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12신]최근 질부姪婦를 맞이한 셋째 형에게
최근 질부姪婦를 맞이한 셋째 형에게
세밑입니다.
얼마 전 이 ‘코로나 난국’에도 질부를 맞이하셨죠?
며느리로부터 따뜻한 밥 한끼는 대접받으셨겠지요?
‘집안에 보배가 들어왔다’며 싱글벙글하던 형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무튼 경사 중의 경사입니다. 거듭 감축드립니다.
고향엔 올들어 첫 눈이 푸짐하게 내렸습니다.
바람만 세게 불지 않으면 눈 내리는 겨울날은 마냥 축복이련만,
사랑채 처마 끝에 매달아놓은 풍경風磬소리가 그치지 않고
온종일 울어댑니다.
눈발이 사방팔방으로 날리는 게 괜히 마음이 심란하더군요.
뒷산 가족묘지의 어머니 묘소에도 하얀 이불이 덮여졌겠지요.
어머니도 안도하며 겨우내 따뜻함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저 없을 때 다녀가시며, 가마니만한 누룽지 한 푸대를 놓고 가셨더군요.
고맙습니다. 아버지께 가끔 끓여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쓴 까닭은,
어제의 동네 뒷산 산행에 대해 약간의 수다를 떨고 싶어서입니다.
형도 잘 아시죠? 초등학교때 소풍도 갔던 봉화산烽火山을
50년도 더 넘어 어제 동네친구와 3인이 함께 올랐습니다.
말치재에서 1km밖에 안된다는 안내판이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올랐으나, 정상(461m)을 넘어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하산하는 능선을 찾지 못해 헤매다 4시간도 넘게 산행을 했습니다. 여러 번 벼르던 산행길이어서 기분은 몹시 좋았지요.
정상에 봉수대 흔적이라도 있는 줄 알았으나 그저 바위 몇 개만 놓여 있더군요. 얼마 전에는 그곳에서 가야시대 유물이 발굴됐다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35보병사단의 경계철조망만 따라가면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습니다. 사격연습이 한창인지라 유탄에 맞을까도 염려가 되었지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껏 말치재라고만 알고 있던 그 고개 이름의 출처를 처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체신청에서 세운 팻말에 ‘두치봉수’라 돼 있더군요. ‘말 두斗 우뚝 솟을 치峙’의 우리말이 ‘말치재’임을 안 것이지요. 여태껏 산굽이가 47개라서 ‘말칠(마흔일곱)재’라 한 줄 알았지요. 노령산맥 줄기가 몇 개 동네의 뒷산을 형성하고 있는, 마치 누에같은 제법 긴 산줄기를 언젠가 한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어제 아주 잘 됐습니다.
대학시절 친일親日시인詩人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라는 시집을 탐독하고 암송했던 게 생각납디다. 제가 문학적 감수성만 뛰어났다면 <말치재 신화> 연작시를 진작에 쓰고, 시집 한 권쯤 남겼으련만, 능력이 안됨을 한탄한 적이 여러 번입니다. 사람 사는 곳이야 다들 비슷할 것이고, 온갖 얘기들이 탄생했다 사라졌다는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옛사람들의 사랑, 연애, 미움, 죽음 등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그려보고 싶었거든요. 그런 것을 서정주마냥 쓰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들을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라도 운문韻文으로 작성하는 게 글쟁이들의 미션 아닌가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제라도 노력하면 될까요?
엊그제 형이 보낸 카톡대로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 기록해 놓으면 향토문화사도 될 터이고, 면을 넘어 군의 전지역을 발품삼아 사적 등 역사 이야기들을 수집하면 향토사학자도 될 수 있겠지요. 봄이 되면 우리 뒷산에서 시작해 어제의 길을 다시 거꾸로 걸어볼 생각입니다. 군데군데 두릅과 고사리도 참 많더이다. 고사리와 두릅순을 따려는 마음에서라도 일삼아 꼭 올라, 저만의 길을 닦아볼 생각입니다. 형이 같이 오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겠지요. 형제가 짜란히 ‘고향의 등반 둘레길’을 개척한다는 의미도 있을 거구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와 아버지께도 말치재의 어원語源, 즉 ‘두치斗峙’에 대해 말씀드리니 “몰랐다”며 금세 알아들으시더군요.
형, 제가 고향으로 귀향하여 정착한지 어느새 1년 하고도 반년이 흘렀습니다. 저야 ‘40년 로망’의 실현이라고 하지만, ‘두 집 살림’으로 떨어져 사는 아내와 아들네와 손자가 갈수록 마음에 걸립니다. 하지만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저대로 아버지를 모시며 고향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니까요. 그런 저를 때마다 격려해주는 것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올해는 생강 심으라며 영농자금을 주셨지요.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것도 좋은 경험이니 하나 더 배운 것이지요. 초보 농사꾼의 실패담이면 또 어떻습니까? 참나무 토막에 표고버섯 종균을 심어놓았는데, 엊그제 그중에 딱 한 송이가 솟아올랐습니다. 마치 기적奇蹟같더군요. 비닐하우스도 한 채 지었습니다. 겨울상추도 심어야겠습니다. 제가 어찌 농사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흉내나 몇 번 내보다 중도하차할 것이 틀림없지만, 재밌고 유익한 일은 이뿐인 것같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만수무강萬壽無疆입니다. 이 마음이야 형도 똑같겠지요. 어머니는 비록 안계시지만, 당신이 평생 터잡아 ‘한 집안’을 일으켜세운 이 집에서 아프지 않으며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머니처럼 안방에서 제 품에 안긴 채 천명을 다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귀천歸天이겠지요. 1954년 겨울에 이 집을 산 직후 두 달도 안돼 형을 낳았고, 이후 저를 비롯해 여동생 세 명을 나아 키우며 가르친 집이 바로 이 집입니다. 지금은 60대 중반이래도 ‘청년’ 취급을 받지만, 제가 나고 자란 이 집에서 ‘인생 제2막’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저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혜特惠’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재밌고 보람되게 지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근황은 가
끔씩 보내드리는 ‘찬샘뉴스’로 잘 알고 있겠지요?
세밑이기에 부쩍 형 생각도 났으나, 어제 산행하면서 모처럼 편지를 써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습니다. 다가온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형님의 가족들에게도 행복과 행운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줄입니다.
고향에서 우제愚弟 절합니다