보다 우선 일본이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는 데 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소위 '위안부 시스템'이란 것을 운영하면서, 군대가 아시아 전역에서(주로 조선, 대만 등) 수십만 명의 젊은 여성들을 납치, 유인해 성노예로 삼는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학자들은 수십만 위안부 여성들 중 자살한 사람이 40%, 생존자는 25%정도로 추산한다. 일본은 위안부 정책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진상 규명, 사죄, 배상, 역사 교육, 추모사업, 책임자 처벌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결과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왜 위안부 문제에 개입할까? 미국이 대통령까지 나서서 개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오바마의 말 속에 그 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전화로 그가 박 대통령에게 한 말 가운데 '한, 미, 일 공동 대응능력 강화'라는 표현이 그 답을 알려주는 열쇠가 된다. 미국은 지금 미, 일, 한의 공동 대응능력 강화에 온통 힘을 쏟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지렛대 삼아 그 대응능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북한을 든든한 지렛대로 이용하려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설정해야 한다. 북한도 나름 악의 축 역할을 잘 해 주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그동안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어왔다. 급기야 북한은 핵무장까지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며칠 전엔 수소탄 실험까지 했다. 미국이 미, 일, 한의 대응 능력을 강화시키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중국 견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미국은 빠른 속도로 경제, 군사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그동안 누려온 패권을 조금도 중국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천 년 중화주의 사상에 젖어 살아온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 순응할 나라가 아니다. 그야말로 G2의 패권 경쟁은 앞으로 갈수록 치열하게 전개될 게 뻔하다. 지구촌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아주는 견제 세력이 있는 것은 어느 면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입지 조건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의 군사주권을 손에 쥐고 있는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미, 일, 한 공조체제와 군사동맹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공들 들여왔다. 위안부 문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대충 해결하도록 이제까지 독려하거나 지휘 한 것도 그 일환이다. 전쟁 할 수 없는 나라 일본이 전쟁 할 수 있는 나라로 변신하는 것도 묵인하고 자위대의 해외 출병까지 보장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전후 미국은 전범국 일본을 일방적으로 키워줬다. 그동안은 경제적으로 키워줬지만 이제는 군사적으로도 키워주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미, 일, 한 동맹에서 그 동맹의 성격을 간과할 수 없다. 그 동맹은 어디까지나 서열적 동맹이 될 것이다. 미국이 일본을 지휘하고 ,일본은 한국을 지휘하는 관계라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위안부 합의 과정은 좋은 사례라고 본다. 막강한 힘과 돈을 갖고 있는 미국은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유능하게 뛰고 있다. 주먹과 돈으로 돌아가는 지구촌에서 모든 나라가 저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미국과 궁합을 잘 맞춰온 일본도 신바람이 날 정도로 국익을 하나하나 잘 챙기고 있다. 특히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날개를 다시 활짝 펴고 나는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어 더욱 신바람이 났다. 전후, 한국전쟁 시 큰 돈을 벌었던 일본이 다시 한 번 큰 돈을 벌고 또 군사대국으로 성장할 기회를 일본은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 뛰거나 챙기고 있나? 안타깝게도 그런 미국과 일본과 동맹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수렁에 더 빠져드는 형국이다. 지금 같은 미, 일, 한 동맹이 강화될수록 우리 민족의 분단은 심화 고착되고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는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일본에 예속되는 상황도 생기고 ,갈수록 심화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단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전진 기지로 전락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그것도 세계에서 미국 무기를 가장 많이 구입하고 , 해마다 막대한 주한미군 주둔비(2014년 9200 억)까지 부담하면서 말이다. 미국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한 정의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이 사실은 자명하다. 날이 갈수록 대다수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 재협상을 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합의를 두고 미국은 '정의로운 결과'라고 단정하지 않는가. 미국은 지금 우리의 이익에 반하는 자신의 이익을 정의로 여기는 것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정의와 우리의 이익을 위한 정의가 일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가 윈-윈하는 정의로운 관계를 서로 맺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주먹과 돈의 힘이 지배하는 냉혹한 질서로 돌아가고 있다. 지구촌에서 가장 주먹이 강하고 돈이 많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내세우며 정의의 깃발을 일방적으로 높이 들 때 약한 나라들이 당하는 피해는 자못 크고, 흘리는 피는 많다.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독선적으로 추구하며 다른 나라들을 수단으로 삼을 때(타국의 수단이 되어줄 때도) 얻는 결과는 참으로 비참하다. 주먹과 돈에 뿌리를 둔 나의 정의는 수많은 너를 해치거나 죽이는 결과를 반드시 낳는다. 이런 결과가 누적되면 급기야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나를 상하게 한다. 베트남전쟁(1960-1975)은 좋은 사례이다. 미국은 그 전쟁을 일으키면서 '정의로운 전쟁' , '거룩한 전쟁', ' 공산주의 대 자유주의 전쟁'이라고 선전했다. 미국은 이 전쟁 기간 동안 베트남 땅 위에 1천 2백만 톤이 넘는 폭탄을 퍼부었다. 하늘에서 퍼부은 폭탄이 5백만 톤이고 , 지상에서 터트린 폭탄이 7백만 톤이 넘는다. 한국도 참전한 그 전쟁으로 죽임을 당한 베트남인은 190만이고, 부상자는 450만이나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전쟁은 불의한 전쟁, 더러운 전쟁, 내전에 개입한 전쟁, 베트남의 자결과 독립을 위한 총선거를 방해한 전쟁,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라는 사실이 점점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1965년 한 해에만 미국 군인 4만 2천 2백 20명이 탈영을 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 중 8년 동안 군대 징집을 기피하거나 거부한 미국의 젊은이가 무려 57만 명이나 되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도 그 중 하나였다. 1972년 '뉴욕 타임스'에 의해 폭로된 소위 '펜타곤 페이퍼'는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불의하고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전쟁인가를 낱낱이 드러낸 결정판이다. 이 페이퍼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 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모음집이다.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국의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쟁에서 패망한 지 20주년(1955)에 회고록을 출간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교훈'이란 그 책에서 그는 강대국 미국이 약소국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14가지로 정리하며 반성했다. 그 중 몇 가지만 보자. 1.지나친 미국의 이익을 추구한 정책적 오류. 2.미국이 지원한 사이공 정권 지도자들의 반민중성. 3.베트남 민중의 외세에 대한 반감과 해방 독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에 대한 몰지각. 4. 미국식 자본주의와 정치제도를 유일무이한 인류적 생존 양식으로 착각한 미국의 오만과 무지. 5.현대식 무기와 군사력 등에 대한 물질적 전쟁 수단에 대한 과신. 6.무지하지만 자주독립한 민족적 미래에 대해서 의식화된 베트남 민중의 원초적 역량을 과소평가한 것.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7:12) '내가 당해서 싫은 거 남에게 하지 않고, 내가 받고 싶은 거 남에게 먼저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시작이요 끝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이 하나님의 정의를 좇아 살면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인 삶 곧 평안의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성육신하신 분이다. 그가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나라다. 지금 여기서부터 이 하나님의 정의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 사회, 세계가 하나님 나라다. 하지만 주먹과 돈의 힘으로 굴러가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한다. 그런데 그 세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있다. 그 마음은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은 또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야 세상이 변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깃들어야 마음도 변한다.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稱義는 무엇인가? 내세 천당에 가는 티켓을 얻는 수단인가? 아니면 그것은 구원의 서정(order)에서 단지 이른바 성화의 전단계일뿐인가? 칭의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이다. 이 진리를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아주 잘 가르쳤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믿음으로 받는 속량 곧 죄 사함, 다시 말해 칭의는 '주권의 전이'(Lordship change)라는 진리를 이 말씀은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주권을 흑암에서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바꾸어 가며 사는 사람이다. 칭의는 개인적 칭의만이 아니라 사회적 칭의도 있다. 즉 사회도 그 중심 주권이 흑암에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돈과 주먹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로 돌아가는 세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주먹과 돈을 섬기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지배를 받는 새인간을 보고 싶어 하신다. 사회적 칭의 없는 개인적 칭의 없고, 개인적 칭의 없는 사회적 칭의 없다. 올해에도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선한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칭의(구원)의 은총을 더 확보하기 위한 싸움 말이다. 마음의 중심에서 거짓 정의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을 쉼 없이 하시는 성령을 좇아 살자. 동시에 일터와 사회에서 사이비 정의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활동을 끊임없이 하시는 성령을 따라 살자.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예수 믿지 않는 기독교인'저자) |
첫댓글 도미닉크로산은 하나님의 정의는 긍극적으로 분배의 정의라고 결론지으면서 이를 '하나님의 급진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두번째는 폭력적 정의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정의인데 이를 '문명의 정상성:이라한다.
성서에도 하나님의 정의가 아닌 인간의 정의가 하나님 말씀으로 둔갑하는 것이 공관복음, 사도바울서신, 구약성사 여러 곳에 있는데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우리 기독인들은 '신명기'를 모세오경이라하여 모세의 저작으로 알고있는 분이 많다.
그러나 신명기는 북이스라엘 멸망후에 쓰여졌으며, 당시 10개 지파 가운데 앗시리아의 살육으로 없어진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신명기는 포로기 이후에 재편집의 과정을 거치는데 특히 신명기에는 '상벌규정'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즉, 하나님 말씀을 잘들으면 복을 주고, 말을 잘 안들으면 저주를 퍼부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크로산의 말을 빌리면 문명의 정상성이다.
다시말하면 앗시리아의 침략의 내용이 상벌규정으로 신명기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앗시리아왕이 북이스라엘 민족에게 상벌규정을 적용한 것을 성서기자가 민족정신의 고취와 여호와의 순종을 내세워 각색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식 정의는 힘있는 자의 폭력적 정의이며, 앗시리아의 정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